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끝내 괴물이 되지 않기를 [영화]

글 입력 2018.08.11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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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강의 다리 밑을 유독 무서워했던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와 영화관에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던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보았다. 평화롭던 서울의 시민들을 공포와 죽음으로 몰고 간 그 괴물은 극중에서 용산 기지에 주둔하는 미 군의관이 많은 양의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무단 방류하여 생겨난 괴 생명체이다. 처음엔 다리 밑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강으로 떨어지고, 이내 물속에서 튀어나오던 끔찍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린 나는 괴물이 무서웠고, 희봉(변희봉 분)의 가족 이야기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무책임과 이기심은 언젠가는 괴물을 낳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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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어서는 김태용 감독의 작품인 영화 <거인>을 보았다. 사실 배우 최우식을 너무 좋아해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다가 발견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배우 최우식과 김태용 감독은 청룡영화상에서 각각 남우신인상과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나는 최우식의 작품은 앞으로 믿고 보기로 결심하였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괴물>에서 독성물질인 포름알데히드가 한강에 흘러들어가 괴물을 만든 것처럼, 어른들의 말에 담긴 독이 영재(최우식 분)를 괴물로 키울까 두려웠다. 하지만 영재는 물고기가 아닌 17살의 소년이었고, 독이 든 항아리에서 괴물이 되었는지, 도망쳐 나왔는지, 잠겨 끝내 익사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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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칫밥만 먹고 자란 거인


주인공인 고등학생 영재는 일하지 않고, 남에게 빌어먹으려는 무책임한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보호시설인 그룹홈에 제 발로 들어간다. 영재는 요한이라 불리며,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시설 원장과 그의 부인이 있다. 영재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칫밥’을 먹는다. 눈칫밥은 희한하게도 영양가가 전혀 없지만, 눈칫밥을 먹고 자란 아이는 이상하게 몸집만 커버린 거인이 된다. 영재는 여의치 않은 속사정과 달리 겉보기에는 누구보다 싹싹하고 예의 바르다. 사실 영재의 상냥함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두 수 앞을 내다본 결과이다. 영재는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라며, 원장 부부와 담당 신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쓴다. 절대 곁을 내어주지 않는 원장 부부의 비위를 맞추고 어리숙하기만 한 담당 신부에게 어필하기 위해 성당에 착실하게 다닌다. 마지막까지 이들에게는 결코 제멋대로 구는 법이 없다.


“오히려 너 같은 새끼들이
뒤에서 더 무서워.”

“너 알고 보면 존나 내숭이고,
졸라 여우 새끼고,
졸라 무서운 새끼라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집을 나온 영재는 그 스스로도 어떤 게 본모습인지 모르는 가면을 쓴다. 어쩌면 자기 자신까지 속이고 있는 걸지도. 영재는 자신이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는 원장 부부의 그룹홈에 들어오는 후원 물품을 훔쳐다 친구들에게 팔아서 용돈을 마련한다. 누군가 물품을 훔친다는 것을 알게 된 원장 부부가 룸메이트 범태에게 누명을 씌워도 모른척한다. 특히 범태에게 도둑질 현장을 발각 당하고 원장 부부의 귀에 들어갈 것을 염려한 영재는 범태가 그룹홈에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범태의 또 다른 비행을 경찰에 주저 없이 신고한다. 도둑질과 위선, 배신으로 얼룩진 그에게 신부가 되겠다는 꿈은 사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하는 입에 발린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는 원장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여기지 않으며, 그 또한 요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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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도둑임이 밝혀질까봐 걱정하는 영재
 

영재와 요한의 이중성은 점점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간극이 벌어진다. 계속 잡아당기면 예전만큼의 탄성을 잃거나 혹은 결국 끊어져버리는 고무줄처럼 영재는 위태로워 보인다. 그는 남들이 사는 두 배의 인생을 사느라 피로도는 점차 높아져만 간다. 마침내 자꾸만 자신의 영역인 그룹홈을 침범해오는 아버지를 내쫓기 위해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과외 선생님 윤미의 목에 칼까지 들이대며 아버지를 겨우 내몬다. 이 일로 영재 또한 저 멀리 야곱의 집으로 내몰린다.

자신의 동생까지 그룹홈에 맡기려는 아버지에게 영재는 “이럴 거면 그냥 내 앞으로 보험 들어놓고, 손가락을 자르든, 우유에 독약을 타 먹이든 그렇게 해. 부탁이야. 죽여줘.”라고 한다. 힘들어서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이렇게 쪽팔리고 비굴하게 살아야 한다면, 이 아버지가 영원히 내 아버지라면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다. 원장과 범태가 영재에게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을 거라며 거듭 말한다. 결국 영재의 속마음은 이렇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욕망을 음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영재는 더욱 살기 힘들다.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영재가 영화 내내 단 한 번의 독백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태용 감독의 극본과 연출이 가지는 특성이라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재의 성향이기도 하다. 다른 영화에서는 나레이션의 형식으로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사건의 내막이나 인물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거인>에서 영재의 진짜 속마음은 극 중의 영재 주변 인물뿐만 아니라, 관객까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관객은 영재가 하는 말과 보여주는 눈빛과 행동에서 이중성의 피로도를 지레짐작할 뿐이다.


"왜 어른들이 돼서
책임들을 안 지려고 그래, 다들?"


