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아노가 가르쳐준 것들 [도서]

글 입력 2018.08.17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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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매일 피아노를 칩니다
김여진 지음
 

어느 날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곤 바로 캡쳐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모아놓은 갤러리의 한 공간에 이 책을 넣어두었다. 사실 오랜만의 추가라 기분이 살짝 좋았다. 다음날, 햇볕이 너무 뜨거운 덕에 서점으로 피신을 갔고 갤러리에 먼저 자리 잡은 책들이 몇 권 있었음에도 나는 별 고민 없이 내가 어제 찾은 책을 찾아다녔다.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매일 피아노를 칩니다’, 이 책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다분하다. 우선 나는 피아노가 너무 좋다. 사람마다 각자의 심금을 울리는 악기가 따로 있는데 내 경우에는 피아노다. 같은 음악이라도 다른 악기로 연주할 때보다 피아노로 연주할 때, 좀 더 확 와 닿는 그런 게 있다. 하지만 동시에 피아노에 대해 무지하기에 피아노에 관련된 것이라면 순수하고도 왕성한 호기심이 생긴다. 제목 또한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매일 피아노를 치는 내용일거라고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매일 피아노를 치는 행위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지 매우 궁금해지는 그런 제목이었다. 갤러리에 담긴지 최단 시간 만에 찾아 읽은 책이자 오랜만에 두 번 읽게 된, 김여진 님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가득 담긴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들과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인용한 문장의 시작과 끝에 *표를 붙이겠다.


 
템포 루바토


책은 ‘템포 루바토’의 어원과 정의에 대해 얘기하며 시작한다. ‘루바토’는 이탈리아어로 ‘도둑맞다’, ‘잃어버리다’를 뜻하며 ‘템포 루바토’에선 주어진 박자 안에서, 또 화음이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연주자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리듬을 조절해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다. 글쓴이는 이를 설명하며 자기 인생의 템포 루바토가 피아노를 다시 열심히 치게 된 이 시기라고 말한다.

이쯤 돼서 글쓴이가 피아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쓸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은 인용은 하고 싶지 않지만, 다음 부분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들 중 하나이다.

*평일 오후 2시쯤, 합정역 근처 1층 카페에 앉아 책을 읽던 중이었다. 맞은편 건물 2층 실용 음악 학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피아노를 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짐을 챙겨 카페에서 나와 좁은 차로를 건넜다. “안녕하세요,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서 그러는데 혹시 한 시간만 치고 갈 수 있을까요?” *

학원 안 사무실에 계신 분은 악보까지 뽑아주시며 연습실 자리를 내어주었다고 한다. 글쓴이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를 받아 1시간 동안 피아노를 쳤으며 다음날 케이크로 사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 이야기에 이런 말을 덧붙인다.

*“미친 사람들은 미친 짓을 하니까.”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한 구절처럼. 피아노에 미쳐서.*
 
내가 아무리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참기 힘든 강렬한 욕구에 휩싸였다고 해도 저런 부탁을 할 수 있을까? 다음 부분 또한 글쓴이가 피아노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들 중 하나이다.
 
*밤 11시,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임동혁 데뷔앨범에 수록된 쇼팽 발라드 1번이 코다(종결부)를 향해가고 있었다. 미간에 금이 간다. 마음이 구겨지는 중이라는 신호다. 실제 연주도 아닌데 나는 곡을 끊지 못한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러나 정말 임동혁 피아니스트의 쇼팽 발라드 1번은 정말 한번 들으면 그 굽이치는 결을 강제로 끊지 못하겠다. 방금 나도 모르게 ‘정말’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썼을 정도다. 인력을 무력하게 하는 힘이 느껴지는 곡. 현관문 앞에 서서 그가 연주한 음악을 끝까지 다 듣는다. 클래식에 깊은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닌 나에게 음악적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연주. 피로마저 잠시 숨을 죽인다.*
 
곡을 차마 중간에 끊지 못해 현관문 앞에서 끝나기를 기다린다니. 주변에 음악을 전공하는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아니, 전공자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음악을 존중할 수 있을까.

또한 글쓴이는 연습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여 하루에 최소한 한두 시간은 연습했다고 한다. 한번은 4시간 반을 연습하고 나오자 학원에 있던 선생님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전공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글쓴이는 이렇게 답한다.

