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어떻게 독재자는 탄생하는가, 연극 '파란나라' [공연예술]

깨닫지 못한 채 스며드는 집단주의의 광기
글 입력 2018.08.07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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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 1인 또는 소수자에게
정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정치 형태
(두산백과)

집단주의 ; 개인주의와는 반대로
개인의 의사와 이익보다는
집단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 여긴다는 관점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18년,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독재'와 '집단주의'라는 두 개념은 상당히 멀게만 느껴진다. 특히 20~30대의 젊은 층은 태어나자마자 국민의 투표로 선발된 대통령이 5년 임기로 행정부를 이끌고, 소위 3권분립이라 불리는 형태로 입법부-사법부-행정부가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는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에 무척 익숙해져 있다. 이 땅에도 독재정권이 존재했고, 그때가 불과 50년도 지나지 않았으며 당장 바로 옆 북한에서 아직도 독재정권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 역시 그 두 개념을 아득한 역사 속 용어로만 치부해 왔다.

그러다 작년 가을, 극단 신세계의 연극 '파란나라'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안의 파시즘을 발견하는 경험은, 충격을 넘어 공포를 느끼게 했다. 나의 기억 속에 너무도 크게 각인됐던 그 연극, '파란나라'가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대전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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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나라의 시작

연극 <파란나라>는 1967년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실제 실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제3의 물결'이라 이름 붙여진 이 실험은 역사 교사 론 존스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전체주의가 얼마나 쉽게 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집단주의의 유혹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연극은 이 실험을 현대 한국으로 옮겨와 실험이 지속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준다.

연극의 배경은 현대의 한 고등학교 교실. 영화감상 CA(창의적체험활동) 시간에 교사인 이종민은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제멋대로에 자신을 무시하는 학생들에게 재미있는 게임을 하나 해보자고 제안한다.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인 '파란나라'를 만드는 이 게임은, 처음에는 전체주의의 발전 과정을 체험해보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어느새 거대한 파도가 되어 온 교실을, 나아가 온 나라를 집어 삼킨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이들은 교사 이종민을 '이종민 대장님'이라고 칭하며 지도자로 세우고, 흰 티와 파란 명찰로 타인과 자신들을 구분하고, '파-란'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의 방식으로 집단의 상징물과 규칙을 만들어 나간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 교사에게 비협조적이고 심지어 그를 조롱하고 무시하던 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게임의 룰에 적응해가며 그를 권력자로 인정하고 숭상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끝까지 저항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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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는 다양한 학생들이 등장한다. 반의 리더 역할을 하는 정화, 정화의 여자친구이자 자기주장 뚜렷한 모범생 세인, 잦은 성적 희롱에도 항상 웃고 있는 보경, 아이들에게 무시당하며 셔틀 노릇을 하던 창현, 큰 덩치와 강한 힘으로 자기 멋대로 굴던 재성 등등.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처럼, 학생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권력 관계와 이해 관계가 얽혀있다. 기존의 권력 관계가 파란나라 게임을 통해 이종민 대장 아래 모두가 평등한 체계로 뒤바뀌는 과정은 마치 여느 학교드라마에서 펼쳐지는 사제 간의 아름다운 모습처럼 물 흐르듯 펼쳐진다. 모두를 평등한 존재로 대한다는 이념 아래 권력층의 가장 하위에 있던 학생들 먼저 자연스럽게 파란나라에 동화되고, 그 외의 학생들도 각각의 약점을 보듬어주는 선생님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체제에 동조하게 된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조건은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교실 내에서 무척 매력적으로 작용한다. 약해서 시달리던 이들에게는 자신감을 주고, 비록 하위 계급이 아니더라도 각자 약점을 가지고 이를 숨기려 노력하던 이들에게는 평안을 가져다준다. 공연 초반, 보면서 인상을 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욕설과 상스러운 말들을 내뱉고, 예의와 개념이 없어 보이던 학생들이 파란나라 게임을 시작하고 난 뒤 점점 변해가는 모습은 파란나라가 이들을 교화시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학생들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결과'를 보였기 때문에 집단주의라는 잘못된 '과정'은 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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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에서 마지막까지 파란나라에 동조하지 않은 세인은 아이들에게 유별나고 이상한 애 취급을 받는다. 그동안 반의 리더격인 정화의 여자친구면서 공부도 잘해서 권력의 상위층에 자리했던 세인은 다수 속에서 외톨이가 되어 버린다. 다른 반 아이들도, 심지어 다른 지역의 학생들도 파란나라에 가입하고 싶어하고, 파란나라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인은 점점 더 고립되며 혼란스러워진다. 심지어 남자친구인 정화마저 자신에게 매몰차게 굴자, 세인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파란나라에 끼워달라고 반 친구들을 찾아간다. (이 이상은 스포일러이므로 생략하겠다)

애쉬의 선분실험이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하나의 선이 그려진 카드를 제시한 뒤, 각각 다른 길이의 세가지 선을 보여주고 어느것이 같은 길이인지 맞추게 한다. 이 간단한 실험에 정답과 다른 하나의 답을 하는 여러명의 사람을 집어넣으면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답에 동조하는 결과를 보인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집단동조'에 약한지를 잘 보여준다. 연극 <파란나라>에서는 다수결의 원칙하에 소수의 의견과 주장을 묵살하고, 집단을 부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폭력적으로 배제시키며, 개인에게 집단에 대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부여함으로써 집단동조를 일으키는 강력한 억압이 작용한다.

긍정적으로 보이는 결과, 그럴듯한 이데올로기, 모두가 하나를 말하는 집단, 다른 주장을 하면 배제당하는 분위기. 이 속에서 당신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주장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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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포감을 느낀 것은 나 역시 저 속에 있었다면 열렬한 동조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초반에 학생들의 모습이 보기 싫을 정도로 좋지 않아 보였기에, 선생님의 노력과 파란나라 게임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고 희망적인 내일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이 점차 광기에 휩싸이고 그것을 느끼게 된 순간,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인지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나 자신을 발견했다.


"파-란, 파-란, 파-란, 파-란, 파란, 파란, 파란, 파란"


어느새 전국으로 퍼진 파란나라 열풍. 객석 곳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겉옷을 벗고 파란나라의 상징인 흰옷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구호를 외치고, 객석 뒤쪽으로 올라가 관객들을 둘러싸고 점점 커져가는 구호소리를 들을 때의 소름 끼침이란. 내가 느꼈던 것은 단순히 그들이 가진 광기에서 온 것 만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내가 거기에 일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나는 사안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의 게임을 지켜봤고, 내 옆에 파란나라의 동조자가 앉아있는 것도 몰랐으며, 희망이 광기로 돌변하는 순간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만약 내가 히틀러와 나치의 통치 당시 살던 독일 국민 중 한사람이었다면, 나는 뭔가 다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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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집단주의가 얼마나 빠르고 강력하게 사람들에게 주입될 수 있는지, 현대 한국에서 제2의 히틀러의 출현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등 수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떠올리기 어려웠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유려한 집단주의 발현 과정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게 틀어진 것은 특정 한 순간이 아니라 애초에 모든 것의 시작인 집단주의라는 썩은 씨앗과 한없이 나약한 인간 본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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