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자라서, 행복해요? [도서]

글 입력 2018.08.28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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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행복해요.

몇 년 전이던가, 꽤 오래 전 어느 광고에서 쓰인 이후 넷 상을 떠돌아다니며 메가 히트를 친 문구다. 확실히, 과거에 비해 현대 여성의 권리는 크게 신장되어 법적으로 남성과 대등한 시대가 오게 되었다. 여성도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며, 투표를 하고,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도 있는, 그런 사회. 그뿐인가? 요즈음의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정작 필요할 때에는 신체적으로 연약함을 핑계 삼아 힘든 일을 피할 수도 있으며, 눈물 몇 방울로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고는 한다. 모두가 여자라고 귀여워해주니, 여성으로 태어난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어떤 남자들은 다음 생에는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며 볼멘소리를 내뱉기도 한다.

위의 텍스트에서, 당신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장애가 없는 어린 육체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하이힐이 신겨진 조그만 발로 위태롭게 서 있는 가녀린 여성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행복한 여성들, 대접받는 여성의 이미지는 이렇듯 한정적이고, 잡힐 듯 잡히지 않다가 한 순간에 눈 녹듯 사라진다. 젊은 몸은 언젠가 늙어 주름지고, 미모는 시들 것이다. 그러나 매체에서 다루는 젊고 예쁜 여자들의 신기루 같은 행복에 우리는 그만 깜빡 속아 넘어간다.

행복에 미소 짓는 인형 같은 가면 뒤로, 숨겨진 인류의 절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장애를 가진, 늙어서 축 쳐진 가슴을 한, 튼실하고 뚱뚱한 몸을 가진, 못생긴, 억척스럽고 가난하고 지질한, 현실에 지쳐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기도 한 이들까지도 우리는 모두 여자다. 소설가 신중선은 <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거짓말 >에서,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이미지 너머 외면당하는 실제의 여자들의 삶을 담담한 문체로 조명한다. 우리는 과연, 여자라는 이유로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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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거짓말 >은 총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미니즘 소설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수록된 모든 작품들이 여성이나 여성의 삶을 주로 다루는 것은 아니고, 몇 개의 작품은 남성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주목할 만 한 점은 여성이 화자인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 사이의 차이점인데, 전자의 작품 속 여성 화자들은 모두 자기만의 이름을 가진다. 그러나 남성 화자의 경우 이름이 아닌, 그저 남자 혹은 ‘그’라는 대명사로 불린다. 이는 소설이든, 영화든, 공연이든, 장르를 불문하고 그저 남성 배역을 위한 소모품, 이름 없이 ‘그 여자’로서만 존재하고 소비되는 수많은 여성 캐릭터를 겨냥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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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여성이란 무엇일까?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된 소수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여성들은, 단지 여성 성기를 달고 태어나는 것 이상으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적’ 포지션의 강요를 통해 여성으로 규정되는 삶을 부여받는다. 여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삶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같이 강요되어지는 여성의 삶은 먼 곳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어나며 가장 먼저 마주하는 첫 번째 공동체, 가족에서부터 여성의 역할은 시작된다. 소설 <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거짓말 >은, 여성을 가두는 수많은 감옥 중에서도 가족이라는 집단에 주목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가족은 무엇보다도 진하고 동물적인 유대로 엮인 집단이다. 세상에서 그 어떤 핍박을 받더라도 온전히 나만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인류가 이루는 거대한 사회의 한 조각이니만큼 사회의 부조리를 답습하며 위계를 만들고, 보호받아야 할 어떤 개인들은 그 속에서 희생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여성은 가정 안에서 처음으로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학습하며 자라게 되는데, 그 속에서 성장하여 또 다른 가정을 이루면서 각기 다른 역할수행을 요구받는다. 작중의 여성들은 가족 안에서 딸로(< 정희의 시간 >, < 반칙왕 >, < 묘화는 행복할까 >, < 노래방 여자 >), 누이로(< 노래방 여자 >), 부인으로(< 정희의 시간 >, <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 아내의 방 >, < 묘화는 행복할까 >), 어머니로(< 정희의 시간 >, < 노래방 여자 >, < 아내의 방 >)혹은 가장으로도(< 노래방 여자 >) 존재한다.
 
