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 정주행 [도서]

글 입력 2018.08.1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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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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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과 ‘노트르담 드 파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드물 어도 영화나 애니메이션, 뮤지컬로는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세상사에 얽힌 인간들의 애환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울림을 준다. 나는 세계문학전집으로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에 입문한 이래로 원작을 각색한 다른 작품들도 꾸준히 찾아보았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사랑과 고뇌는 익숙한 주제이지만 명작은 볼 때마다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다 이번 7월에 ‘웃는 남자’라는 원작을 기반으로 새로운 뮤지컬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위고의 작품인 만큼 뮤지컬을 보기 전 책을 먼저 읽어보고 싶었다. 책은 상하로 나누어져 출간되었으며 출판사 열린책들 기준으로 거의 한 뼘에 가까운 두께이다. 최근 이정도 분량의 소설을 읽지 않다가 이것을 보니 서사의 양이 두려워졌다.

다 읽고 난 지금은 생각보다 읽을 만한 것 같지만, 혹시 이전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을 위해 정주행일지를 남겨본다.



01 예비 이야기


콤프라치코스가 그윈플레인의 삶을 파괴하고 우르수스는 그 삶을 새롭게 구성한다.


친절한 빅토르 위고는 독자들을 위해 우르수스와 콤프라치코스에 관한 이야기를 삽입한다. 21세기의 독자인 나는 이 형식이 어색한 나머지 따로 독립된 글처럼 여겨졌다. 정식 공연 전 긴장을 풀어주는 단막극처럼 말이다. 읽다보면 사실상 독립된 글은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배경 설명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이다.

자유로운 철학자이자 만능 엔터테이너 우르수스와 아이들을 거래하여 괴물로 만드는 콤프라치코스는 주인공 그윈플레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인사들이다.



02 가족을 얻다


버려진 그윈플레인과 데아, 늑대만이 이해자였던 우르수스가 서로를 만나다.


콤프라치코스에게 버려진 그윈플레인은 세상에 버려진 데아를 줍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를 줍는 토마스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윈플레인은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지탱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 어리고 가진 것 없고 얼어 죽기 직전이었다. 그와 데아의 시작은 연민이었고 이후 서로의 희망으로 함께 한다.

우르수스는 인간이 되지 말라는 말로 늑대, 호모와 함께 생활하는 기인이다. 서양식 걸쭉한 욕설과 투덜거림만 들으면 차가운 사람 같지만 말과 반대되는 행동이 웃음을 안겨준다. 창문이 깨지고 보잘 것 없는 저녁거리로 날을 보내야 하는 중에도 먹을 것은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을 거둔다.



03 궁정인물들

19세기 프랑스 문학이 다 이런 것인지, 인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데에 굉장히 많은 배경지식을 넣고 기나긴 인물 설명을 덧붙인다. 양은 많아도 생각보다 빨리 읽을 수 있지만 시간 없는 사람들에게는 21세기의 소개방식이 적합할 것 같다.

해쉬태그의 이름으로 주요 궁정인물을 소개한다.


#클랜찰리 경
피어(귀족), 공화주의자, 침묵, 유배, 오해, 고집

#데이비드 경(톰-짐-잭)
사생아, 피어, 멋쟁이, 신사, 용맹, 명랑함

#여공작 조시언
짐승, 여신, 오만함, 사생아, 멋쟁이, 아름다움, 타락, 육체

#여왕 앤
질투, 무능함

#바킬페드로
교활, 계산적, 배신, 야심, 애정결핍


읽으면 읽을수록 조시언에 대한 상반되는 묘사가 인상 깊다. 데이비드 경 역시 피어로서와 평민으로서 행동할 때 다른 행동양식을 보여주지만, 그녀에 비해 절제된 이미지이다. 그녀를 말할 때 빅토르 위고 스스로가 흔들리고 읽는 독자 역시 실체에 대해 아리송해진다.

그윈플레인뿐만 아니라 조시언을 만나는 누구라도 그녀의 카오스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순간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자가 조시언이 아닐까.



