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옛 이야기가 주는 것 -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8.13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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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는 훌훌 털고


우두머리 건달과 신출내기 의사의 사랑 이야기라.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진부하고 식상한 인물 설정이다. 그렇다고 극 전체가 옛 시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다시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극을 수선하고 정비하며 준비를 꽤 단단히 한 것 같다. 오래된 작품의 감성과 감각은 유지하고, 2018년에도 불편하지 않을 혁신을 꾀하면서 말이다.

<돌아서서 떠나라>는 '조폭'이라는 소재가 여러 미디어에서 유행처럼 다뤄지던 시기에 탄생했다. 문화는 시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조폭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자칫 범죄를 미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자 주인공 '공상두'의 직업을 바꿔버릴 수도 없는 노릇. 제작진은 그 어떤 감정보다 '공상두'의 죄책감을 선명히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시대에 맞게 고쳐진 부분도 있지만,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옛 희곡 그대로다.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와 말투, 사건 중심이 아닌 대화 중심의 진행 …. 수선되지 않은 것들이 정겹고도 애틋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꼭 그 시절 그때처럼. 두 사람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그것들이 마치 내 추억 인양 가까이 다가온다. 어쩌면 희주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네 느낌이 내게 전달돼 와.
나 또한 너한테 그럴 거고.
넌 안 그러니?




진정한 사랑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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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음악과 빗소리가 잦아들면, 극의 시작을 알리는 조명이 켜진다. 조명 아래 서있는 죄수복 차림의 '공상두'와 수녀복 차림의 '채희주'. 빳빳한 양복과 의사복이 잘 어울리는 둘에게는 상당히 어색한 복장이다. 결말을 향해 긴장감 넘치는 속도로 진행되는 다른 극들과 달리, <돌아서서 떠나라>는 관객들에게 결말을 먼저 알려주고 시작된다. 건달이고 의사였던 그들이 마침내, 그리고 결국에는, 사형수와 수녀로 재회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전하며 극은 다시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공상두'가 자수를 하러 가기 전, 둘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관객들은 둘의 미래를 알고, '공상두'도 그와 비슷한 미래를 그린다. 말은 안 했지만 아마 '채희주'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긴 이별을 앞두고 할 이야기가 참 많을 텐데,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둘은 종일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다. 마지막 몇 분만 빼면 순 엉터리인 대화다. 첫 만남부터 처음 말을 놓던 순간,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햇볕 아래 놓인 사금파리처럼 그들의 일상은 투명하게 반짝였다.


마음을 다잡을 겸 부산에 갔다.
영해 언니와 막걸리를 마시다가 사발을 바닥에 떨어뜨렸어.
이게 깨지면서 언니 발등에 얇은 사금파리가 꽂혔어. 피가 줄줄 흘러.
그런데도 햇빛에 사금파리가 반짝반짝.
내가 뽑으려고 하는데 언니가 '냅두거레. 보석 안 같나?'
보름쯤 지났을 거야. 엄기탁이가 병원으로 날 찾아왔어.
'오늘이 형 생일입니다. 가시죠.'
너의 첫 데이트 신청이지. 차에 올라타면서 그 사금파리 생각이 났다.
가면 앞으로 가슴 아플 날이 많을 것 같은데. 무슨 암시였나 봐.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공상두'가 입을 연 것이다. '채희주'는 노발대발 화를 냈다. 아버지, 그리고 영해 언니에 이어 이제 '공상두'까지 잃게 되다니. 온 힘을 다해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둘만의 조촐한 결혼식을 마치고 둘은 길고 긴 이별을 맞는다. 그들 모두 언젠가는 이와 같은 순간이 올 거라 짐작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준비하고 대비했다. 하지만 그 어떤 다짐도 이별과 죽음 앞에선 힘을 잃고 말았다.

그들의 사랑은 '따뜻한 아날로그식'의 사랑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상대를 기다리고, 바보 같은 희생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오래된 작품만이 가지는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이다. 시대는 변했고 지나친 답습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사랑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다. 요즘 이야기에서는 찾기 힘든 진정한 사랑의 가치에 대해.


힘들 때 아무에게나 꼭 안아달라고 해
가만히 눈을 감고 그게 나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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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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