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7월의 햇볕보다 뜨거운 그의 그림 [전시]

글 입력 2018.08.0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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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뜨겁던 7월의 마지막 일요일, 샤갈 러브 앤 라이프展을 보기 위해 친구와 함께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그러나 한여름의 무더위가 무색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샤갈을 즐기고 있었다. 프리뷰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전시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의 인생과 작품이 보여주는 ‘아모르 파티’였다. 벨라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의 삶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알고 싶었다. 따라서 7개의 섹션 중 나의 인생, 연인들, 벨라의 책이라는 3개의 섹션에 더욱 기대가 컸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만남이 더 반가운 것처럼, 샤갈의 색다른 면모 또한 볼 수 있어 기쁘기도 하였다.
 

"나는 벨라가 내 과거, 현재, 미래까지 언제나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 벨라와 처음 만났던 순간 그녀는 나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꿰뚫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가 될 사람임을 알았다."


샤갈의 자서전 <나의 인생>의 일부분이다. 이 글로 미루어 보아 샤갈은 벨라에게 첫 눈에 반했던 것이 틀림없다. 처음 그녀를 본 순간 벨라에게 강렬하게 끌렸고, 그녀와의 결혼을 운명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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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1915
 

이번 전시에서 원작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림 전시가 끝난 마지막 부스에서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이 그림은 벨라가 자신의 생일에 꽃을 들고 찾아왔을 때의 환희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경쾌하게 날아올라 감동에 겨워 두 눈을 감은 채 입을 맞춘다. 사랑을 표현한 수많은 작품들에서 사랑은 화가 자신의 사랑과 가장 닮아 있고, 그래서 제각기 다른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샤갈의 사랑은 처음 사랑에 빠지고 점차 그것이 커져갈 때,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꿈틀거리는 온몸의 신경을 연상케 하였다. 상대에게 너무나 강렬하게 끌려서 때로는 볼에 열이 나고, 몸이 배배 꼬이고, 헛기침을 해대기도 하는. 내 마음이 이상한 것을 몸이 아프다고 착각하게 되는 그런 사랑.

후원자의 재정지원으로 작품 활동을 위해 러시아를 떠나 있던 샤갈은 1차 세계대전 중 고향으로 귀국하여 1915년 벨라와 결혼한다. 그리고 1931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벨라와 자유롭게 프랑스 전역을 여행한다. 파리에서의 결혼 생활은 마치 하루하루가 여행인 듯 설레는 날들의 연속이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그가 사랑하는 연인들을 화폭에 담을 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다. 또한 하늘을 두둥실 날아오르는 비행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가 사랑을 비행과 연결 지어 느끼고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그림들로 짐작하건대, 그에게 사랑은 또한 하늘을 나는 감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비행기에 탑승하여 이륙을 기다릴 때의 설렘. 그리고 마침내 하늘로 서서히 떠오를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멀미. 창밖으로 보이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그에게 결혼생활은 아마 이런 종류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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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인들>, 1937


이 작품에는 강렬한 색채의 꽃이 등장하며, 연인들의 발 아래로 마을이 펼쳐져있어 이들이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한 <생일>에서도 이러한 비행 이미지가 쓰였다. <연인들>에서 연인은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기댄 채 꽃 속에 파묻혀 앉아있으며, 흐드러지게 활짝 핀 각양각색의 꽃은 이 시기에 샤갈과 벨라의 사랑 또한 절정에 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인들>에 그려진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는 그들의 사랑은 축복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샤갈의 자신감과 뿌듯함으로 이해하였다. 더불어 이 두 개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마을은 샤갈의 고향인 비테프스크를 떠오르게 하였다. 벨라와의 사랑은 강렬한 불‘꽃’과 같고 하늘을 떠다니는 것만큼 짜릿하며, 한편으로는 그의 유년기와 고향마을을 기억나게 할 만큼 아늑했을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그러나 누군가 꺾지 않더라도 꽃은 언젠가 지고, 오랜 시간 하늘을 날던 비행기도 착륙하기 마련이다. 1944년 벨라는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샤갈과 영영 이별하게 된다. 인생의 8할이 벨라였던 샤갈에게 그녀의 죽음은 행복의 끝이자 곧 불행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기우나 오지랖 따위에 불과했다. 살아 있는 벨라와 사랑을 나누었던 1937년의 <연인들>과 다르게 1954~1955년의 <연인들>에서 꽃은 강렬하고 치밀하기보다는 온화한 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때의 연인들의 형상도 어딘가에 발 딛고 있지 않은 모습이다. 남자가 크고 두툼한 손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은 여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다. 샤갈은 이 그림을 통해 홀로 남은 자신보다 더 두려웠을, 자신을 두고 먼저 떠나야만 했던 벨라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토닥여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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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인들>, 1954~1955


벨라가 떠난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꽃을 그린다. <사랑하는 연인들과 꽃>에서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마치 꽃병에서 튀어 나오는 모습이다. 이 두 작품에서 꽃은 여전히 시들지 않고 활짝 피어있는데, 벨라는 떠났지만 오랜 날 그녀와의 추억이 그를 살게 한다는 상징으로 이해하였다. 계속해서 희망을 노래하였고 또 다른 인연을 만나며 계속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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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연인들과 꽃>, 1949
  

