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폭력은 폭력으로만 맞서야 하는가? [도서]

글 입력 2018.08.25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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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링’이라는 단어가 있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공식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기법이다. 남이 나에게 입힌 피해와 행한 모욕을 그에게 그대로 되돌려 줌으로써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역지사지가 안 되어 교화가 안 된다고들 한다. 피해자의 심정을 가해자는 결단코 이해할 수 없기에 가해자를 피해자의 신분으로 올려놓지 않는 이상 진정한 반성을 바라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타인의 얼굴을 평가하는 사람에게 훈수를 둔다고 해 보자.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 누군가의 얼굴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흔하다. 더군다나 평가라는 단어의 기준 또한 애매하다. 그렇기에 내가 그 사람에게 아무리 선천적인 요인이 클 수밖에 없는 외모를 가지고 누군가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나 다름없다며 큰 실례라고 말해 봤자 그는 그것에 대해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뚱뚱한 사람보고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이 뭐가 잘못인지 그는 모른다. 자기관리 못한 본인이 잘못이며 그 정도까지 몸을 관리하지 못한 이는 자신의 비난을 받아도 싸다는 일종의 우월의식까지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 모두가 알 듯 절대적인 외모의 정석이란 없으므로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할 수 있다. 그런고로 나 또한 타인의 외모를 함부로 판단해 온 그들을 내 멋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쌓아 왔던 문장력과 어휘력으로 그들의 판에 박힌 시나리오들보다 신랄한 비판을 행할 수도 있다. 아마 그들은 그런 과정에서 자신들이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만큼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일을 최고로 여기므로, 자신들의 과거는 생각지도 못하고 본인들의 상처와 나의 잔인함을 우선할 테고 도리어 나를 가해자 취급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단죄를 실현한 정의가 될 수도 있지만 똑 같은 혐오의 생산자이기도 하다. 내가 타인에게 똑 같은 행위로 상처를 준다고 해서 원래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용서를 통해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의 용서를 무조건적으로 바라 서는 안 된다. 용서는 오롯한 피해자의 몫이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똑 같은 가해자가 되어 나 자신을 더럽힐 필요는 없다. 쓰레기는 거울에 비추어도 쓰레기에 불과한 것처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이어지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뿐이다.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거짓말(신중선)’은 폭력적이다. 이 책 속에 수록되어 있는 몇 가지의 단편들 속 갈등 상황은 주로 권력 구조에서 나오는 폭력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 듯 그러한 권력 구조란 주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 차이와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도구는 사회 속에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강요되는 것들의 형태로 표현된다. 일례로 ‘정희의 시간’ 속 정희는 고립된 시골 마을 속에서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성폭력을 금기시한다. 그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남성은 자신의 생계 유지와 처신을 위해 자신의 딸이 겪은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오히려 묵인한다. 그에겐 일말의 가책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훗날 정희의 딸인 손녀를 맡아 기르게 됐을 때 자신의 자식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무조건적인 애정을 퍼부었던 것에서 볼 때 그 과정을 일종의 회개로 받아들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고 입지가 작은 여자 아이에게 그러한 침묵은 이차적 폭력이었다. 그가 어린 여자여서 당했던 직접적 폭력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해도 자신의 안전보다 가정과 사회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과정 또한 개인보다 다수가 더 권력이 세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정희는 자신이 처한 폭력의 상황에서 도망친다. 코끼리를 어렸을 때부터 쇠사슬로 묶어 놓고 기르면 나중에 커서 자신에게 그 쇠사슬을 끊을 힘이 생기게 되더라도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학습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무력감 때문이다. 정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 마을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본인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권력 구조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밖으로 아예 도망쳤다. 그녀는 무력 했기에, 회피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후 성장한 그녀는 다시 이 곳으로 복귀한다. 복귀한 그녀가 한 일은 폭력을 되갚아주는 일이었다. 자신을 성폭행한 그를 죽이고 그녀는 권력을 탈환한다.

여기서 앞서 말한 논리를 적용해 보자면 나는 그녀의 방식을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결국 그녀가 폭력이라는 상황 속에서 택한 방식은 또 다른 폭력으로 표현된다. 그녀는 과연 가해자를 죽이고 자신의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권력을 얻었다는 표현은 또 다른 권력 구조를 생산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나는 폭력의 해결이 권력 구조의 해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해체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권력을 모두 비슷하게 조정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위계가 생기는 순간 균형이 깨지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정당화된다. 그녀가 얻게 된 권력은 비윤리적이며 그녀 자신에게 올바른 방향도 아니다. 비단 정희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아내의 방’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데다가 입양한 아이와도 맞지 않아 돌려보낸 아내는 결국 남편인 나와 갈등을 겪게 된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온전한 가정의 형태를 갖지 못하게 되었기에 그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아내에게 일종의 폭력적 시선이 가해진 것이다. 단순히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녀는 죄인이 된다. 아내는 자신보다 약한 열대어와 시추를 죽이며 자신의 분노를 삭인다. 자신에게 유리한 권력 구조 속에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상황을 회피하고 자신의 힘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정희와 다를 게 없다. 과연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거짓말’이 제시하는 과격한 해결 방식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일까? 물론 방식이 원초적일수록 더 큰 공감과 관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맞으나 그것이 완전한 갈등의 종식을 불러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남자보다 센’ 여자를 보고 싶은 게 아니다. ‘굳이 셀 필요 없는’ 사회를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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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행복하다는 거짓말』
문학〉한국소설
신중선 지음|내일의문학|268쪽|값 14,000원
ISBN 978-89-98204-49-5 (03810)
키워드 : #페미니즘 #페미니즘소설 #여성 #가족 
출간일 2018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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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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