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 [공연]

발레의 고장 러시아에서 지젤 보고 온 후기
글 입력 2018.08.20 11:4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KakaoTalk_20180820_114148777.jpg
 

어릴 적 우리 집에는 각종 요정의 신상과 관련된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 백과가 있었다. 당시의 나는 관심 있는 주제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몰두해 있었으므로 당연하게도 그 책을 탐독하며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신비한 존재들에게 빠져들었다. 나중에 가서는 내가 요정 시리즈를 만들어 새로운 요정을 창조하기까지 했는데 이건 다른 얘기고, 어쨌든 그 속엔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말 이상한 요정들도 많았던 것 같다. 집처럼 생겨서 안으로 들어오는 어린이들을 먹어 치우는 마녀도 있었고 남자들의 꿈 속에 들어가 유혹으로 정기를 빨아먹는 몽마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 기억에만 없지 그 책 속엔 아마 윌리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젤’을 보면서 순수하지만 잔인한 윌리가 분명 그때의 그 요정 대백과사전에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Entrechat_six.jpg
앙뜨르샤 시쓰


춤을 좋아하는 처녀가 결혼 전에 죽으면 무덤가에서 윌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신데렐라나 해리포터를 보고 요정이란 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천사의 형상이라고 착각하는데 사실 그 책 속의 요정들은 요괴나 악마에 가까웠다. 그들은 아이들을 먹거나 죄 없는 사람들을 농락하고 죽인다. 윌리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춤을 추는 요정이 아니라 자신의 무덤가에 찾아온 젊은 남자를 홀려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지젤은 이 윌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대표적인 발레 작품으로 실제 작품에서 무용가들은 이 이야기 그대로 ‘죽을 만큼’ 높은 강도의 춤을 소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평소 발레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닌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며 겸사겸사 유명한 작품을 관람하게 된 거라 지젤 자체를 이번에 처음 접했기에 미리 정보를 찾아 봤었다. 그 때 알게 된 것이 남자 주인공이 윌리에게 홀리는 장면에서 그는 관객에게 스토리를 납득시킬 만한 개수의 앙뜨르샤 씨스를 선보인다는 것이다. 앙뜨르샤 씨스는 제자리에서 점프한 뒤 좌우 다리를 각각 6번 교차시키고 착지하는 동작으로 직접 해 봤는데 우선 다리를 교차 시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힘든 시도였다. 그런데 이걸 대략 32번 이상 한다니! 사실 이 공연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남자 주인공이 과연 앙뜨르샤 씨스를 몇 개까지 할까, 였다.

춤의 의미는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단순히 축제처럼 즐거운 공간에서 자신의 흥을 표현하기 위해 몸을 흔드는 정열이나 교감의 느낌만이 아닌, 일종의 주술적 요소로도 많이 쓰인다. 대표적인 작품이 동화 ‘빨간 구두’로 주인공 카렌은 장례식장에서 허영을 부려 빨간 구두를 신고 갔다는 죄로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저주에 걸린다. 어린 아이가 평생 단 하나의 구두를 살 수 있는 돈이 주어졌을 때 예쁘고 화려한 구두에 현혹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 하기에 그 정도 욕심은 눈감아 줄 법한데, 안데르센은 그 정도도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 춤을 추던 카렌은 결국 지쳐 다리를 자른다.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결말이다. 여기서 춤은 징벌의 의미였다. 금기된 일(화려한 복장으로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일)을 하면 무조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죽을 만큼’ 높은 강도의 춤을 추게 만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전제로 한 그 춤은 보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생판 초면인 사형 집행인이 카렌의 다리를 잘라주고 그와 결혼까지 한 건 그 아름다움에 반해서 이진 않을까? 애초에 사형 집행인 이라고는 해도 자기의 신체를 잘라 달라는 부탁을 그렇게 쉽게 들어줄 리 없다. 더군다나 기독교 사회에서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한 여성과 결혼을 하다니 그 위험과 죄악을 감수할 만한 매력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춤은 사력을 다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을 때 배로 아름답다. 여기서 몸부림과 춤을 구분하는 기준은 미적 요소이다. 단순히 죽음에 임박했을 때의 인간이 아등바등 몸을 움직이는 것을 춤이라 하지 않듯이 고의성이 있든 없든 미적 요소가 가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죽음의 동작은 명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2010111100202_0.jpg


