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같은 재료, 다른 레시피 [공연]

그리고, 더 맛있는 맛.
글 입력 2018.08.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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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작품 < 춘향 >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기존 작품의 Y축 대칭’이라고 말하겠다. 이 공연은 내가 기존에 알던 ‘춘향전’의 머리부터 발 끝 까지 모두를 정 반대로 뒤집은 작품이었다.
 
 
 
01.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춘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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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춘향전’ 속의 성춘향은 산책하던 명문가 도련님의 발을 묶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한다. 그 미모가 어찌나 대단한지 남원 전역에 춘향이를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더랬다. 하지만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춘향이는... 맞다. 통용되는 미의 기준에 들어맞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예쁘거나, 귀엽거나, 섹시하거나.’ 영화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적어도 이 셋 중 하나는 충족시켜주길 기대하는 확일화된 사회 속에서 떼아뜨르 봄날이 들어 올린 그들만의 뚝심인 셈이다.
 
그 뿐일까. 이 작품 속의 춘향이에게선 지고지순 열녀의 모습을 단 한 구석도 찾아볼 수가 없다. 생전 처음 만난 몽룡이에게 ‘너 (목적어 생략) 잘하냐?’고 물어보거나, 서울로 떠나기 직전 불쌍한 눈망울을 굴리며 ‘기다려줄래?’라고 묻는 몽룡이에게 ‘글쎄?’라는 냉담한 답을 내던진다. 성격 한 번 참으로 까다롭다. 근데, 그래서 통쾌하다.
 
뒷담을 한 번 해보자면, 솔직히 원래 알던 성춘향은 너무 답답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하나만을 믿고 자기 출세하겠다고 홀연히 떠나버린 남자를 기다린다? 아무런 기약도 없이? 그것도 온갖 고문까지 당해가면서? 두 남자를 동시에 홀려버릴 매력까지 지녔으면서? 지금으로 치면 미국학위 따러 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연락도 안 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남자친구의 출세를 위해 사채 끌어다 뒷바라지 하고 있는 김태희인 셈이다. 김태희가 너무 아깝다.
 
떼아뜨르 봄날의 < 춘향 >은 기존의 춘향에게서 ‘헌신’과 ‘수동’을 쏙 뺌으로써 관객에게 통쾌한 춘향이를 선물해준다. 멀리서 쭈뼛대고 있는 이몽룡을 먼저 부르는 적극성, 기다리겠다는 희생 가득한 약속 따위 하지 않는 이기심, 변사또에게 끌리는 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 솔직함 안에서 떼아뜨르 봄날의 춘향이는 더 이상 ‘남성들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판타지’가 아니다. 불안과 욕구, 이기심이 똘똘 뭉쳐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다.
 
 
 
02. 찌질한 몽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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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출두요~” 거렁뱅이 꼴을 하고 있던 몽룡이가 암행어사로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부분은 원작의 묘미 중 하나이다. 백마 탄 왕자님으로 변신한 이몽룡이 위기에 빠진 성춘향을 구해줄 때 그 시대의 여성들은 달달한 환상의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떼아뜨르 봄날의 시선에서 본다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서울로 올라가면서 늠름하게 이별을 고했던 이몽룡은 떼아뜨르 봄날이 창조한 판 위에 서자마자 엄마, 아빠에게 뒷목 잡혀 질질 끌려가는 초라한 몰골이 된다.

그 뿐일까. 결국 서울에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몽룡은 그나마 남아있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출세한 ‘척’ 해서 돌아온다. 그 ‘척’이라도 좀 능글맞게 잘 하면 좋으련만, 떼아뜨르 봄날은 그 모습마저도 마치 코흘리개 어린애가 슈퍼맨을 따라하듯 어쭙잖게 그려낸다.

 
 
03. 어른스러운 변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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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막 반전의 인물은, 원작에서 ‘변태 사이코 또라이’의 준말인가 싶을 정도의 악역으로 그려지는 변사또이다. 극 중 몽룡이가 마냥 챙겨줘야 하는 막내동생 같은 느낌이었다면, 변사또는 힘들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어른의 느낌이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변사또는 춘향의 ‘괴팍한’ 취향까지 모두 이해해준다. 원작에서는 춘향이 변사또에게 고문을 ‘받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극에서는 춘향이 고문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춘향의 성적 취향이...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다. 변사또를 사랑하게 된 춘향이 이러한 취향을 밝히며 자신을 오히려 고문해달라고 요구하자, 변사또는 잠시 당황하는 듯 하다가도 곧 춘향의 욕구에 따라준다. ‘변사또는 통통 튀는 춘향이를 품어낼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큰 사람이구나.’ 이 장면에서 나는 이런 류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둘째, 변사또는 자신의 심경의 변화를 차분하게 말로 설명해낼 줄 안다. 춘향이를 버리고 홀연히 떠날 때, 혹은 홀연히 돌아왔을 때 주구장창 ‘미안해...’를 내뱉으며 안절부절 못하던 몽룡이의 태도와 달랐다. 본인이 뭔가 잘못하긴 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상황을 풀어야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미숙함이 몽룡이였다면, 변사또는 문제를 명확히 파악하고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풀어내기까지 하는 존중과 관록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재료, 다른 레시피. 그리고, 더 맛있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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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말은 이거다. 춘향은 이몽룡이 아닌, 변사또를 선택한다. 각 캐릭터들이 모두 정 반대의 모습으로 바뀌었으니 캐릭터들의 화학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결말 역시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토록 완벽한 Y축 대칭을 통해 떼아뜨르 봄날은 ‘신분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는 < 춘향전 >의 표피를 완전히 벗겨버린다. 그 밑에 드러난 ‘순종과 희생에 대한 은근한 강요’라는 속살을 맘에 안 든다는 듯 툭툭 걷어 차버리는 연극. 그것이 떼아뜨르 봄날이 만들어낸 < 춘향 >이다.

큰 스토리라인과 캐릭터들은 원작과 다르지 않다. 즉, 재료는 같다. 하지만 그것들을 기존의 방식과 완전히 다르게 비벼내었다. 그 결과 훨씬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며, 그래서 더욱 시원한 맛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새로운 맛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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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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