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북마크] 노래는 누구의 목소리로 불리우나 : 연극 ‘비평가’의 이영석 연출가

글 입력 2018.08.28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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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3 오늘 처음 만드는

‘오늘’이라는 명사, ‘처음’이라는 부사, ‘만들다’라는 동사. 관객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단어다. 무대예술의 오늘과 내일은 다르기에, 다음 날이 밝으면 무대의 이야기는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기에, 그렇게 공연장 내의 우주는 하루하루 새로 만들어지기에. 무대가 늘 ‘새롭고 짜릿한’ 게 아닐까.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렇기에 ‘오늘’ ‘처음’ ‘만들어지는’ 무대는 콘텍스트를 잊어선 안 된다. 게으르지 않게 시대를 읽어내야 한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발굴해내 과감히 펼쳐내야 한다. 진실을 드러내길 두려워 해선 안 된다. 너무 많은 걸 바라나? 사랑하는 만큼 거는 기대도 큰 법이다.

*

[PEOPLE] 연극 ‘비평가’의 이영석 연출가 인터뷰
[ESSAY] 결국 다시 언저리
 
    

최근 한국 공연계에선 젠더 밴딩 캐스팅, 젠더 프리 캐스팅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캐릭터의 성별을 아예 지워버리거나, 생물학적 성별이 다른 배우를 같은 역할로 캐스팅하는 사례가 느는 추세다. 이런 작품들에선 그 혹은 그녀라는 차이점을 제쳐두고 인간이란 공통분모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혹은 성별을 역전시켜 새 의미를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이 시도들이 작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공연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는 일단 지켜봐야 할 문제다. 다만 이것이 특기해야 할 트렌드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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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평가> 역시 이 흐름 속에 있다. 남성 2인극인 원작을 여성 2인극으로 재구성한 이 연극은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다. 2017년 초연에서는 원작을 그대로 따른 반면, 1년여 만의 재연에서는 색다른 캐스팅을 시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좋다. 두 배우의 열연, 뜨거운 객석의 반응, 무엇보다 색다르게 읽히는 작품의 결. 그 모든 게 말이다.

연극 <비평가>는 트렌드를 따르는 것을 넘어, 작품의 이야기를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킨다. 그 중심엔 <비평가>의 초연, 재연 연출을 맡은 이영석 연출가가 있다. 그는 같은 텍스트를 남성 2인극으로, 또 여성 2인극으로 꾸려내며 새로운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는데, 연출가로선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거다.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 연극의 부제처럼, 이 작품은 작가의 노래에 비평가의 노래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노래에 주목한다. 그리고 메타언어를 통해, 무대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우리 각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 어쩌면 노래할 목소리를 찾는 이영석 연출가의 여정에 하나의 답이 배태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 연극은 진행되고 있다

 
Q. 2017년 초연에 이은 두 번째 <비평가>입니다. 다시 공연을 올리시는 소회가 궁금합니다.
    
이번에 재공연을 준비하면서, 지난번 공연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여성 배우의 남성 캐릭터 연기라는 것이 그 해결을 위한 선택이었죠. 저로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던 이 선택을, 관객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습니다.
  
그래서 공연 첫날, 분장실에 앉아서 저는 남몰래 꽤나 떨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번 공연이 저에게는 도전이었던 셈입니다. 관객분들께서는 예상처럼 다양한 반응을 해주셨고, 그중에는 저의 의도를 잘 읽어주시는 분들도 적지 않아 지금은 다소 안심한 상태입니다.


Q. 이번 공연은 초연과의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재연 <비평가>는 어떤 변화를 맞았나요?

앞서 말했듯, 여성 배우들이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큰 변화입니다. '어떤 연기 톤을 가져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요. 우리는 연습실에서 많은 실험을 했습니다. 너무 ‘남성 인물’인 척하다가는 배우 자신이 지닌 신체성과의 차이점 때문에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의상으로 남성을 표현하고 목소리와 몸짓으로 여성을 표현하는 경우에는, 차라리 여성 인물로 각색하는 편이 낫겠다는 인상을 주기 쉬웠습니다.

둘 다 저의 의도는 아니었기에 양자를 피했고, 배우들이 작중인물을 훌륭하게 연기해낼 수 있는 표현 수위를 찾고자 모두 함께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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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칭 구조의 무대에 맞게 극 안의 표현에서도 메타적인 요소들을 강화했습니다. 초연과는 공연장이 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무대장치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초연 무대디자이너인 박상봉 씨는 두 인물의 대칭성을 보여주기 위해 가로로 길게 자리 잡은 무대를 제안했었는데요. 초연 때는 공연장의 여건이 맞지 않아 이를 포기하고, 다분히 사실적인 무대를 지향했었습니다.

