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해자의 조건. [문화 전반]

장기전이 될 뜨거운 감자
글 입력 2018.08.17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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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JTBC 뉴스룸 석에 앉은 김지은 전 수행비서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수차례 위력에 의한 간음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차기 대선후보로 꼽힐 정도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안 전 지사의 위선은 전 국민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Me too운동의 열풍에 탄력을 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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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5개월 후인 8월 14일. 안 전 지사에게 적용되었던 10개의 혐의는 모두 무죄 처분을 받았다.

 
 
왜 무죄인가


판결의 요지는 이것이다.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 상황에서 피해자의 심리상태가 어땠는지를 떠나 
피고인이 적어도 어떤 위력을 행사했다거나 하는 정황은 없다."

- 재판부 판결문 中 -
 

안 전 지사에게 적용된 죄목은 폭행이나 협박에 의한 ‘성폭행’이 아닌,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이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란 업무라던가 고용, 관리감독 등의 이해로 인해 얽힌 다소 수직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간음죄를 일컫는다.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적용이 된다. 첫째, 가해자의 영향력이 너무 비대해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인정되는 경우. 두 번째, 미성년자 혹은 장애인 등과 같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만큼의 여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안 전 지사에게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안 전 지사가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은 맞다. 하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김 전 정무비서는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스스로 나서서’ 안 전 지사를 위하는 행동을 했다. 둘째, 김 전 정무비서는 ‘공무원을 포기하고 무보수로 자원봉사를 할 정도로 주체적이며, 학력 좋고 결혼 경험까지 있는’ 성인 여성이다. 이런 당찬 여성이 어찌 그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겠느냐, 고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성관계다, 라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안 전 지사 측은 김 전 수행비서가 ‘피해자답지 않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피해자답지 않게’ 너무나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해왔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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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김 전 비서가 처음 간음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지난해 7월의 러시아. 김씨는 사건이 발생한 바로 다음 날 아침,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집을 ‘직접’ 찾아 그와 함께 식사를 하며 수행비서로서의 업무를 톡톡히 해낸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번 년도 2월. 당시는 #Me too 논란이 상당히 가열된 시기이기에 김 씨에게도 역시 Me too에 대한 인식이 박혀있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는 텔레그램의 대화 내용을 직접 삭제하기까지 한다. 그 외에도 “내 사장은 내가 지킨다.”라는 식으로 안 전 지사에 대한 존경이 담긴 글을 지인들에게 자주 보낸다거나, 늦은 저녁 ‘씻고 오라’는 안 전 지사의 요구에 순순히 응한 점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모든 행위에 ‘자의로’ 임한 김 전 비서에게서는 피해자의 심적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던지고 싶은 의문은 두 가지이다.
 
 
 
1. 피해자다움이란?

 
응당 성폭행 피해자라면 가해자를 피하고 싶어 할 텐데, 김 전 비서는 사건 후에도 여전히 안 전 지사의 주변에서 그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정리하자면 폭력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업을 잘 완수해냈기 때문에 김씨를 심적 고통을 지닌 피해자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피해자의 입장을 반영하지 못한 주장인지 내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나는 고등학생 때 사람 붐비는 버스 안에서 성희롱을 당했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소름 돋도록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있다. 하여 나는 아직도 붐비는 대중교통 안에서 뒷목에 누군가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그 때가 생각나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일을 당한 후 좌절하거나 스러졌느냐고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일을 당한 다음 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학교생활 했다. 이유는, 내가 그만큼 아프고 힘들지 않아서가 전혀, 절대 아니라, 내 엉덩이에 생판 처음 보는 남자의 성기가 비벼졌다고 해도 소중한 내 인생은 지속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구역질나도 어쨌든 나는 내 인생을 나름 괜찮게 굴려나가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그저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상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학업과 일상까지 내팽개친 채 두 팔 걷어붙이고 찾아 나서지 못할 거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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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예측해보건대, 김지은 전 수행비서 역시 이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안 전 지사는 김 전 비서의 생사여탈권, 즉 ‘해고할 권리’를 지닌 인물이었다. 저항 혹은 폭로가 안정적인 공무원 일까지 등져가며 얻어낸 김 씨의 수행비서 업무까지 한순간에 증발시켜버릴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 전 지사 측의 주장대로 고학력의 주체적인, 즉 삶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하고 야망까지 있을 가능성이 높은 여성이, 힘겹게 얻어낸 인생의 성취들을 내던질 각오를 하는 것은 당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답지 않게 주체적으로 본업을 수행하려고 했다는 이유를 들어 안 전 지사의 손을 들어준 재판부. 그들은 피해자에게도 역시, 개인의 차이에 따라 본인의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은 강한 욕심이 있을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듯하다. 과연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피해자의 입장에 단 한 번이라도 공감해본 적이 있을까. 대한민국의 피해자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려는 의지마저도 죄가 되는 모양이다.
 

성폭력 가해자가 지인인 경우 피해자가 소리 지르고, 저항하고, 뺨을 때리고,
신고하는 등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생각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면서도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을 혼란스러워한다.

-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

 
 
 
2. 정말 위력이 없었을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르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분명 그 존재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재판부 역시 그가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음은 인정했다. 다만 그 위력을 성관계에 행사했다는 정황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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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고발 프로그램 추적 60분이 안 전 지사와 김 전 정무비서의 관계를 집중 분석하면서, 안 전 지사가 가진 조용한 힘의 무게가 보기보다 더욱 무거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씨가 업무를 인수인계 받으며 남긴 필기에는 ‘병장을 웃기는 이등병의 마음’이라고 꼼꼼하게 기재되어 있으며, ‘지사님 기분’이라는 부분에는 별표까지 두 개 그려져 있다. 수행비서의 역할이 단순 업무 보조를 넘어 도지사의 기분을 챙기는 데까지 닿아있었다는 의미다. 또한 안희정 전 도지사는 메시지로 ‘맥주’, ‘담배’ 등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심부름을 단답으로 주문했으며, 김 전 비서는 이에 신속하게 대답한다. 빠른 응답을 위해 김 전 정무비서는 심지어 목욕을 할 때조차 핸드폰을 비닐봉지에 넣어 휴대하라고까지 교육받았다.
 
묻자. 정말 위력이 없어 보이는가? 이런 분위기가 지배적인 상황이라면 ‘나랑 안하면 너 자를거야!!’ 식의 대놓은 협박은 오히려 유치해 보일 지경이며,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전반적인 정황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흔적이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재판부의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에 의문이 든다. 상황을 미루어본다면, 안희정 전 도지사의 위력은 굳이 행사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사되는 조용한 압박감을 지녔을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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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내가 재판부의 판결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지은 전 정무비서의 입장을 완벽하게 지지하는 것 역시 아니다. 아무리 수행비서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하고 싶었어도 김씨가 지인에게 보낸 문자 중 안희정 전 도지사를 거의 찬양하듯 쓴 부분들을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하여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다.'

검찰 측에서 항소를 신청했다는 점, 여러 전문가가 판결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봤을 때 아직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아직 아무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익명성 뒤에 숨어 김 전 수행비서를 향해 '꽃뱀' 등과 같은 섣부른 비방을 던지는 것은 분명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사건의 명확한 맥락조차 알지 못하고 일단 밀어 붙이는 초등학생 식 몰아가기, 딱 그 정도랄까. 사건의 모든 면모가 명명백백하게 파헤쳐질 때까지는 성급한 단언을 유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불미스러운 사건을 우리의 후대에게 좀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계기로서 기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한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재판부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국민이 필요함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대중이 이 사건에 좀 더 오래도록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누구의 잘못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게 만드는 공정함이 제발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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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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