지젤에서 제일 매력적인 역할이 ‘윌리’들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동작을 취한다. 한데 모였다 흩어지며 무늬를 만들고 공중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백색의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남자 주인공을 홀리는 그들의 모습은 선득하지만 아름답다. 윌리들의 춤은 죽음을 감수할 만큼 아름답기에, 남자들은 알면서도 그들과 함께 춤을 추다 지쳐 쓰러지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극에서 윌리를 최고로 꼽은 이유는 기대한 만큼 남자 주인공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32번이라더니 내가 본 건 지젤의 앙뜨르샤 씨스 뿐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몇 번 다리를 들어올리더니 바로 쓰러졌다. 이 극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남자는 두 명이다. 신분을 숨기다 지젤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약혼녀에게 돌아가는 주인공 알브레히트와 지젤을 짝사랑하여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밝히는 힐라리온이 그들인데, 개인적으로 둘다 너무 별로이다. 우선 알브레히트는 전형적인 나쁜 놈으로 신분 숨긴 김에 겸사겸사 순진하고 예쁜 시골 소녀 꼬셔서 놀고 먹다가 결국 원래의 약혼녀인 공주에게 돌아가는 진부한 상황을 연출했다. 오페라 ‘나비부인’에서도 이런 식으로 흘러갔는데 이런 극들의 특징은 여자가 순진하기 이루 말할 데 없어서 그런 나쁜 놈을 끝까지 사랑하며 그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본 극의 알브레히트는 앙뜨르샤 씨스를 소화 못 해서 그런 건지 아님 컨셉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다가 너무 자주 쓰러졌다. 뭐 딱히 볼 게 없었다. 이에 반해 힐라리온은 춤이 무척 훌륭했다. 처음에 윌리들의 도깨비불을 보고 도망가버려서 다시 안 나오나 했더니만 중간에 알브레히트의 퇴장 후 다시 나와 윌리들과 함께 춤을 추는데, 그 장면을 보고 경탄했다. 남성 특유의 두꺼운 허벅지가 그렇게 유연하고 가벼워 보일 지 몰랐다. 정말 높게 올라가서 윌리들의 사이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지만 또 그들과 어우러지기도 하는 모습이 우아했다. 비록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은 남자가 질투나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고자질하기나 하는 찌질한 캐릭터지만 그의 춤만큼은 최고였다.

처연함. 내가 지젤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이었다. 눈 앞에서 모든 걸 잃고 자기 남자라 한 번 외치지 못한 채 실성해서 죽어버린 가련한 그녀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 모습 속에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울음 한 번 내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그녀의 수동적인 사랑은 나로 하여금 이상한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실성한 그녀가 알브레히트를 차마 만지지도 붙잡 지도 못하고 소중한 것을 대하는 것 마냥 닿을락 말락 손끝으로 매만지기만 하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얼마나 깊은 감정인지 감히 짐작해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둘의 사랑의 개연성이란 지젤의 춤 솜씨와 알브레히트의 얼굴 정도일 것으로 사료될 만큼 빠른 시간 안에 성사된 만남이지만 시골에서 자라왔다는 지젤에게 그와의 만남은 평생 받은 충격 중에서 제일 클 것이므로 우선 그녀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자. 어쨌든 그녀의 절제된 감정 표현은 윌리들과 더불어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러시아어라곤 ‘스파시바(спаси́бо,감사합니다)’만 알았고 여행 내내 숫자조차 읽기 힘들어 했던 내게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만한 감정을 전달했던 건 그녀의 몸짓 밖에 없었다. 발레 특유의 우아함과 섬세함으로 극대화된 그녀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내게 차가운 러시아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나라가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면 러시아는 ‘이냉치냉(以冷治冷)’일 것이다. 죽음을 감수할 만한 그들의 차가운 사랑이 도리에 내게 러시아를 보다 따뜻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서혜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