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전 영화 깨기] 찰리가 묻네요, 21세기의 삶은 나아졌나요? [영화]

찰리 채플린 < 모던 타임즈 >
글 입력 2018.08.2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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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신문에 쓰여 있기를, LG전자가 근력 지원용 로봇이라는 ‘수트봇’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밑에는 현대중공업에서 4번째로 희망퇴직을 실시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왜인지 이 두 기사를 빤-히 보게 됐다. 정확하게는 위치였다. 얄궂게도 이 두 기사가 한 페이지에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앞뒤 간격으로. 누군가는 박수받아야 할 일을 하셨는데, 누군가의 일은 씁쓸하시다.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으로 변하고 있다는데, 동시에 누군가는 삶을 잃어가고 있는 세상인 것 같다. 이걸 무슨 세상이라고 불러야 할까. 반쪽만 승리한 세상? 반쪽만 발전하는 세상?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모든 것이 그런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음 무심하게 넘겼을 부분인데 왜 이런 생각에까지 오게 되었지, 되짚어보면
아, 아마 이 영화를 본 후라 이 부분이 내게 특히나 와 닿았던 것 같다.





찰리 채플린 <모던 타임즈>


모던 타임즈.jpg
 

1989.12.09 개봉
감독 : 찰리 채플린
장르 : 코미디


찰리 채플린. 내가 언젠가 고전 영화를 보는 날이 오면 그의 영화는 꼭! 봐야겠다며 적어놓은 감독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마음잡고 보려 하니 무엇부터 봐야 할지 고민이 들 정도로 필모그래피가 넘치더라. <찰리 채플린 걸작선 1~7>, <시티 라이트>, <위대한 독재자>, <모던 타임즈> 등등 모두 걸작이라 입을 모으니 모두 궁금했다. 고민 끝에 찰리가 톱니바퀴 안에 들어간 그 유명한 장면이 궁금했던 초심으로 돌아가 <모던 타임즈>를 선택했다.

중절모와 지팡이. 까만 콧수염과 눈썹. 동그랗게 큰 눈에 오리가 뒤뚱이는 듯한 발걸음.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너무도 반가웠다.

드디어 만났네요. 채플린, 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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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은 공장노동자로서의 찰리의 모습이었다.

찰리는 공장에서 일한다. 굴려지는 레일 옆에서 렌치로 나사를 조이는 일을 반복한다. 적정속도면 좋겠지만 공장장은 레일의 속도를 점점 높인다. 그럼 찰리가 기계를 조이는 건지, 기계가 찰리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쯤 되면 나사를 마구 조여 대는 행동이 하나의 콩트 같고 마임을 하는 것 같다. 무성영화임을 생각해볼 때, 소리가 들릴 수 없으니 자연히 행동이 커지고 과해질 수 있겠지만, 감독으로서의 찰리 채플린은 이를 적극 활용한 듯 보였다. 어딘가 좀 덜 떨어져 보이고 무엇을 하든 우스꽝스러운 찰리 채플린이라는 캐릭터가 시대를 비판하기도, 희망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보다 보면 웃픈 것이다.(웃기면서 슬프다) 처음엔 그저 웃기지만, 어느 순간부턴 마냥 웃을 수 없는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결국 찰리는 평상시에도 떨림을 멈출 수 없게 되고, 동그란 것만 보이면 조이려고 들기까지 한다.

그러다 일하던 컨베이어벨트 기계 안으로까지 들어가기에 이른다. 기계 안은 여러 톱니바퀴로 이루어져 있었다. 찰리가 톱니바퀴에 얹혀 있는 와중에도 조이려고 한다. 실상은 어느 톱니에 몸이 끼일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갑자기 섬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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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섬뜩했던 장면을 꼽아보자면, 식사시간에도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도입하려 했던 밥 먹여주는 기계를 찰리에게 실험해보는 장면이었다. 수프를 떠먹여 주고, 빵을 넣어주고, 입을 닦아주고. 그러다 기계는 고장이 나고 기계는 찰리의 입에 음식을 쑤셔 박고 던진다. 이 또한 웃긴 장면이었지만 당시 자본가들의 욕심과 노동자로서의 씁쓸함을 보여준다.

결국 병원에 끌려간 찰리의 병명은 신경쇠약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굴려대니 신경쇠약이 걸리는 게 당연했다. 공장에서의 장면은, 이 영화의 배경이 산업화 시대라는 걸 알 수 있다. 찰리는 산업화 시대의 노동권익을 상실한 노동자 중 한 명이고.