이같이 남성 권력에의 억압이라는 동일한 주제 속에서, 여성들은 그 역할에 따라, 억압의 결에 따라, 개인적 자질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며, 억압에 대응하며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 역시 천차만별이다. 가령 < 정희의 시간 > 속 막내딸 정희는 예민한 후각이 특징인 캐릭터로, 이를 통해 일찍이 자신을 둘러싼 구조적인 억압의 공기를 느낀다. (페미니즘 철학자 윤김지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조리의 냄새를 맡’는다.) 정희의 후각은 할머니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느낄 정도로 야생적인, 동물적 감각에 가깝게 묘사되며, 이것은 인류가 굳건히 유지해온 남성 권력의 두터운 연대, 인간적 잔혹성과 대치된다. 누가 자신을 강간했는지 낱낱이 고할 수 있었던 7살 꼬마아이는 아버지의 침묵으로 입이 틀어 막힌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배하는 남성 권력의 정점이다. 집에 붙어있는 날이 없고 날마다 여자를 끼고 다니는 날라리지만 그는 손쉽게 가장이라는 권력을 손에 쥐며, 그와 연대하는 마을 전체는 정희를 억압하는 가족극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를 견디지 못한 정희가 무대 바깥으로 뛰어나가 개인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그는 드디어 자신을 억압하던 부조리를 벌한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분신인 딸을 남겨, 한 번도 자신에게는 해주지 못했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고, 자신을 강간한 범인의 심장에는 칼을 꽂는 방식으로.

이같이 부조리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해당 집단으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성의 경우는 이러한 독립이 어떠한 권력의 전복을 통해 당당히 이루어지기보다 은밀한 야반도주를 통해 시도된다. 그를 지배하는 가족의 권력은 세상을 움직이는 남성 권력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남성 권력에의 전복을 시도하는 여성에 대해, 남성들은 본능적으로 거세공포를 느끼며 이는 여성 살해라는 극단적인 행위로 표출된다. 이는 <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 속 주인공 남자가 전세금을 빼서 달아난 부인에게 분노하면서도 차분히 굴며 재결합하고 싶어 하나,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권력이 무시당한다고 느끼자마자 그를 죽이는 모습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가족이라는 집단에서는 부조리를 인지하고도, 정희의 사례와 같이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지거나 남자의 아내처럼 생계의 위협을 실감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가족 내에서 여성의 의무는 혈연의 끈적한 정서적 연대 아래서 은밀하게 강요되기 때문이다. < 반칙왕 >에서의 석영은 남자 형제가 친 사고의 뒷수습을 부탁하는 노부모에게 반발하지만, 딸로서의 불공평한 의무를 부수어 버리려는 그의 손짓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자꾸만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다시 가족극장의 부조리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 묘화는 행복할까 >의 화자 ‘나’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가족을 주된 갈등 구조로 삼지 않고 ‘나’와 묘화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한다. 묘화라는, 이름에서부터 묘한 기운이 풍기는 이 인물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또 ‘나’라는 인물이 왜 끝없이 묘화에게 말려 들어가는지, 그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인물의 성질에 대한 배경으로 그들의 가족 관계를 제시해주면서, 작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그곳에서의 역할 수행이 어떻게 인물을 만들고 변화시키는지 보여준다.

두 동생의 죽음과 이혼이라는 가정사를 가진 주인공 ‘나’는 끊임없이 갈등하는 부모 밑에서 조용히 침묵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이 모두 태워질 때조차 그는 침묵을 강요당하며, 자연스레 자신의 피해에 둔감한, 또래보다 어딘가 어수룩한 인물로 자란다. 반면 묘화는 경제적 무능력에서 오는 열등감을 폭력으로 해소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의 장사를 도우면서,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위계를 절실히 실감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그는 어릴 때부터 착취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한 일종의 기술을 습득하며, 학급 내에서의 위계를 이용해 ‘나’에게 교묘히 정서적인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한다. ‘나’는 묘화가 왜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어린 시절 그대로 비상식적인 삶을 사는지에 대해, (필자의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약간의 정상인으로서의 우월함과 혐오감을 내비치며 궁금해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역시도 어린 시절 가족극장 내부에서 형성된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결국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묘화라는, 강자의 권력 앞에서 부조리에 굴복한다. 이같이 어려서부터 학습한 역할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내 안에 단단히 중심을 잡게 된다. '나'처럼, 석영처럼 그 속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자아는 가족 바깥의 관계들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발현된다. 이처럼 가족이라는 굴레는 그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개인을 손쉽게 지배한다. 그리고 여성은 단연코 가족이라는 계급 사회 속에서도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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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페미니즘 도서라고 추천받았을 때 막연히 예상했던, 어떤 분노나 고통에 찬 목소리라든가 강렬한 메시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가족,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는 그 모순적이고 특수한 관계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생겨나고 성장하고 싸우고 죽어가는지, 그 삶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 속의 정희, 남자의 아내, 미옥, 석영, 아내, 묘화와 나, 소영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밖의 스쳐지나간 또 다른 수많은 여성들도. 이 책을 읽는 다른 여성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커다랗게 비슷한 맥락 안에서 소소히 작게 다른 결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감각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는가?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오래된 소수자성을 가진 여성을 주체로 해서, 소수자성을 공유하는 모든 그룹에 대한 논의를 제공하는 발판이며 모든 소외받는 개인을 이야기하기 위한 첫 번째 계단이다. 이제는 하나의 시대적 감각이 되어버린 페미니즘을 우리는 피하지 않고 제대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따위의 기만은 걷어버리고 말이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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