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소설 성 [도서]

글 입력 2018.08.14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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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필 ‘나’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그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어떻게 ‘나’로 만들어졌을까? 한때는 스스로가 너무도 신기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달이 지구 주변을 돌고 지구가 태양 근처를 돌듯 나에게는 필연적으로 주어진 길이 있고 그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빠르든 늦든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는 때가 오게 된다. 죽음의 존재를 살갗으로 맞닥뜨리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저 타자화하기에 바빴던 이 세상의 널부러진 시체들, 그 중 하나가 내가 아닐 수 있었음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는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왔던 순간이 있었다. 모든 생기 잃은 눈동자들은 다들 각자의 역사와 운명을 가지고 있던 소우주였음을 깨닫는 순간, 운명처럼 느껴졌던 일들은 그저 우연에 불과함을 깨닫는 순간, 그토록 대단하고 신비했던 나 자신은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버렸다.

나는 무엇일까? 먹고 말하고 생각하는 이 휴지조각의 정체를 고민하는 동안 읽은 책이 바로 카프카의 소설 < 성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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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 - 1924)


카프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 지문으로 실렸던 그의 단편 < 변신 >이나 특이한 모양의 귀, 당시 문인답게 폐결핵으로 맞이한 그의 최후 정도에 불과했다. 더욱이 < 성 >이라는 작품은 그의 말년에 미완으로 남은 소설이다. 그만큼 난해하고 종잡을 수 없다는 평이 있음에도, 카프카라는 이름 석 자가 갖는 무게 때문인지 어딘가 홀린 듯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소설 < 성 >은 K라는 인물이 외딴 마을의 중심에 있는 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 주인공 K는 토지 측량사로서 마을에 방문한 것으로 서술되지만, 사실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토지 측량사라는 직업 또한 ‘성’과 그가 맺은 일종의 약속에 불과하고, 그는 실제로 소설 속에서 토지 측량사의 업무를 하지도 않거니와 토지 측량에 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작가는 실제로 K가 누구인지, 마을이 어디인지, 성은 어디에 있고 누가 거주하고 있는지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모호하게 베일을 드리운다. 마을을 통제하는 성의 규칙이나 법도 확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K를 통해 독자들이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들마저도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아니 우리가 만난 게 그들인지조차 애매한 문제로 남고, 각 인물들은 그들이 맺는 관계의 양상에 따라 외양까지도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저 평범한 주점 여급으로 묘사되던 프리다는 고위관리인 클람의 정부가 되자 점차 매력적이고 능력 있는 여인으로 분한다. K가 머무는 마을은 진정한 기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표만이 떠돌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작중에서는 K의 감정이나 심리, 느낌만을 호들갑스럽게 묘사하며 그 외의 나머지, 현실세계의 우리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인상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 K가 성으로 가는 길을 얻어내고자 분투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가장 핵심에 있는, ‘성’을 향한 그의 열망을 독자에게 납득시킬만한 서술이 없기 때문에, 성으로 가기 위해 그가 여러 사람들과 엮어내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와 대화들은 마치 그저 한 겹 한 겹 쌓이는 눈송이같이 금방 녹아 사라질 듯 허무한 인상을 주며, 또한 작중의 계절적 배경이 겨울이기 때문에 자주 등장하는 눈 덮인 풍경은 이 같은 인상을 시각적으로 더욱 와 닿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조차 모르며, 다만 K와 함께 그의 감정만을 온전히 느끼면서 안개 속을 헤치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것은 꼭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모양과 비슷하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닌지도 모르고, 만났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내 기억과 완전히 다른 모양의 사람이었을 수 있다. 우리가 목숨처럼 지키는 공동체의 법률은 다른 공동체로 넘어가는 순간 의미 없는 휴지조각이 되기도 한다. K를 따라가며 독자들은 모호한 인물과 장소, 사건의 나열에 혼란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기실 그가 헤매고 있는 마을이라는 공간은 우리 개개인이 나서 겪는 세상의 모습을 극대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주인공 K의 모험은 인류 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발자취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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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Paul Gauguin)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인류의 오랜 미스터리였지만, 카프카는 작품 속에서 이를 전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는 K의 정체도 목적도, 그가 왜 성으로 가고 싶어 하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그것들은 현실 세계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언제든 변할 수 있기에 외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K의 궁극적인 목표인 ‘성’ 그 자체도 다른 소설 속에서 흔히 묘사되는 종류의 외양이 아니며, 가까이 다가갔을 때와 멀리 떨어졌을 때 그 모습이 달리 보인다. 다시 말해 그의 목적 자체도 확실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오직 ‘성’에 다다르고자 하는 K의 사투이다.
 