이번 스페이스111 극장은 애초 발상이었던 긴 가로 무대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무대디자이너의 발상을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가로 무대를 설정하고 연습을 시작했는데, 연습을 본 박상봉 씨가 작품의 내용, 공연장의 여건을 고려해 양면 객석 형태를 제안했습니다. 저 역시 이를 적극 수용했죠. 관객들이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공연 환경은 ‘지금 연극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각인시키는 메타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Q. 그렇다면 말씀해주신 변화가 텍스트엔 어떤 효과를 주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무대가 이렇게 설정되자, 동선과 연기에서 이 메타성을 살리기 위한 선택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두 명의 캐릭터는 각자 한 번씩 무대 아래에 내려서서 전체 연극을 상대화합니다. 이렇게 되자 연극에 대해 말하는 두 캐릭터의 발화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공연이 이 방식을 통해, 텍스트가 지닌 메타연극적인 특성을 더욱 잘 살려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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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배우의 캐스팅, 그리고 지금 ‘연극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메타적 장치들은 서로 연결되며, 서로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봤습니다. 여성이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게 되면서,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 인물인 양 행동하지만, 동시에 연극의 캐릭터라는 점이 부각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연극에 대한 연극(작품)에서 (여성 배우 캐스팅을 포함하여) ‘가장 연극적인 장치들로 공연하고 있다’는 상황을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 여성 2인극, 다른 텍스트를 상상하게 하다


Q. <비평가>란 작품에서 여성 2인극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여성 배우의 캐스팅은, '<비평가>라는 텍스트의 내용을 더욱 선명하게 살려내면서, 텍스트가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무대에 소환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있습니다.

이번 공연은 두 명의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는 점에서 여성 2인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는 남자로 남겨둔 채로요. 저는 드라마터그와 길게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선택을 했는데요.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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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작품 후반에 등장하는 볼로디아 아내의 대사를 처리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이 여성 캐릭터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남성 인물들에 의해 거론될 뿐입니다. 그러면서 두 남성 인물에게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즉 이 여성의 말은 대상화된 채, 드라마 구조 해결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무대에 등장하진 않지만 이 캐릭터에 육성을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때 관객들이 여성까지 포함한 세 등장인물의 삶을 더욱 잘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여성 인물의 대사에 여성의 육성이 실릴 때에 감춰졌던 여성 인물이 자기 자리를 찾게 될 것이고, 그것이 작품 이해에 핵심이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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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제는 이 텍스트에 담겨 있는 여성 비하적인 발언들이었습니다. 텍스트에서 남성 인물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은 모두 여성입니다. (공연 중간에 나가버린 여자, 따귀를 때린 여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한 여성 배우, 비하의 일종으로 쓰는 ‘할머니’까지) 이 비하들은 두 인물이 논쟁하는 가운데 잠깐 언급되므로 논쟁의 내용에만 집중하다 보면 놓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관된 양상이었으므로, 이 부분을 남성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드러낼 수 있는 포인트라고 봤습니다.

초연 준비과정에서도 이 점을 인식했고, 연기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남성 배우들을 통해 발언되었기 때문에, 또한 자신의 정당성으로 연극관과 입장을 상대에게 설파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발화였기 때문에 도드라지게 표현되지 못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여성의 입으로 여성비하적인 내용이 언급된다면, 그 아이러니가 관객들에게 분명히 인식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성 배우가 연기하지만, 캐릭터들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관극할 때, 일련의 발언이 가지는 문제점이 또렷이 드러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Q. 그래서 캐릭터가 남성이라는 기표를 그대로 남겨두신 건가요? 이 효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제가 염두에 둔 일차적인 효과는 남성 캐릭터를 여성이 연기함으로써, 이들이 ‘남성’ 캐릭터였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인지하고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초연에서는 남성 배우가 연기했는데, 그 자연스러움에 힘입어 남성 캐릭터들은 비평가와 작가를 대표하는 자격을 띠는 것처럼 존재했습니다. 즉 남성으로 대표되는 ‘연극인’들 이야기였죠. 그러면서 여성의 목소리는 제한되거나 배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남성이 연극인을 대표하는 구도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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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성 캐릭터로의 각색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 텍스트의 인물들을 여성으로 각색한다면 원하지 않은 역효과 즉, 여성 연극인들의 이야기를 '어설프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여성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원작을 비틀어, 진실되지 않은 여성 연극인 이야기를 할 우려가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원작의 내용은 이러한 각색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성 캐릭터의 진실성이 두 남성 연극인에게 중요한 사안이 되는 원작의 구도. 이를 기계적으로 역전시켜, 남성 캐릭터의 진실성이 두 여성 연극인들에게 중요한 사안이 되고, 그 남성의 행방이 두 여성 연극인의 다툼 대상이 된다고 설정한다면?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텍스트가 될 것입니다.
 
