[Opinion] 그녀는 누구일까요 < 밤쉘 > [영화]

글 입력 2018.08.0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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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동안 헤디는 얼굴로 주목받았지만
정작 그녀가 누구인지를
보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죠.
그래서 그녀는 누구일까요?

(영화 <밤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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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쉘>
2018

감독 알렉산드라 딘



밤쉘(Bombshell)


밤쉘(Bombshell)은 폭탄선언, 몹시 충격적인 일, 또는 아주 매력적인 미녀를 뜻한다. 왜 하필이면 밤쉘을 제목으로 택했을까.
 
처음 포스터 속 여인의 모습 한눈에 매료되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수가 있지. 부끄럽게도 호들갑을 떨며 감탄했다. 그녀는 헤디 라머(Hedy Lamarr)다. 그 시대에, 아름다운 외모로 칭송받던 배우로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된 서사일 거라고 어렴풋이 예상해보았다. 줄거리를 훑어보았다. ‘여배우’와 ‘와이파이’라니. 왠지 묘하게 의아한 조합이면서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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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디 라머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것이 마냥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로 칭송받았다. 헤디 라머의 스타일은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녀는 백설공주와 캣 우먼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의 영감이 되었다는데 이 영화에서 짚는 문제가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원치 않을 정도로 ‘외모’에만 사람들이 주목했던 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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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의 헤디 라머


그리고 2016년의 어느 날, 잃어버렸던 헤디 라머의 인터뷰 테이프를 찾아내게 된다. 인터뷰 테이프에서 재생되는 목소리는 1990년 당시 76세였던 헤디 라머의 육성이다. 오랜 시간, 풍파 많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헤디 라머의 목소리는 긴장된 것처럼 들리기도, 한편으로는 세상 모든 것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뉴욕의 한 언론사 사무소에서 재생된 테이프. 그녀의 숨겨진 삶을 그녀 스스로 서서히 드러내는 목소리. <밤쉘>은 그녀의 육성을 들려주고, 모습을 보여준다. 헤디 라머와 관련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여태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배우이자 발명가인 헤디 라머'의 삶을 천천히 따라가게 한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에요. 저는 외모가 아닌 두뇌에 관심이 많은데 모두 제가 멍청한 줄 알아요. (……) 나는 좀 달랐던 것 같아요. 다른 별에서 왔는지도 모르죠. 뭐가 됐든, 발명은 쉬웠어요.

(헤디 라머, 인터뷰 테이프 내용 중)




‘여배우’라는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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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난 헤디 라머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동시에 호기심과 관찰력 그리고 창의적 아이디어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10대에 들어 그녀는 자신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 여긴 16세에 거대 영화사에 들어가게 된다. 1933년에 영화 <엑스터시>에 출연하며 세상의 주목을 받고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

영화 <엑스터시>로 그녀가 큰 유명세를 얻은 것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논란이 되는 동시에 비난을 받기도 하는 영화였다. 비난의 주된 이유는 최초로 시도된 오르가슴 연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로 인해 헤디 라머는 ‘그런 부류의 여자’로 낙인찍힌다. 아름다운 외모와 논란의 영화가 찍은 낙인은, 오랜 세월 내내 그녀의 발을 붙잡는 편견의 족쇄가 되고 말았다.


혼자 촬영한 장면이었는데 화면을 편집해서 화끈한 정사 장면으로 만들었어요. 원래는 아닌데. (......) 팔을 왜 모으는지 물으니까 질문하지 말라더군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소파에 바늘을 꽂아 자세를 잡는다고. 소란 일으키기 싫어서 하라는 대로 했지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정말 무서웠어요. 나를 죽이고 싶어 했어요. 그때 제가 말했죠. 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헤디 라머, <엑스터시>에서 문제가 된 장면에 대한 말)


그녀에게 족쇄가 될 연기를 했음에도 당시의 그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헤디 라머가 겪는 고통의 시작점에는 영화 <엑스터시>가 굳건히 자리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할리우드 행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인 루이 B. 메이어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의 설립자)는 성녀와 창녀만으로 여성을 구분하곤 했는데, 그는 <엑스터시>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헤디 라머를 ‘창녀’로만 취급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후, 창녀 이미지여야 하는 헤디가 자꾸만 연기 변신을 하겠다고 하니, 그때부터 헤디 라머와 루이 B. 메이어는 더욱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배우로 다시 한 번 낙인찍히게 된다.

어쨌거나 그녀에게는 항상 낙인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던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안간힘을 써서 '그런 부류'가 아님을 증명해보아도, 절대 뗄 수 없수 없는 꼬리표가.



‘여배우인 동시에 여성 발명가’의 낙인


헤디 라머는 미국에서도 활발히 발명을 했다.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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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하워드 휴즈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헤디 라머는 그가 디자인한 비행기 도안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가장 빠른 물고기의 헤엄과 새의 비행에 대해 조사하고, 이를 비행기 날개에 접목시킨 것이다. 전쟁 시에 물만 부어서 먹을 수 있는 각설탕 형태의 압축 코카콜라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비록 실패한 아이디어였지만, 그녀는 아이디어는 끊임없이 생각 해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한편 그녀가 미국에 있던 시기는 전쟁 시기였다. 1940년 여름, 독일군의 어뢰 공격으로 배에 탄 어린아이들 수 백 명이 사망하게 된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더 강인해진다. 발명에의 아이디어를 다시 얻어 무선으로 조종되는 어뢰를 발명하고자 했다. 이 무선 조종 어뢰에 대한 아이디어로 말미암아 와이파이의 기초가 되는 기술이 등장한다. 그녀의 명석함과 천재성은 대단했다. 일상의 곳곳에서 영감을 얻어 발명과 접목시킨 아이디어는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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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아가씨, 전쟁을 돕고 싶다면 새 어뢰 같은 걸 만들지 말고 나가서 전쟁 채권이나 팔지그래. 발명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나가서 돈이나 모아 오시지.