04 그린박스 공연단의 ‘정복된 카오스’

천형과도 같았던 그윈플레인의 얼굴과 우르수스의 재능이 만나 열린 공연 ‘정복된 카오스’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막간극인 만큼 이야기자체는 길지 않다. 어둠 속에서 짐승과 싸우는 인간은 그를 축복하는 여신의 도움으로 승리한다. 영웅서사와 같은 흐름 속에서 의외성은 단 하나, 그윈플레인의 웃음뿐이다.

“전대미문의 얼굴이 홀로 웃었다.”
“그의 용모 전체가 그 웃음으로 귀결되었다. 마치 수레바퀴의 모든 살이 바퀴통에 모이는 것과 같았다.”
“무자비한 폭소를 담은 지옥의 얼굴을, 그는 자신의 목으로 떠받치고 있었다. 그처럼 영원한 웃음이란 한 인간의 어깨가 감당하기에는 얼마나 벅찬 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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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 얼굴이 어떤 모양이기에 충격을 넘어 폭소를 불러일으키는 걸까. 찢긴 웃음 하나로 세상을 웃길 수 있을까.

책에서는 금지된 시술과 그 얼굴을 이렇게 묘사한다.


절단과 폐색과 동여매기에 능했던 그 비술로, 입을 찢고, 입술 테두리를 절개해 잇몸이 드러나게 하고, 귀를 당겨 늘어나게 하고, 연골을 제거하고, 눈썹과 볼을 흩어 놓고, 관골근(顴骨筋)을 확장시키고, 꿰맨 자국과 기타 상흔을 흐릿하게 지우고, 안면은 갈라진 상태로 유지하며, 그 상처 위로 다시 표피를 이끌어다 덮었을 것인 바, 그윈플레인이란 가면은, 그러한 강력하고 오묘한 조각 기술의 산물이었다.


영원히 벗을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그윈플레인에게 연극이란 삶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받은 시술의 고통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 흔적은 평생 함께 한다.



05 사랑하는 두 연인

"그들은 낙원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윈플레인은 데아를 숭배했다. 데아는 그윈플레인을 우상으로 삼았다."

눈이 먼 데아와 추한 그윈플레인은 서로가 부족했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낭만주의적인 색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가 이 장면이다. 영혼의 반쪽,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라는 환상을 외형적으로 내면적으로 완벽하게 채워주는 존재가 그윈플레인, 그리고 데아였다.

진실을 보고 싶으면 장님이 되라는 말처럼 데아는 보지 않았기에 그윈플레인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거친 머리카락에 손을 올리며 노래할 때마다 세상의 환희를 느끼는 그녀에게 사랑은 감촉이었을 것이다. 그윈플레인에게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기적이었을 것이다.

우르수스가 불을 지피며 이 사랑을 부채질 하는 장면을 읽으면 누구나 웃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부족함과 상대의 위대함이 장벽이 되어 더한 사랑으로 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언제나 행복하길.





스포일러 없이 ‘웃는 남자’를 다루기 위해 후반부의 내용은 적지 않았다. 부족함 많지만 행복한 세 사람과 한 늑대만으로 만족한다면 여기까지, 웃는 남자 상권까지만 읽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잔혹하게 보이는 그윈플레인의 삶은 자신의 얼굴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그의 자부심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배우라는 정체성에 균열이 가는 것은 하권부터이다. 직업이 흔들리고 얼굴이 무너지고, 마침내 삶 전체가 뒤흔들린다. 하권부터는 한숨이 많이 나올 예정이니 즐거운 날에 읽지는 말길.

결말을 보고 다시 돌아와서 읽은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문장으로 일지를 마친다.


“붕괴된 모든 곳에, 자연은 꽃이 다시 피어나고 다시 푸르러지도록 한다. 돌을 위해서는 담쟁이를, 인간을 위해서는 사랑을 준비해 놓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의 오묘한 관대함이다."



[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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