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angle] Rest 2. 위로정식, 두 번째 밤

답을 찾는 것보다 없는 답을 만드는 게 더 힘들어
글 입력 2018.08.29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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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찾는 것보다
없는 답을 만드는 게 더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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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angle}
위로정식, 두 번째 밤



[5월 26일]


지독하게 나를 괴롭히는 문장에 쫓기다 결국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다음엔 좀 웃는 모습으로 오려 했는데. 비소를 짓다가 문을 밀었다.


M 올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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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좁은 테이블 끝에 꽃이 가득 꽂힌 꽃병이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송이의 꽃들이 아무렇게나 피어 가득차 있었다. 과하게 꽂았나 싶을 정도로, 아니 너무 많이 꽂아서 꽃들이 제 자리를 찾아 피다보니 줄기를 휘어가면서까지 제 꽃을 완연하게 피워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서로 좁은 틈 그 사이들에서 온전히 피어있었다.


M 옷도 안 갈아입고 급하게 왔나 보네


나는 너를 잊고 멍하게 꽃들을 바라보다가 내게 날아온 너의 말에 정신 차린다. 그제야 나는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리에 앉으니 꽃잎이 세상에서 가장 소심한 거리에서 나의 뺨을 건드린다. 하얀 꽃이었다.


E 음, 급하게 와 버렸지...

M 괜찮아. 숨도 좀 고르고, 눈도 감고 천천히 해


후우-
나는 그제야 진한 숨을 뱉는다. 오른쪽에 있는 꽃들의 향이 뒤섞여서 알 수 없는 향으로 내게 다가온다. 참을 수가 없다. 이상한 질문인 거 아는데 참을 수가 없다.


E 저기 있잖아

M 응?

E 나 꽃병에

M 꽃병?

E 얼굴 좀... 파묻고 있어도 될까

M 하...?


나 진짜 못 참겠어, 너도 알잖아.
울먹임과 간절함 사이에서 쏟아지는 내 눈빛에 너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꽃병을 살며시 내 앞으로 끌어왔다. 드륵드륵. 유리병이 나무 테이블을 긁는 소리가 뭔가 좋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시야에 가득 차는 화려한 색들에 다른 공간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을 못 쉬는 것도 아닌데 괜히 물에 잠수하기 직전처럼 숨을 마시고 천천히 꽃들 사이에 얼굴을 넣었다. 눈도 감았다. 뺨에 아무렇게 닿는 꽃잎들이 좋았다. 차가운 풀 향에 뒤섞여 올라오는 꽃향기가 내 호흡을 대신했다. 아마 꿈의 산소 호흡기. 좋았다. 얼굴을 살짝 움직이니 꽃잎들도 같이 소리 내었다.


M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해뒀더니, 이 정도로 필요할 줄은 상상도 못했네...입에 먹지는 말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작사부작. 꽃잎들도 내 얼굴을 긁으며 대답했다. 꽃잎 하나가 내 귀를 간질였다. 소름이 돌지만 기분 좋은 간지럼이었다.


E 좋아! 이제 진정되었어

M 진짜 못 말린다니까


기분이 너무 좋아졌나, 느낌표를 달고 나서 괜히 내 입을 막아버렸다.


E 주문해도 될까요

M 네네 주문하세요

E 음...엄청나게 단 레몬 사탕이랑 따뜻한 차가 먹고 싶어

얼마나 달아야 하지?

E 입에 담으면 눈 못 뜰 정도로. 그렇게 눈 못 뜨고 현실로 안 갈래

M 정말... 너 가끔씩 그럴 때 마다 어린 애 같은데 너무 안쓰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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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쓰럽다는 너의 말에 마음이 묘해졌다. 흥분이 가라 앉아 다시 수면을 유지한다. 잠시 옆에 있는 꽃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꽃들 사이 레몬 꼬치를 발견했다. 살짝 신 향이 올라오는 것 같더니, 어젯밤 꿈속에서 본 레몬 크기만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도 꿈을 꿔버렸다. 그 꿈이 생각나니 침이 고인다. 꿈속에서 먹었던 그 레몬 정말 맛있었거든. 밝고 폭신폭신한 레몬색.


E 있잖아 나 여기 오래 있어도 돼?

M 얼마든지, 여기서 시간은 무의미하니까

E 좋아, 그럼 천천히 준비해줘, 나 오래 있다 갈래

M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

E 정말 최고야, 너무 좋아, 안 시들었으면 좋겠어

M 시들면, 다시 심어 놓으면 되지 네가 그랬던 것처럼

...

E 아, 나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M 그래 천천히 해


너는 나보고 항상 천천히 하라고 한다. 근데 나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을 때가 많은 건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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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휴, 나 너무 늦었지?

M 아냐아냐 바깥은 시간이 꽤 흘렀나봐?