분명한 건 여성 연극인들을 잘 이야기하는 텍스트가 창작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 공연의 역할은 우리 연극에 이미 존재하는 그러한 열망에 동의하고, (<비평가>의 대사를 빌자면) 그러한 ‘다른 텍스트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남성 캐릭터를 연극인 일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남성’ 캐릭터로 보면서, 그들이 지니는 특성과 한계를 관객과 함께 인식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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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는 관객들이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여성 배우의 연기력을 음미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우와 인물의 성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긴장은 배우의 연기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라 봤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연극적인 상황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동성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자연스러운 범주 안에서는 맛보기 힘든, 연기술 자체 혹은 연기력 자체에 대한 집중과 음미가 발생하는 것이죠. 여성 배우의 남성 캐릭터 연기가 감각적 이질감이나 어색함을 넘어설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대단히 흥미로울 것이며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텍스트의 인물, 내용, 문장을 전혀 바꾸지 않고 연기하는 배우의 성을 바꿈으로써, 한편으로는 남성 신화를 깨트리고 다른 편으로는 여성 배우들의 연기에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기대했습니다.
 
하나의 더 큰 바람도 있었습니다. 연기의 절묘한 수위 조절을 통해서 남성/여성의 구도를 넘어, 남성 캐릭터의 대사라 할지라도 그것을 여성 배우가 발화하면서 대사의 주체를 남성 혹은 여성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 없는, 혹은 확정할 필요가 없는 묘한 겹침 효과가 발생하기를 바랐습니다.
 

Q. 원작 자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작품 기저에 깔아둡니다. 초연 <비평가>에서는 이런 구도가 잘 읽혔는데요. 이번 <비평가>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오이디푸스적 아버지와 아들’로 설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여성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와 모순을 빚었을 겁니다. 저는 여성 배우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물 구도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두 인물이 내밀한 대화를 해온 사이였다는 점이 더욱 잘 보인다고 생각하는데요. 텍스트는 두 인물을 단순히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거나 상대를 제압하려 한 관계로 그리지 않습니다. 초연 남성 배우들의 경우, 갈등의 선이 굵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오이디푸스적인 관계가 부각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성 배우들의 경우, 적대감보다는 유대감, 항거보다는 연대의 관계라는 점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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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배우들이 연기하는 두 인물은 각자 서로에게 눈물을 보입니다. 스카르파는 그렇게 믿었던 자신의 스승이 알고 보니 자기모순에 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볼로디아는 자신의 아내가 지녔던 슬픔을 알게 되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모든 남성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남성인 저의 경우에는 그만큼의 정서적 충격이 온다 해도 다른 사람, 그것도 논쟁 관계에 있었던 사람 앞에서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눈물을 흘리지 못합니다. 눈물이 나더라도 바로 감추기 위해 애쓰죠. 아마도 남자는 쉽게 울면 안 된다는 (어렸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는 동의하고 싶지 않은) 교육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탓이 아닌가 합니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논쟁하지만 사실 서로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비평가와 작가란 서로 ‘대화’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본래 텍스트가 설정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이번 공연에서 이 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Q. 스카르파가 ‘여자’를 연기하는 부분도, 이종무 배우(초연)와 김신록 배우(재연)의 느낌이 사뭇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디렉션의 차이가 있었나요?

‘여자’ 인물의 해석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두 배우와 이야기한 것은 동일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봐서 생긴 상처. 스스로 노래를 찾고자 하지만 찾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슬픔. 이를 가진 '여자'를 그리려 한 점은 같습니다.
 
만약 차이가 있다면 아마도 대사를 ‘누가’ 말하느냐의 차이일 겁니다. 초연의 경우에는 스카르파가 한 여성의 슬픔을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여성 배우가 스카르파를 연기하면서, ‘여자’가 무대에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말하는 듯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스카르파 목소리와 여자 목소리 사이에 겹침 효과가 발생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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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동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종무 배우의 경우, 무대 디자인의 영향으로 한쪽 의자에 앉아 긴 대사를 들려줍니다. 이에 반해 김신록 배우는 가로로 길게 늘어선 책상들을 이용하여 볼로디아를 향해 다가가고 멀어지는 등, 볼로디아에게 여자가 직접 말하는 듯한 상황을 창조했습니다. 김신록 배우가 무대를 활용해, 장면을 훌륭하게 구현해낸 것이죠.
 