모이셰 세갈에서 마르크 샤갈로

그는 청년기의 많은 시간을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던 파리에서 보냈다. 그에게 파리는 ‘두 번째 비테프스크’였으며, ‘모이셰 세갈’이라는 이름 또한 프랑스식으로 개명하여 우리가 아는 ‘마르크 샤갈’이 되었다. 그는 “예술의 태양은 파리에서만 빛나고 있었다.”는 말로 파리를 기억한다. 그러다 샤갈은 1차 세계대전 중 고향으로 귀국하여 비테프스크에서 벨라와 결혼하였는데, 고향에서의 생활이 잘 풀리지 않고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마찰이 생기자, 이에 실망을 느껴 1922년 러시아를 영영 떠난다. 그리고 1931년 파리로 다시 돌아오면서 마침내 파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미술계에서 인정받았다는 기쁨을 느낀다.
 

그래도 내 고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갈은 일생동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1926년 작인 <샹봉 쉬르락의 교회>는 샤갈이 프랑스 오베르뉴에서 지낼 때 그린 작품이다. 나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샤갈이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그렸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보자마자 지난 5달 동안 미국에서 보낸 나의 교환학생 생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 Binghamton에 갔을 때, 혹독하게 추웠던 그곳의 날씨와 낯선 문화는, 권태롭다고 생각했던 한국과 익숙한 대학생활, 그리고 청주에 계시는 어머니를 자꾸만 생각나게 하였다. 특히 학교식당에서 친구들과 자주 듣던 노래가 나올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을 흉내 내서 해먹을 때와 같이 내가 익숙한 것과 닮아있는 대상을 마주하면 더욱 그랬다. 아마 샤갈도 비테프스크에 있던 교회당을 꼭 닮은 이 교회를 보며, 나에게 음악과 음식이 그러했듯, 그의 고향을 추억하였을 것이다.
 

방랑이 직업인 유대인 예술가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 온지 두 달이 넘은 지금, 가끔 그곳에서의 생활이 떠오른다.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바쁜 일상에 치일 때면 그곳에서 느꼈던 지루함 혹은 여유가 무척 그립다. 하루 종일 공상을 해도 남아돌던 시간이 만든 울렁거림이 그립다. Binghamton이 고향은 아니기에 이러한 마음을 향수라고 칭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참 이상하게도 떠난 곳과 떠난 사람은 매번 그립다.

그렇다면 한평생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던 샤갈은 어땠을까? 작품 활동을 위해 조국인 러시아를 떠났고,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급히 미국으로 떠난 그는 유럽계 유대인들이 겪는 비극에 대한 샤갈의 근심을 <대 핍박>이라는 작품에 담아냈다.

샤갈은 정든 곳을 떠나서 낯선 세상을 마주할 때마다, ‘이곳에도 언젠가 정이 들 것’을 가장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유대인 예술가로서의 삶은 참 씁쓸하고 고단했을 것이다. 나의 교환학생 생활은 유한했지만, 그가 살아있는 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불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중 연도 미상인 <비테프스크 위에서>라는 작품에서 봇짐을 메고 지팡이를 든 채 하늘에 떠 있는 남자는 연인들을 그린 작품의 비행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연인들의 비행은 하늘을 나는 듯한 설렘과 기쁨을 표현한 것이라면, <비테프스크 위에서>의 비행은 정처가 없는 방랑자의 소리 죽인 발걸음을 표현한 것 같았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핵심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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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테프스크 위에서>, 연도 미상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그러나 우리는 또 한 번 샤갈에게 반한다. 그는 벨라를 사랑한 것만큼이나 진정으로 그의 삶 또한 사랑했다. 그는 1948년 프랑스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까지 지내게 된다. 그 이후로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판화와 성경 삽화, 스테인드글라스 작업까지 모두 아우르는 예술가로 거듭났다. 특히 판화는 샤갈이 전에 프랑스 시인인 라 퐁텐의 책인 <라 퐁텐의 우화>를 위해 작업했던 것이 시작점이 되었다. 특히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답게 샤갈은 당시 인쇄술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색채를 입힌다. 그래서인지 그의 삽화는 단순히 에피소드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각기 다른 등장인물이 생명력을 부여받은 듯 했다. 석판과 동판에 대해 샤갈은 “내 모든 기쁨과 슬픔들을 그것들에 맡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표현하였다. 샤갈이 느꼈던 달고 쓴 인생의 맛을 담긴 그의 판화 작품들을 보며, 나는 기대하지 못했던 만남을 즐겼다.


"유대 예술의 뮤즈, 내 사랑 벨라, 그대는 세상을 떠났지만 내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리라."


샤갈은 살아서는 조국과 이별하고 벨라와 이별했으며, 죽어서는 그가 사랑했던 삶과 이별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으로서 겪었던 방랑의 삶은 벨라의 품에서 안식하였고, 벨라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은 결국 그가 끝까지 긍정했던 사랑과 삶 속에서 예술로 승화되었다. 역시 내 기대가 맞았다. 샤갈은 삶의 마지막까지 인생과 예술을 즐겼다. “우리 인생의 뮤즈 샤갈, 그대는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즐거워 보이는군요.”




[최희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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