마을이라는 낯선 곳에 도착해, K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방인이라는 눈총을 받고 골칫거리 취급을 받으면서도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하고 때론 갈등하며 성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 노력이 그를 성으로 데려다 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지쳐 쓰러질지언정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게 성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인가? 그것마저 작중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K는 그저 마을에 오게 ‘되었고’, 성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어떤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다면 그는 마을에 오지도, 성을 염원하지도 않았을 것처럼 K를 묘사한다. 작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K가 이방인이며, 성에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 뿐이다. 마을 사람인 프리다와의 결혼을 통해서도 그는 마을에 소속되지 못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끊임없이 갈등하며 이방인이라는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야 마는데, 이는 모두 K가 성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최우선으로 두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가 마을을 지배하는 수직적 권력 구조에 동참하거나 순응했더라면, 그의 정체성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K는 운명으로 비견되는, 가히 신적인 권력에 저항하며 기꺼이 이방인이 된다. 이쯤에서, 그의 직업으로 제시되는 토지 측량사라는 역할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토지란 자연 그 자체,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 품어주는 어머니 신(mother earth)이다. 그리고 측량이란 기기를 써서 사물의 쓰임을 숫자로 나타내는 일이다. 즉 토지 측량이란 우리 인간에게 하사된 자연이라는 신적인 권능, 어머니 신의 일부를 숫자라는 기호로 재단하고 해체하면서 인간 세계로 끌어내리는, 혹은 그에 도전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에 의해 마을에 도착하게 되어, 그곳을 지배하는 힘에 맞서는 K의 모습은 신, 혹은 운명 따위에 대항하는 인간의 강한 의지와 같이 보인다. 이를 통해, 기의 없이 부유하는 수많은 기표들 사이에서 K라는 기표는 ‘성을 염원하는 사람’이라는 한 가지 기의를 갖는다.
 
이 같은 시점으로 그의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나를 나 자신으로 만드는 것은 우연이나 운명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중에서의 성은 개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그들만의 욕망이나 꿈, 목표 등을 대변한다. K가 성을 왜 욕망하는지, 성의 외양이 정확히 어떠한지, 그 안에는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등등 성에 대하여 독자들이 판단을 내릴만한 서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사실 온전히 개개인의 산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짚어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를 배우는 유아 단계를 전후하여 이미 사회의 기준에 맞춰 자신의 욕망을 재단한다고 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의 허용과 사회적 가치판단, 나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 처지 등에 의하여 복잡다단하게 결정된다. 다시 말해, 우리들이 좇아가는 ‘성’이란 사실 그저 우연히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이다. 그러니 성이 어떤 곳인지, K가 왜 성을 욕망하는지와 같은 질문은 쓸모가 없다. 그 길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그 주변으로 펼쳐진 다른 길을 갈 것이냐? 오직 그 길을 따르는 우리의 움직임만이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순간의 움직임을 통해 나는 ‘나’라는 사람으로서 재탄생한다. ‘나’라는 개인의 특수성은 스쳐지나가는 시간 속의 나의 선택과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건너, ‘나’라고 믿어지는 길을 따라 애써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이다.
 
앞서 말했듯, 소설 < 성 >은 기의 없이 수많은 기표로만 존재한다.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매우 다양하지만, 필자는 읽으면서도 특히 이소라의 track 9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었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 살게 해.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낯선 마을에 도착해,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없는 인파 속에서 평생을 흘러간다. 허울뿐일지 모를 자신의 성을 따라가면서. 인생의 끝자락에서, 카프카는 이 소설을 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K는 성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나는, 나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 길을 잃어버린 것 같던 요 몇 달, 카프카의 소설 < 성 >은 미완으로 남아 오히려 의미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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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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