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Episode 3.

나도 너의 용기가 되고 싶어
글 입력 2018.08.2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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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사 박물관에 다다르자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국가는 없었고, 더 이상 못 살겠고, 그러니까 박살 내자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다행히 뜨거운 해는 지기 시작했고 선선한 바람이 이따금 불었다. 조금 앞에서는 피켓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자리를 가득 메운 그들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울 거 같았다. 목 놓아 외치는 소리는 절절했고 뜨거웠다. 그래서 나는 더 울고 싶어졌다.

마스크를 끼고 얼굴을 가린 사람, 피켓을 직접 만들어 온 사람, 똑같은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은 사람. 친구 한 명은 이미 벌써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 자리를 잡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친구 한 명은 일이 끝나는 대로 부랴부랴 이곳을 찾아왔다. 그리고 친구 한 명은 늦어지는 일정을 탓하며 곧 가겠다 연락이 왔고, 또 친구 한 명은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수많은 인파 사이에 섞여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보냈으며, 행진했다. 우리들은 각자의 분노와 슬픔, 억울함과 좌절, 그리고 희망과 가능성들을 버무린 얼굴들로 길고 길게 걸었다. 목이 터질 거 같고 속이 울렁거렸다. 발바닥이 뜨겁고 종아리는 딴딴하게 당겨왔다. 계속 걸었고 소리를 질렀다. 무엇 하나 멈추고 싶지 않았고 멈출 수도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외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결정적인 무언가를 크게 상실한 사람처럼, 쥐어도 쥐어도 흩어지는 것들처럼,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소리를 지르는 일이 빼앗기고 황폐해진 자리를 메꿔줄지도 몰랐다.

사건에 무죄 판결이 떨어지고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허락된 게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억지로 깨우쳐야 했다. 그 사실은 너무 모질고 지나친 것, 아니 말 그대로 좆같은 것이어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가늠이 안됐다. 도무지 내가 이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슬펐고 화가 났다. 그리고 각자의 방에서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좌절했던 사람들은 재빨리 모이자고 했다.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으고 피켓을 인쇄하고 구호 문구를 정했다. 말들을 고르고 모아서 우리의 참담함을 발언했다. 형상도 없이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부정의들은 낱낱이 언어가 되어 고발됐다. 그 모든 자리의 사람들의 알 수 없는 얼굴들이 망해버린 세상을 뒤엎고 떠올랐다. 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이 무언가 더 해 볼 만한 것이 있음을 알려줬다.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내게는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실에 많은 걸 걸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피켓을 흔들었다. 행렬의 맨 뒤에 있던 우리가 어느새 이만큼 앞당겨 왔는지 모르겠다며 다리를 주물렀다. 집회는 9시가 되어 끝났다. 불길이 치솟았고, 불빛이 반짝였던 이곳은 저물어갔다. 수많은 사람을 오갔다. 앞과 뒤, 옆에서 함께 걸은 수많은 사람,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건너보던 수많은 사람, 또 욕을 퍼붓던 뭇사람들까지.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친구 손을 잡고 집에 가자, 하며 걸었다. 우리는 수고했다거나, 어쨌다는 말 한마디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이곳에 함께 있는 친구들 때문에, 다 그 덕분에 가능한 것, 그 덕분에 이유를 발견했으니까.

나도 너의 용기가 되어주고 싶다. 내 이름을 너의 이름 옆에 나란히 적고 싶다. 계속해서 슬퍼해도 지치지 않고 싶다. 언제까지고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으로 싸워내고 싶다.




* 안니 레팰래의 사진입니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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