*“에이, 저는 직업이 아니라서 이렇게 하는 건지도 몰라요. 취미잖아요.” 좋은 기운을 받고 악보는 잔뜩 소중하게 끌어안고서 한다는 대답이 초라했다. 이제야 여기에 진심을 담아 다시 대답한다. “직업이 아니라서 이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게 아니라요. 예의를 갖추는 중인지도 모르겠어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고 싶으니까. 말로만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거죠. 나는 음악가들을 이만큼 좋아하고 존경해요.” 이렇게.*


 
본업과 취미


글쓴이가 진심을 담기 전의 대답을 읽고, 난 우선 그것에 동의했다. 피아노가 직업이라면,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시간을 피아노에 쏟았을 것이고 다른 계획이 생기지 않는 이상 계속 피아노를 쳐야 할 것이다. 또 눈에 무형과 유형의 성과를 어느 정도 내야만 하고, 그걸 위해 노력해야하는 과정이 부담스럽고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인 대답에 대해서는, 음악가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음악가가 직업이 아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통상적으로 취미생활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이고 본업은 먹고 살고 취미생활을 하기 위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뜻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본업과 취미를 분리하는 이러한 기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글쓴이가 가진 피아노에 대한 애정은 피아노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 맞먹음이 틀림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은 부업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나?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다녀야 할 모든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제일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는데, 이걸 찾았다면 이걸 본업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내가 만약 취미생활에 대한 열정이 그 취미를 본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열정만큼 클 때, 난 그걸 취미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일은 마음속에서라도 본업으로 두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딘가 인생과 닮은 듯, 안 닮은 듯


*빈틈없이 체계적이면서도 반드시 여지를 남겨두는 음악.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곡에는 각자의 의미가 생겨난다. 작곡가가 딱히 숨긴 적 없어도 의미는 가려져 있다. 연주자는 의미를 찾아간다. 가려진 부분을 털어낸다. 그렇게 천 명의 연주자가 있으면 천 가지의 해석이 태어난다.*
 
사람마다 음악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음악 속에 가려진 부분을 털어내는 것이라고 말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이 말이 피아노 뿐 아니라 모든 악기, 나아가 예술 분야에서 다 통하는 말이라고 믿고 있다. 의미가 숨겨져 있고, 같은 연주를 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점에서 감히 인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피아노는 거의 반드시 노력에 대응하는 결과를 준다.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배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왼손 따로, 오른손 따로, 그리고 함께. 피아노 치는 것을 인내심 기르는 훈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몇 번 연습해야하는지, 어느 부분에서 더 자주 틀리는지는 다르지만 수십 번, 수백 번의 연습 끝에 피아노는 선물처럼 결과를 준다. 다만 인생에선 노력이 노력으로만 남을 뿐 결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 다르겠다.
 
*“여기 피아니시모 표시가 있는 부분이 있죠? 교과서에서 배웠을 때처럼 막연히 ‘매우 여리게’라고 생각하지 말구요, 엄청 마른 남자가 조심스럽게 걷는 느낌으로 쳐볼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갑자기 설명을 뚝 멈추고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정답은 없어요.”
‘그런데’ 정답이 없다는 말은 ‘원래’ 정답이 없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이론은 있지만 표현에 정답은 없다. 규칙이 있지만 해석에 정답은 없다.
좋은 방향은 있지만 그곳에 정답은 없다.
네 해석이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정답은 없다.
자신의 답을 찾아갈 뿐이지, 정답을 원하는 건 아니라는 말처럼.*
 
앞에 선생님이 비유적으로 피아니시모를 표현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보면 이것이 피아노에 대한 얘기라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피아노는 인생을 함축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비유적인 가르침


선생님께서 피아니시모를 엄청 마른 남자가 조심스럽게 걷는 느낌이라고 설명한 것 같이 추상적으로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게 표현한 부분이 두 군데 더 나온다.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니 이 설명들이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여유롭게, 우아하게, 장엄하게’라는 언어를 이해하려는 머릿속의 복잡한 움직임을 지우고 확실하게 그려지는 그림 한 장 같은 설명이다.
 
*“사라반드는 3박자의 느린 춤곡이에요. 호흡을 더 길게 가져도 돼요. 여유롭게 그리고 우아하지만 장엄하게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는 느낌이에요. 그렇게 시작할게요.”*
 
미처 받아 적지는 못했지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걸어가는 이 여성은 마음속으로는 주저앉고 있는 느낌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첫 음표에 악센트가 나와 있지만 이건 단순히 세게 치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테누토(음의 길이를 충분히 유지하는 것)에 가까운 느낌으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건반에 똑 떨어진 느낌이에요.”*


 
힐링과 각성


다시 서론에서 등장했던 템포 루바토 얘기를 하고 싶다. 처음 읽을 때는 템포 루바토라는 게 있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두 번째에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느낌이 확 왔다. 인생은 하나의 악보처럼 시작과 끝이 정해져있고 그 속에 템포 루바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있어도 모른 체하고 원래 박자대로, 곡의 흐름상 있을 법한 음들로 채우며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인생 속에 이왕이면 템포 루바토가 최대한 많았으면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내 악보를 작곡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내 악보에 템포 루바토를 더 많이 그려 넣으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힐링과 각성을 동시에 선사해준다. ‘사회적인 시선에 얽매이지 마’,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 이런 말들을 하는 책들은 많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행동과 생각을 보여주는 책은 드물다. “미친 사람들은 미친 짓을 하니까” 이 말을 나도 앞으로 사용해볼 수 있는 상황이 왔으면 좋겠다.


[강혜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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