E 아마... 5일 정도 지났어

M 바빴나 보네, 몸은 괜찮아?

E 괜찮아, 잊고 있다가 떠올랐는데 지금 아니면 계속 못 돌아갈 것 같아서 오늘은 일찍 하루를 마쳤어

M 잘했어, 내일이 또 있으니까


후,
여기는 올 때마다 항상 숨 쉬는 걸 잊는 건지, 숨부터 쉬고 나는 꽃병을 먼저 확인했다. 여전히, 음, 예쁘다고 해야하나 화려하다고 해야하나. 정확한 수식어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아마 좋다는 의미인 것 같다. 조금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자리에 앉으며 한번 쓰다듬어본다.


M ...

E ?


나를 빤히 쳐다보는 너에, 나는 '왜?'하며 표정으로 묻는다.


M 너 요즘 뭐랄까 편안해 보여서

E 내가?

M 응, 너는 모르고 있나 본데 아까 들어올 때 미소 짓고 있던 거 알아?

E 아... 그래?


나도 모르게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나. 순간 뭐하고 있는 건가 해서 손을 그냥 내렸다. 맞는 것 같다. 요즘은 저번 달과 달리 뭔가 여유로웠다.


E 요즘 마음이 좀 여유로워, 현실은 더 바쁘고 어떻게 보면 막막해졌는데, 마음은 여유로워

M 다행이다 좋은 변화네

E 응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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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생각이 시작되는 것 같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바스락 바스락, 네가 뭔가를 찾는 동안 나는 네가 들을 진 모르겠지만 입을 열었다. 나를 위로해주는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였다. 나의 작은 변화에 대한. 


E 있잖아, 나는 내가 힘들고 지치는 이유가 다 세상이 나보고 요구하는 것들 때문인 것 같았어. 일단 다들 가면 좋다고 해서 간 특목고, 가라고 해서 그냥 간 대학교, 자유는커녕 오히려 쌓여 버린 과제, 감당하지 못해 밀리는 공부, 현실적인 고민 같은 여러 가지 것들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것들이 내가 원했던 건지 아니면 그들이 원했던 건지 헷갈리기도 하네.
그렇다고 이런 과정이 너무 싫었다고 말하고 싶기보다는, 다만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무엇이 내게 남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는 거야. 무슨 마음인지조차 모르고 몇 년을 달려오고 결국 살고 있는 지금이, 그래서 노는 건 거의 포기하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지쳤어. 나는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지치고 힘들고 그게 쌓이다 못해 우울증이 되고 그런 건 줄만 알았어. 가끔은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를 나마저도 싫어하기도 했어. 결국.


쏟아지는 생각을 마침표 찍고 고개를 들었을 땐 눈앞에 동그란 노란 막대 사탕이 눈에 찼다. 너는 사탕을 든 손으로 손짓 한다. 나는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근데 너는 그게 아니라며 손을 내젓는다. 뭐지? 너는 입을 벌린다. 나도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노란 달이 내 입에 쏙 들어왔다. 히익 엄청 달다.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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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엄청 달아

M 그럼 성공이네


츠흡
혀가 아리는 단맛 사이 레몬의 신맛이 올라온다. 침이 계속 나와서 계속 꼴깍거렸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아까 내가 한 말을 잊어버릴 정도로 달았다. 근데 좋았다. 딱. 눈물 찔끔 나오는 이유가 단지 달콤함뿐이라면, 아마 좋은 것 같았다.


M 그럼 네가 말한 그것들이 너를 힘들게 한 것들이 아니었단 거야?

E 흠, 아니 꼭 그렇게 아니라고만 하면 안될 것 같아

M 그럼?

E 음...그런 것들이 몰려올 때, 정말 벽처럼 쌓여서 방황한 건 사실이야. 너무 많아서, 내가 할 수 있을지 걱정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한 것들인 건 사실이니까.

M 음...좀 더 설명이 필요해

E 다만 나는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는 거야

M ...


너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더 잘 설명해보려고 복잡하지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머리를  더 굴려봤다. 그렇게 침묵이 잠시 이어진다. 너는 고민하는 나를 눈치채고 주전자에 물을 채우러 갔다.


E 그러니까 내가 힘들 때, 나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는 거야

M 아, 그러니까 너 자신을?

E 응, 내가 힘든데, 결국엔 답이 없을 고민들에 지쳤는데 그렇게 돼버린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나를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니까 지친 그 상태로 더 몰아넣고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해결해보려고 억지로 그러다 보니까

M 예전의 넌 방황했던 거구나

E 그렇지...나는 그 방황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지?' 이런 건 줄 알았어

M ...

E 근데 이제 와서 보니까 그 방황은 '지쳐버린 나를 어떻게 하지' 이거였어.


