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이야기] 엄마는 행복할 수 있을까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
글 입력 2018.08.1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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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이야기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공포영화가 흥하는 날씨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종류의 공포가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친근하고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아주 다를 때 공포를 느끼곤 한다. 예를 들면 가족은 행복하고, 이웃은 정겹다는 믿음이 깨질 때처럼.

'이야기의 이야기' 첫번째 신간 리뷰는 구병모 작가의 <네 이웃의 식탁>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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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산과 강교원, 신재강과 홍단희, 손상낙과 임효내. 세 쌍의 부부가 있다. 이들이 사는 주택 뒤뜰에는 크고 화려한 식탁이 하나 있다. 가족조차 식탁에 다같이 둘러앉을 시간이 드문 요즘 같은 세상에 그림 작업을 하느라 밤을 새운 효내를 제외한 다섯 사람이 새로 이사오는 전은오, 서요진 부부를 환영하기 위해 식탁에 둘러 앉았다. 이들 모두가 아이를 한 명 이상씩 끼고 있는 까닭은 안정적인 출생률이 유지되는 이상사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 '꿈미래실험 공동주택'이기 때문이다. 이 주택은 소설 속에서 낮은 출생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정부의 정책 중 하나로, 자연 경관이 좋은 근교에 지어진 데다가 비슷한 다른 집보다 훨씬 더 전세가가 저렴해 입주자 선발 경쟁이 치열했다. 물론 '만 42세 미만으로 한국 국적을 지녔으며 자녀가 1인 이상 있는 이성 부부'라는 조건과 둘 중 한 사람만 직장에 다니는 부부와 자녀를 2인 이상 둔 부부를 우대하는 식으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고, 무엇보다도 입주시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자필 서약서를 써야 했다. 네 부부는 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주자로 선발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잘 하면 행복한 전원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비슷해 보이는 네 부부의 사연은 제각각이다. 같은 식탁에 둘러앉았지만 성격도, 하는 일도 다른 네 이웃의 공동생활이 아슬아슬하게 시작된다.



'공동체'라는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초등학생 때부터 도덕, 사회교과서에서 현대사회의 문제점으로 '핵가족화와 도시화로 인한 인간소외' 같은 걸 봐 온 탓일까.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은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예전부터 자리잡고 있는 막연한 이상향이다. 특히 육아와 같은 돌봄노동을 말할 때 지역사회나 이웃의 중요성은 늘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어 왔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면서 체세포의 수를 착실히 불리는 거야말로 어린이의 일이었다. 그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일은, 주로 시간을 견디는 데 있었다. 시간을 견디어서 흘려보내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일. 그곳에 펼쳐진 백면에 어린이가 또다시 새로운 형태 모를 선을 긋고 예기치 못한 색을 칠하도록 독려하기. 그러는 동안 자신의 존재는 날마다 조금씩 밑그림으로 위치 지어지고 끝내는 지우개로 지워지더라도.

87쪽


그러니 네 부부로 이루어진 이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가장 먼저 하기 시작한 게 공동육아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동육아의 방식을 이렇다. 아이들이 했으면 하는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기획하고, 예산을 책정해서 각 집마다 회비를 모아 낮 시간에 집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내내 함께 돌본다. 주택의 위치상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유아 교육기관을 찾기 힘든 상황에서 이러한 공동육아는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공동체에서 개인은 지워지기 쉽상이다. 관심은 오지랖으로 변모한다. 처음 공동육아를 합의할 때 아이를 돌보게 될 당사자인 효내가 아닌 상낙의 동의를 받은 순간부터 이 공동체는 첫단추를 잘못 꿰었다. 가장 먼저 입주한 데다가 어린이집 근무 경력이 있어 이 공동육아를 이끄는 단희의 눈에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늘 피곤한 모습으로 늦게 등장하는 효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효내는 효내 나름대로 일과 육아 모두에 치이는 생활이 힘들다. 게다가 남 일에 관심이 많고 매사 적극적인 단희는 효내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의 이면에는 말못할 감정과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미소, 그리고 금방 증발할 마음에도 없는 미사여구가 쌓여 간다. <네 이웃의 식탁>속 공동육아가 이루어지는 모습은 돌봄노동을 사적인 영역에서 모두 부담하기에 한계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애와 개, 그리고 엄마



그림 작업을 하면서는 이 세상 어딘가에 젖병이나, 간 소고기랑 불린 쌀을 넣고 끓인 이유식이나, 그것을 숭고한 과업이라고 주입시키는 목소리들과, 플라스틱 폐기물이며 공공의 이익을 위한 회의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 어떤 장소가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하나의 작업에 일단 마침표를 부실하게나마 찍고 나면, 세상 그 어떤 소음과 음식물 찌꺼기 위에 드러누워서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59쪽


두 아이를 키운 경험에 비추어, 엄마란 자신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죄송합니다와 고맙습니다를 입에 달고 살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34쪽


