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Episode 2.

아주 많이 사랑하면 할 수 없는 말이 많아지나 봐.
글 입력 2018.08.09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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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예쁜 단어만을 골라 듬뿍 말을 선물하고 싶다. 그런데 사랑하는 만큼 더 많은 말을 할 수 없게 되나 보다.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꼭 맞는 친구 N. (이따금 보고 싶고 이유 없이 전화하게 된다.) N과는 아마 백 번도 넘게 술을 마셨을 거다. N과 술을 마실 때면 아주 많은 말을 하지만 그만큼 아주 많은 말은 하지 않는다.  N과의 술자리는 대개 적당히 마시고 끝나질 않고 진탕 마시는 술자리가 돼버린다. 술을 마시고 나면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객기를 부리는데, 가령 길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건 우스운 수준이고, 학과 교수님께 대뜸 전화를 걸어 인생 하소연을 하거나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하는 식이다. 그들 앞에서는 하지 못하고 꾹 눌러 집어삼켰던 말들이 왜인지 그녀와의 술자리를 경유하면 술술 나왔다. 다음 날 떠올리면 후회할 게 뻔한 민망한 말들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잘도 해버렸다. 물론 그 모든 말들은 그녀를 수신자로 삼지 않은 경우에서만 그랬다. 정작 그녀에게는 하고 싶은 말들은 하지 못하고 시시콜콜하고 시답잖은 잡담을 늘어놓고서는, 이런 내 보잘것없음을 꿰뚫고 그녀가 나의 본심, 그러니까 그녀를 향한 못다 한 말들을 캐치해주길 바라고 만다.

재작년 겨울, N에게 미안하다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 N을 당황스럽게 한 일이 있다. 이러저러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형식을 갖춘 문자 말고 대뜸 미안하다는 말만 길게 늘여 보낸 문자였다. N은 왜 그러냐 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런 나더러 N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다 괜찮다고 해주었다. 그때의 마음을 지금의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 하지만, 분명한 건 N에게 어째서인지 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는 거. 사소한 일들이나 거창한 일들이나 모두 다. 미안했다. 아주 많이 사랑하는 너에게 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이라는 걸 나는 영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미안해, 하고 난 뒤에 아주 작게 사랑해, 하고 덧붙이는 일들이 그냥 많았다. 아주 많이 사랑하면 그만큼 할 수 없는 말이 많아지나.

시간이 흘러 여름밤 그날, 우리는 또 술을 많이 마셨다. 그리고 N은 나를 껴안고 불쑥 미안하다 했다. 거듭해서 미안해,라고 했다.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속삭이는 말들은 간질간질했다. 간질간질하고 있기에는 그녀가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 더, 한 번 더 했다. 뭐가 미안하냐고 물어도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뭐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았다. 아무튼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고, 밤공기는 뜨거웠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소란스러웠다. 흔들흔들 걸음은 위태롭고, 비척이며 걷는 모양새들이 조금은 우스웠다. 담배를 많이 피웠고 길바닥 아무 데에나 잘도 주저앉았다. 서로를 꼭 껴안기도 하고, 손을 꽉 움켜잡기도 했고, 서로의 볼에 뽀뽀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평소보다 갑절은 다정하게 굴며 마구 부대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취했다. 그런데도 N은 뭐가 미안한지는 끝까지 비밀이었고, 나는 N이 내게 하지 못 한 말들만 곱씹었다.

N이 하지 못한 말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주 많이 사랑하면 그냥 자꾸 미안한가 보다. N이 내게 잘못한 거는 하나도 없으니까. 그건 아마 미안한 마음 말고 사랑하는 마음이랑 더 가까울 거다. 그냥 나를 사랑하니까 미안하고, 미안한 데에 이유가 없고,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못 한다. 우리에게 허락된 말이 ‘미안해'인 게 조금 서글프지만 사랑하는 만큼 말들이 사라져버리는 걸 나는 그냥 안다. 자꾸만 N의 미안하다는 말이 떠오르고 마음이 찌르르해도.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을 줄 알고 괜찮아, 라고 하는 걸 N에게 배웠다. 아주 많이 사랑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들이 미안해랑, 사랑해뿐일 때. 사랑한다고 말하는 때가 좀 더 많아져도 좋겠다.




* 그림은 피터도이그의 그림입니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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