내 말을 잠자코 듣던 너는 이해될 것 같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마른 소리 내고 있는 안쓰러운 주전자를 잡고 물을 따른다. 쪼르륵. 나는 사탕을 입에 담는다. 히익. 다시 정신 차려지는 맛이다. 춉춉, 온 감각이 아린 그 사탕의 유혹에 열심히 응답했다.


M 흠, 그렇네. 진짜 방황이 무엇이었는지 찾았다는 거지?

E 응,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

M 믿어, 그러면 돼


나를 믿어보라고 용기를 주는 너,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었나. 기억을 더듬어본다. 


M 그러면 그 방황은 매듭지어진거야? 궁금하다, 너는 답을 찾았어 아니면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거야?

E 음, 잠시만 한번 생각해볼게.


나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찾았을까
사탕 굴리는 속도에 맞춰 머릿속에서 단어를 굴려본다. 그 사이에 찻잔이 내 앞에 드르륵 다가온다. 혀가 감각을 잃은 것 같아 차 한입을 머금었다.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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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그렇게 말하니까 지금 하나 떠오른 건, 그게 바로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유인 것 같아

M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

E 왜냐하면 우울증과 방황에서 건져지고 내가 하는 진짜 방황이 무엇인지 보이고 시작하고,

M ...

E 너와 이렇게 대화하고 있기까지, 이 과정 자체가 다 그림 덕분이었거든

...

M 그 멋진 과정에 내가 끼어들어서 뭔가 기쁘네


너는 미소 짓는다. 나는 벅찼다. 내가 그림 그릴 이유가 하나 더 선명해졌다.


E 나를, 지친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면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하잖아, 의사가 병을 어떻게 고칠지 고민하기 위해선 그 병이 뭔지 알아야 하듯이. 너무 당연한 말인데

M 그렇지

E 방황이 뭔지 알아차린 그 순간 자체가, 내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아차린 순간이었던 거야. 이제야 뭔가 보이기 시작한 거지.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라고. 이제야 보이는 게 이상하기도 하지만.

M 구름?

E 아? 굳이 그 단어를 지금 꺼내야 하니


괜히 부끄러워서 목소리가 천장을 치다가 뚝 떨어져 버린다. 구름, 구름, 구름.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건지, 나를 닮은 건지, 나를 닮아서 좋아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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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놀랐다면 미안해, 근데 나는 네가 너무 멋져, 그리고 고마워

E 고맙다니...?

M 내가 있는 이유가 지금 확인 된 것만 같아서


나는 얼떨떨했다. 네게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항상 위로 받는 건 나였는데.


M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해볼까. 그럼 너는 계속 너를 알아가기 위해 그림과 글을 그리겠네

E 그렇지, 내가 살고 있을 세상으로부터의 방황과 고민은 계속 될 테니까, 거기서 나는 나를 잃지 않고 싶으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다시 되짚어본다. '나는 나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M 그래서 저번보다 더 바쁘고 힘든데도 오히려

E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잘 지내고 있어!

M 힘도 넘치네


우린 웃는다. 아, 기쁘다.


E 그래도 난 기억하려고 해, 내가 언젠가 또 힘든 시기를 겪을 거란 걸.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그리고 또 쉽게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럴 땐...

M 여기로 와

E 아익


너 진짜 기분 좋아 보인다. 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E 그럴 땐 나를 좀 더 안아줘야지. 나를 알아간다는 건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간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M ...

E 그래그래, 정 힘들면 너한테 갈게

M 힘들 때만 오지 않아도 돼, 이렇게 이야기 나누러 와도 좋아, 나도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 되는 것 같아


네가 말한 대로 우린 서로 부족한 만큼 기대고 있으니까,
너는 말을 않는다. 나도 말을 멈췄다. 침묵이 아닌 존재로 언어가 오갔다. 그렇게 우린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 자체가 위로였다.


"고마워"


갈 시간이 되었는데 사탕이 조금 남았다. 나는 어떡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M 들고 가면서 먹어. 대신 먹다가 자서 영원히 잠들진 말고

E 아 진짜 영원히 잠들고 싶다

M 그럼 내가 깨우러 갈게

E 아니야, 넌 오지마


넌 여기에 계속 있어.
그래야 했다. 너는 알겠다는 듯이 미소로 대답한다. 우린 서로 알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지.


드르륵


나는 마지막으로 손 인사를 하고, 테이블에 있는 사랑스런 꽃들에게 눈맞춤을 하고, 왠지 모를 아쉬움에 그곳의 공기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



잘하고 있어.
멋진 사람.


이제는 나를 믿을 줄 안다. 



*

next.


"무섭다"
그래 놓고
"아닌가, 좋은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근데 "무섭다'"에는
붙지 않던 물음표가
"좋은 거"에는
붙는거야.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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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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