효내와 단희 사이의 갈등 이면에는 더 구조적인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돌봄노동의 의무는 아빠와 엄마에게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장 많은 돌봄노동을 하는 건 역시 엄마다. 그렇게 정하고선 결혼하고 출산하는 게 아닌데도 육아의 상당부분은 자연스럽게 엄마 책임이 된다. 돌봄노동의 부담이 일방적으로 엄마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면 효내와 단희 사이에 있던 갈등의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네 쌍의 부부들 사이에서 돌봄노동을 부담하는 정도의 차이는 성별에 따라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공동체에서는 유례적으로 '누구 엄마', '누구 아빠'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기로 합의했음에도, 소설 속 네 명의 여성들은 각자의 이름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엄마'로서 존재한다. 소설 속에서 아이들을 신경쓰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대부분 엄마들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안하고는 큰 상관이 없다. 요진은 본인이 직장을 다니는데도 공동육아를 위해 밑반찬 만드는 일을 비롯해 육아와 관련된 온갖 자질구레한 일은 남편인 은오가 잘 챙기지 못한다는 이유로 본인 차지다. 게다가 똑같이 일을 하지 않지만 육아와 관련해 여성인 단희나 교원에게 기대되는 바와 남성인 은오에게 기대되는 정도는 다르다. 효내는 설상가상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육아와 일 모두를 부담한다. 힘들다고 얘기하면 일을 그만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소설이 과장된 게 아니다. 당장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기사나 이야기를 들을때, 우리는 엄마와 아빠 둘 중 어느 쪽을 떠올리는 게 더 익숙한가.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하죠. 남자를 사람으로 보지 마라. 일일이 시켜야만 알아먹는 짐승으로 봐라. 딱딱 손가락으로 가리켜라. 시키는 건 정말 잘한다. 정확한 인풋에 칼같은 아웃풋이 있다.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 걸 저도 인정한다니까요."

95쪽


같은 의무가 남성에게 주어질 때 많은 남성이 스스로를 '애 또는 개'라며 농담을 던지는 건 성인으로서 돌봄노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격하하며 돌봄노동의 대상이 되려는 꼴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원래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지 않을 수 있는 건 그들의 특권이다. 이러한 돌봄노동에서의 젠더불평등은 이제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요진과 은오의 딸, 시율에게도 이어진다. 누나라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게 당연시되고 '여자 아이답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는다는 칭찬을 받는 식이다. 출생률을 증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주택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왜 출생률이 저조한지 그 이유를 계속 확인하게 된다.



엄마는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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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인 줄 아니, 소리가 성대 끄트머리에 걸려 흔들리다 흐무러졌다. 그렇게 말하면 상낙은 보나마나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으면 그림을 관두는 게 최선이겠다고 본질과 무관한 결론을 내릴 터였다.

121쪽


'엄마는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세상의 모든 엄마가 불행하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한 개인이 부모가 되고자 할때 왜 어느 한쪽은 일과 가정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려야만 하는지 묻고 싶은 거다. 일을 하면 하는대로, 집에 있으면 있는대로 여성은 엄마라는 이름 하에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는 어른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부담을 언제까지 엄마만 감당해야 하는 건지 궁금하다. 단지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는 관습적인 이유로, 여자가 육아를 더 잘한다는 근거 없는 이유로 말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게 온전히 여성의 몫이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아이를 돌보는 게 당연시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 시대를 지나 이제 우리는 '돌봄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으로 취급되지도 않던 일에 '노동'이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사적 영역에 머무르던 육아를 공적 영역에서 논의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시대는 변했고 용어도 변했는데 언제까지 돌봄노동을 사적인 영역, 특히 '엄마'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여성에게 일임해야만 할는 걸까.

물론 세상에는 힘든 현실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일부의 사람들을 내세우며 모두가 행복해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현재 명확히 존재하는 문제를 덮어두려는 '꼼수'다. 이미 출생률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주거문제와 같은 경제적 문제 해결을 넘어서 가정 내 돌봄노동에 대한 문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세 명 이상 낳도록 노력하겠다는 자필 서명까지 받으며 공동주택 입주자를 받는 소설 속 정부의 정책은 소설의 가장 처음 등장한, 주택에 어울리지 않게 크고 화려한 핸드메이드 식탁만큼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시율이가 어른이 되어서 결혼을 하고 싶을 때,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을 때, 시율이는 행복할 수 있을까? 엄마이면서 '전시율'이라는 한 명의 개인을 지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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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네 이웃의 식탁>은 몇가지 희망적인 케이스만으로 외면할 수는 없는 현실의 문제를 작가 특유의 냉소적인 문체로 풀어내는 소설이다. 소설의 끝이 어떨지, 이 글은 스포 없는 리뷰이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 하지만 큰 반전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라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결말을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끝까지 읽고 나면 가족이라는 영역에서 개인의 희생은 어디까지가 마지노선인지, 이렇게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아이를 둘 이상 낳아 기르는 게 가능한지 반문하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환상적인 요소 하나 없이 현실을 빼 닮아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공포스럽다. 책을 덮으면 소설보다 더한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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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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