우선 영재의 부모님은 영재를 낳았지만 책임지지 않는다. 따뜻한 사랑, 믿음, 격려 따위의 정서적인 지지와 유대는 바라지도 않는다. 영재는 아직 고등학생임에도 경제적인 지원조차 전혀 받지 못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영재와 그의 동생 민재를 이용해 여기저기서 돈을 구한다. 어머니 또한 무능력하고, 동생 민재까지 시설로 보낼 생각을 한다.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 영재는 차디찬 부엌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먹는다. 일찌감치 영재는 따뜻한 집과 밥이 주는 온기를 잃어버렸다. 이러한 가정에서 영재가 사람답게 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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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에 잠긴 영재
 

그룹홈의 어른들 또한 영재를 지지해주지 않는다. 영재는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집을 나왔다. 그룹홈은 다른 세상이다. 부엌엔 밥이 있고,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아버지가 없다. 그러나 그룹‘홈’ 또한 집은 아니다. 영재는 원장 부부와 신부에게 싹싹하게 굴어 신임을 받는 듯 보이지만 사실 영재를 진심으로 보듬어주는 어른은 없다. 특히 원장은 신부가 되겠다는 영재의 속내를 의심하면서 “내 맘 알지? 아끼니까 냉정하게 얘기해 주는 거야.”라고 한다. 영재가 따르는 젊은 신부는 어떠한가? 신부가 해주는 격려에도 영재를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이나 유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재의 담임 선생님도 어른은 아니다. 영재의 가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어줍지 않은 설득을 하려고 하질 않나, “세상에 학창 시절에 너 같은 그런 상처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냐?”라며 또 한 번 폭력을 행한다. 말도 안 된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현대사회의 청년들에게 더 이상 위로로 작용하지 못한다. 다른 세상에 사는 기성세대가 고통의 한가운데 서 있는 청춘의 결핍을 부정하고 마냥 인내하기를 강요하는 무책임한 위로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포스터에 적힌 “아픈 만큼 큰다.”, “상처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따위의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통의 시간을 이미 지나왔거나, 심지어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당장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사람에게 섣부른 위로와 훈계는 폭력이다. 영재가 믿는 신은 왜 그에게 어른 같은 어른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영화 중후반부에 신부님의 소개로 대학생 윤미가 영재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게 된다. 처음으로 영재에게 아픔을 먼저 겪은 어른으로써의 따뜻함을 보여준다. 자신이 열심히 산다고 성당에 좋게 말해달라는 영재에게 윤미는 “선생님은 네가 네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 영재가 정말로 말하는 것처럼 살았으면 좋겠어.”라며 무책임한 위로가 아닌 진심을 보여준다. 윤미 역시 어렵게 공부했지만 ‘내가 겪어봐서 다 안다’는 식의 꼰대짓도 하지 않는다. 윤미는 영재에게 라면도 아닌, 눈칫밥도 아닌, 자신의 어머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인다. 하지만 영재가 다른 시설로 쫓겨나면서 윤미의 진심에 응답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데?”


영재의 세례명인 ‘요한’은 흔히 사도 요한을 일컫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요한만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예수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로서, 그 스스로도 자신을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 칭하였다. 영재는 물건을 훔치고 말로 친구를 해하는 죄를 짓는다. 그렇지만 사실 죄라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훨씬 많이 지었다. 영재의 죄는 어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정당방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성장영화가 아니라 일종의 재난영화’라고 평한다. 성장영화는 보통 인물이 성장하면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괴물> 또한 재난영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재난영화의 클리셰는 재난이 닥칠 것을 미리 암시하는 여러 전조들이 있지만 번번이 무시당하는 전개이다. 결국 수많은 생명이 희생당하고, 모든 일상이 무너진다. 영재는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성장했는가? 영화를 어떻게 봐도 영재가 성장했다는 결론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몰아치는 풍파에 산산이 부서졌는가? 결국 범태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눈물 짓고, 동생 민재에게는 용돈을 쥐어주는 형이다. 따라서 이 쪽 또한 알 수 없다. 영재가 믿는 하느님이 그를 과연 구원해줄지 모른다. 사실 김태용 감독이 윤미 모의 입을 빌려 십자가가 먹고 사는 데 무슨 도움을 주냐고 말한 걸로 미루어 보아, <거인>의 세계에서 구원은 오로지 영재의 몫이다. 또한 감독이 영재의 속마음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은 채 우리의 판단에 맡겼듯이, 영재의 구원에 대한 결론 또한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실제로 겪었던 세상의 무책임과 신의 무정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 밤엔 왠지 모를 심란한 바람이 분다.


+ 연기 ‘영재’, 최우식


김태용 감독은 <거인> 시나리오를 쓸 때, 최우식의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고 한다. 김태용 감독은 최우식 순하게 생긴 얼굴임에도, 거칠고 비릿한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tvN 드라마 <호구의 사랑>의 강호구 역으로 처음 최우식의 연기에 빠졌다. 호구 같았지만, 단 한 사람을 향하는 애틋한 그의 마음이 너무 예쁜 나머지, 역할을 맡은 최우식에게 빠져버렸다. 그 이후로 그가 맡은 역의 비중과 관계없이, 영화, 드라마, 단막극, 예능까지 모두 섭렵했다. 최근에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 <마녀>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마녀>를 보았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부산행>과 같이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에도 출연했지만 그의 매력을 120% 볼 수 있는 작품은 여전히 <거인>이다. 영재와 요한을 오가는 섬세하고도 치밀한 눈빛. 아주 가끔 볼 수 있는 아이 같이 티 없는 그의 웃음. 누구보다 처절하고도 비굴하게 애원하는 그의 목소리의 울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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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거인>의 줄거리는 김태용 감독의 유년시절을 닮은 자전적인 이야기인데, 그는 영재로 분한 최우식의 연기에 상처를 치유 받았다고 전한다. 겪어보지 않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한다니. 나 또한 그의 연기에 위로 받았고, 그의 영재성에 감탄했다. 아직도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의 비릿한 눈빛을 보기 위해 인상 깊었던 장면을 돌려보곤 한다. 이 영화를 계기로 더욱 팬이 되었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의 연기를 보고 싶다.
 



[최희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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