이종무 배우와 김신록 배우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제 디렉션보다 더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셨다는 점입니다.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


Q. 두 번, 그것도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올린 <비평가>. 연출님께도 각별한 텍스트일 것 같은데요. 이 작품의 어떤 점에 흥미를 느끼시나요?

이 작품이 저의 (혹은 연극인들의) 두 가지 모습을 단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연극인들에게는 분명 인정 욕망이 존재합니다. 마치 스카르파처럼요. 동시에 연극의 사명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볼로디아처럼요. 이 둘은 제게 공존하는 두 가지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텍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 강한 끌림을 느꼈습니다. 자기 일의 사명감과 인정 욕망.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또한 늘 동시에 작용하는 이 두 가지 마음이 텍스트 전체를 통해 관철돼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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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처음 끌림이었다면, <비평가>를 두 번 연출하게 된 이유는 이 두 가지에서 모두 벗어나는 어떤 지점에 진짜 자신의 목소리와 몫이 있다는 것, 그것을 이 작품이 역설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라는 부제는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서 저는 찔림을 느꼈습니다. '과연 나는 연출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노래를 할 줄 아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리고 아직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지만, 이 질문은 <비평가>를 연출하게 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Q. 이 연극을 만들며 연극인으로서 어떤 감정이 드는지 궁금합니다.

말씀드렸듯, 스카르파, 볼로디아에게서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강도는 다르지만 저 또한 연극을 한다는 미명하에 제 주변, 제 소중한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내밀하게 들여다보지 못하는 자가당착의 상황에 놓여왔습니다. 마지막 볼로디아의 오열은 저의 오열이기도 합니다.

저 또한 연극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저의 연극이 관객들에게 어떤 가치를 전해주었는지 의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극은 아무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안타까이 말하는 스카르파의 말은 저의 고백이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볼로디아와 스카르파 그리고 저를 포함한 많은 연극인들이 이와 같은 상황의 당사자들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고, 보잘것없는 연극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책무 또한 느낍니다.
   

Q. 극 중 “연극을 이야기하는 연극은 연극인만 좋아한다”는 대사가 등장합니다. 메타드라마로서 이 연극이, 연극인에게 또 다수의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시나요?

물론 이 작품은 연극에 대한 연극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내용은 오히려 폐쇄적인 연극 논의의 함정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볼로디아는 평론을 버리고 자신의 아내를 찾아 현실로 나아갑니다. 홀로 남은 스카르파는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 볼로디아의 영향에서 벗어난 진짜 자기 작품을 쓰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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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과 일에서, 진짜 목소리로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단어를 말하기. 아마 작가는 그것을 “내가 노래할 줄 알면”이라는 가정법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작품이 비평가와 작가를 등장시켜 연극계 진단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짜 자기의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함이 많은 작품이지만, 관객분들께서 자신의 삶에서 자기 목소리, 혹은 진정한 자신의 단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면 저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Q.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작업, 예정된 작업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예정된 작업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모순들을 단순히 재연하는 작품보다는 그것에 대한 연극적 대응이 형식의 차원에서 모색되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


2018년 오늘에 다시 만난 <비평가>는 그리고 <비평가>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는, '현재성'을 띠고 있었다.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 참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던 대사는 새로운 배우의 새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맥락을 입는다. 단순한 성별 역전 구도를 넘어, 이를 통해 텍스트를 꼬집고 텍스트를 다시 해석해내는 작업. 그게 재연 <비평가>가 달성한 소기의 성과다.

볼로디아의 노래, 스카르파의 노래, '여자'의 노래. 그리고 관객의 노래. 그 모든 노래를 되짚게 만드는 것. 인간 개체 하나하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 '뿌리 깊은 거짓'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수고로움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볼로디아의 말처럼, 관객이 '진짜 박수'를 건네는 건, 이런 도전과 작업을 만날 때일 것이다.

더불어 백현주, 김신록이라는 매력적인 배우들을 만나고 보니, 이런 배우들을 더욱더 자주 보고 싶어지더라. 이들처럼 진진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수많은 여성 배우들, 그들을 더욱 많이, 자주, 오래 만나고 싶다.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더 많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를, 타인을 구원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들의 노래는 언제고 듣고 싶은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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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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