그가 안쓰러웠던 걸까. 아니면 실수투성이여도 악의 없는 일관된 행동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찰리를 응원했고 좋아졌다. 찰리가 쓸모없어 보일 수 있다. 하는 일마다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찰리가 미워 보이지 않는 건, 그에게 인간다움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사고를 쳐 잘리기 일쑤였지만, 계속 일자리를 구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 한다. 또 어찌어찌 우연이 겹치긴 했지만, 빵을 훔쳐 경찰에 붙잡힌 소녀를 구해주기도 하고, 탈옥하려는 죄수들을 막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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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기계, 실업, 파업, 부랑자, 노동자. <모던 타임즈>는 1시간 20분이라는 러닝 타임 속에 많은 걸 담아낸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발전을 이룩한 산업화 시대의 이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리는 파업시위로 한창이고,
소녀의 아버지는 실업자였다.
실업자 시위들 틈에서 누가 쐈는지도 모를 총을 맞고 죽었다.
“우리는 강도가 아냐, 그저 배가 고플 뿐이라고.”라며 공장에서 찰리와 함께 일했던 동료는 백화점 강도가 되었고,
찰리와 소녀는 취직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은 그 많은 걸 담아내면서도 무겁지 않게 표현한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 관객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와 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과 시대의 상황은 마냥 웃을 수 없었는데 말이다.

*

내가 더욱 마냥 웃지 못한 것은, 지금의 우리는 이때와 달라졌냐는 것이다. 우리 삶은 나아졌냐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산업화 당시의 노동문제는 현재 20세기를 넘어 21세기인 지금 우리나라와 무섭도록 닮았다. 속의 곪은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오늘 정규직 한 명이 빠졌다?
근데 그 사람 한 명 빠지면 그만큼 일이 비잖아.
그 사람이 담당하는 업무가 있으니까. 엄청 바쁜 거야.
어떻게 보고만 있어 도와줄 수밖에 없지.
근데 하다 보니까 억울한 거야. 다른 돈 받고, 하는 업무량은 결국 비슷해.
나는 돈도 적게 받는데 왜 똑같이 일해야 해?
이제는 자기들끼리도 힘에 부치면 내가 할 줄 아는 거 아니까 슬그머니 부탁해.
그렇다고 내 야근을 쳐주기나 하나.
그래도 뭐 어떡해. 솔직히 이렇게라도 취직된 걸 아니까 열만 받는 거지 뭐.


FROM. 분노로 시작했지만, 체념으로 끝낸 내 비정규직 친구의 얘기였다.

최근 취업난 속 소득분배가 10년 만에 최악을 찍었고,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었다고 한다.

기업들은 정규직, 비정규직, 무기직. 우리의 위치를 참 알차게 쪼개놓았다. 그렇다고 일까지 알차게 쪼개놓을라고. 회사에서 비정규직들은 실상 정규직과 비슷한 업무를 처리한다. 사실 그렇지 않나. 그 일이 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시해야 할 땐 너랑 나는 급이 다르다며 그렇게 잘 나눌 수가 없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찰리가 살던 세상과 다를 것이 있을까. 더 이상한 것은, 우리는 이미 산업화를 겪었고, 이제는 산업 사회를 넘어 지식 정보화 사회라고 가르치는 21세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노동환경은 아직 뒤에 멈춰있다. 맨날 가는 직장을 어느 날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며 가야 한다. 우리는 왜 우리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좋은 노동환경을 희망하며 파업한다. 영화 속 세상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아니라고 본다. <모던 타임즈>는 다시 봐도 지금의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어 마음이 아프다.

뭐가 맞다 틀리다. 누가 나쁘다 착하다. 솔직히 정답은 없다는 걸 안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있고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숙제일 테니까. 그럼 뭐 어쩌라는 거냐 한다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하나 깨달은 것을 말해보고자 한다.


애써봤자 무슨 소용 있어요? -소녀

힘내! 죽는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마.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고!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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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모던 타임즈>는 해피엔딩은 아니다. 다만 그 끝에 희망은 있었다.

이들이 결국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 그들의 집을 이룩해내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도 도망치는 신세다.
어떻게 보면 세계란 게 그런 것 같다. “이제 됐어. 자네 고생했네!”라며 손을 내밀다가도 메롱- 하며 뒤돌아 가버리는 것만 같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 이제 해 뜰 날만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내 마음같이 안되는 일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이런 세상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게 맞을까.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자고. 때론 맞서기도 하면서, 때론 숙이기도 하면서 살아가자고.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얘기한다.
찰리와 소녀는 또 어딘가로 가서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니겠지. 자신들의 집을 가지려고.
그러면 언젠가 우리의 집을, 우리의 직장을, 우리를 가질 날이 오겠지. 그렇게 믿는 것이다. 믿는 건 허락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행복하길 바라며, 그래서 털고 다시 일어서보며.
<모던 타임즈>속의 찰리와 소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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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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