(당시 군 측이 헤디 라머에게 했던 말)


돈이나 모으라는 말을 듣는 건 불행한 일이죠. 그녀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단정 짓는 거잖아요. 낯선 남자에게 키스를 파는 것. 지적 재능을 인정받았다면 자신이 한 일을 더 좋게 생각했을 거예요.

(구글 애니메이터 제니퍼 홈의 인터뷰)


헤디는 군에 제출한 특허를 빼앗겼다. 미국 시민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고 싶었던 헤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명명된 것들'을 하게 된다. 군인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즐거움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전쟁 채권을 팔기 위해 여배우로서 아름다운 모습을 파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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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인을 하고 있는 헤디 라머
 

헤디 라머의 인기에 힘 입어, 전쟁 채권 판매 수익은 현재 가치로 환산했을 때 3억 달러를 훨씬 웃도는 결과를 냈다. 결과는 좋았지만 그녀는 아마 마음 깊은 곳부터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미 타인에 의해 단정 지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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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아름다움을 추앙했던 사람들도 그녀에게 냉정히 등을 돌리고 만다.

누구나 인정할 사실이지만, 사람이 서서히 나이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의 얼굴에 주름이 지는 것도 나이가 들어가며 자연히 따르는 변화일 것이다. 헤디 라머 또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인형이 아니므로, 외모는 과거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을 가진 인형같은 모습만을 기억하려는 세상은, 배우 헤디 라머의 변해가는 외모에 대해 치욕스러운 말들을 동원하며 비난했다.

한 인간에게 가혹한 외모의 잣대를 들이대며 모든 것을 외모로만 평가하는 것.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취급받길 원치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나이가 드는 것, 외모가 변해가는 것은 헤디 라머 스스로도, 그리고 굳이 헤디 라머가 아니라 그 어떤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통제할 수 없는 일, 잘 쳐준대도 통제하기가 아주 어려운 일에 대해 비난을 가한다면 그 누구라도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손녀의 인터뷰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그녀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랑했던 자신의 외모를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동시에 그 외모를 모두가 원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그 과거를 놓을 수 없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 만일 그녀가 여배우보다 발명가로서 인정받고, 더 활발히 지적 활동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덜 고통스럽고,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거라고. ‘이제 쉬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있었을 거라고.

그 외모가 빛이 바랬다고 평가 내린 순간, 아름다운 외모로 추앙하던 세상은 단숨에 그녀를 팽했다. 대중과 언론이 원하고 만들어낸 이미지는 지나쳤고, 허상이었고, 자극적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을 무결한 아름다움의 이미지에 강제적으로 끼워 맞춘 결과는 처참했다. 헤디 라머의 삶의 큰 부분은 이미 고통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헤디 라머, 밤쉘



제가 보기엔 사람들이 저를 모르는 거예요. 저처럼 인생에 굴곡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일생 동안 많은 일을 겪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일생 동안 겪을 일은 모두 겪었다. 이제 쉬고 싶다.

(헤디 라머의 과거 인터뷰 중)


모든 게 항상 쉽지만은 않단다. 가끔 우회하기도 하지. 그것도 삶의 일부야. 나도 여기서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된 것뿐이야.

(헤디 라머와 그 아들의 통화 내용 중)


아름다운 외모로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해 보였던 삶. 화려해 보이기만 했던 그 삶 뒤에 이런 비화가 있다고 누군들 짐작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최선이 외모로 할 수 있는 일에 한정된 것. 그로 인해 내면에 무한하게 가지고 있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살아간 것.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 섹스 심벌, 트로피 와이프, 할리우드의 문제적 배우. 외모 이상으로 가진 능력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런 이미지에 꽁꽁 묶이고 말았다. 그녀의 주장은 묵살당하고, 원치 않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존경을 표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감사한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고, 가슴 아프면서도 가득 벅찬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파일을 전송받고, 글을 업로드하는 이 모든 과정에 그녀의 발명 아이디어가 살아 숨 쉰다고 생각해보니 마음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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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서두에 언급한 ‘밤쉘’의 뜻. 폭탄선언, 몹시 충격적인 일, 그리고 아주 매력적인 미녀. 매력적인 여배우이자 명석한 발명가였던 헤디 라머. 그녀의 삶.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왜 이를 제목으로 택했는지 알게 되었다. <밤쉘>은 충격적인 동시에 아주 명쾌했다. 헤디 라머를 수식할 단 하나의 단어, 밤쉘.

보이는 삶 뒤에 숨겨진, 혹은 타의에 의해 묻혔던 진실에 대한 폭탄선언. 영화를 통해 화려한 배우의 모습 뒤에 헤디 라머라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헤디 라머, 그녀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영화를 다 보고난 후, 그때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쁜 글 하나 읽어줄게요.

사람들이란 비이성적이고 논리도 없고 자기중심적이지요.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세요.

좋은 일을 하면 이기적인 다른 동기가 있다고 비난할지 몰라요.
그럼에도 좋은 일을 하세요.

가장 큰 생각을 가진 대인배가
가장 작은 마음을 가진 소인배에게 무너질 수 있어요.
그럼에도 크게 생각하세요.

몇 년이 걸려 지은 것도 하룻 밤 사이에 무너질 수 있겠죠.
그럼에도 지으세요.

당신의 최고를 세상에 주고 호되게 공격당할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최고를 세상에 주세요.

(헤디 라머)



[심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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