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듣도 보도 못했던 춘향을 만나다 [공연]

글 입력 2018.08.1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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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춘향>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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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관습을 뒤집는 연출



"마음에 든다. 안해봐도 알아."
"어떻게?" 
"그놈이 그놈이야."

"어쩜 저렇게 예쁠 수가.
아니 어쩜 저렇게 예쁘고 예쁘고 또 예쁠 수가. 
끝났어. 내 인생은 끝이야."


인물들의 대사는 무언가 비현실적이다. 아주 짧고 간결하며, 종종 맥락이 없다. 구어체라기보다는 문어체 같기도 하다. 혹은 매우 '극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이라는 착각이 들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사를 주고 받으려 하는 일반 연극들과는 사뭇 다르다. 대신 어색하고, 툭툭 끊기고, 당황스럽게 한다.

<춘향>은 관객이 기대하는 어떠한 관습도 따르지 않는 것 같다. 초반에는 대사들을 열심히 머릿속으로 쫓아가다가 이게 별로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가 던지는 투박한 이미지, 그리고 어투와 표정과 몸짓에서 전해지는 '몸의 언어'가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느닷없이 춤을 추기도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이 표현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이 꽤 강렬하다. 간결하고 절제된 대사와 양식에도 불구하고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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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춘향>


<춘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의 이야기를 뼈대만 남기고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뼈대는 이렇다. 몽룡과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고, 변학도가 새로 부임한다. 춘향은 그의 수청을 거부한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몽룡이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춘향>에서 '춘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우선 그녀는 17세의 가녀리고 어여쁜 소녀가 아니다. 춘향 역을 맡은 배우는 중견에 가까워 보이는 배우로, 외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상상하던 춘향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정조'와는 거리가 멀다.

몽룡에게 "너, 잘 하냐?"고 묻고, 변학도에게 "나랑 자자"고 한다. '새로운 춘향'은 남성에게 간택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요구하는 존재다. 그녀는 당당하고 주체적이며, 끝까지 어느 누구의 요구에도 따르지 않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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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점은 몽룡이나 변학도와 같은 남성들 역시 정반대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몽룡은 총명하고 진실된 청년이라기보다는 아직 철이 덜 든 찌질한 도련님이다. 그가 춘향에게 거듭해서 "미안하다"고 할 때나 "~할까?"라고 조심스럽게 물으며 눈치를 볼 때, 고구마를 백개 먹은 것마냥 답답하다. 춘향도 그랬는지, 성숙미가 느껴지는 변학도에게 끌리게 된다. 변학도는 탐욕스러운 변태라기보단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춘향>은 인물 캐릭터에서부터 연출까지 관객의 예상을 보란듯이 뒤집으며 진행되는 연극이다. 80분 내내 속으로 "엥?"이 몇번이나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의아함과 당황스러움이 결코 불쾌했던 것은 아니다. 마냥 "재밌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춘향'이라는 익숙한 이름 아래 이토록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 극이 끝나고 나서도 여운이 남았다.

연극 초반에 시작됐던 물음표(?)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느낌표(!)가 되어 갔다. 결론은, 떼아뜨로 봄날의 연극을 또 보겠느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할 거라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과 경험을 느낄 수 있을 거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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