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뢰한》 우리는 모두 무뢰한이다 [영화]

글 입력 2018.08.3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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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멜로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감정 이입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극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 상대의 결핍을 채워주는 서로의 반짝임이 작위적으로 보일 때 공감을 하기 어렵다. 사랑에만 빠지면 그들을 둘러싼 모든 공간이 꽃밭이 되는 그 괴리감이 낯설게 느껴진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랑도 현실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특별하다. 《무뢰한》은 사랑의 고결함을 내세우지도, 그렇다고 끔찍하고 감상적인 불행을 전시하지도 않는다. 찰나의 윤기 없이 푸석한 삶의 비포장도로를 전전하는 두 사람의 있는 그대로 짙은 감정을 희석 없이 담아낸 ‘정통 멜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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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게 추했기에


전형적인 ‘적을 사랑한 스파이’ 이야기이다. 잠적한 살인자를 쫓는 형사가 살인자의 애인을 꾀어내는 과정에서 그와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부족함이란 없을 것처럼 완벽히 자신을 무장한 첩보의 대상이 첩자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진실한 속내와 상처를 터놓으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은 이런 플롯의 작품이 흔히 갖는 재미 요소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살인자의 애인 혜경 역을 맡은 배우 전도연은 그녀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녀가 지닌 완벽함은 여타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삼류 술집에 근무하는 여성으로 언제나 인간만도 못한 물건 취급을 받는다. 자신의 중대한 지위를 탐하고 몰락을 원하는 자들의 위협에 스스로를 무장하는 여타 첩보 대상들과는 다르게, 혜경은 자신을 하대하는 폭력적 시선에 방어기제를 촘촘히 세우는 과정에서 그녀만의 완벽함을 체득한다. 그녀를 쫓는 형사 재곤 역시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그녀를 가리는 편견에 거리감을 느꼈으리라. 건달로 위장한 그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는 반말로 모욕적인 언행을 던진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혜경은 그의 언행에 즉각 불만을 표하고 가볍게 욕설을 내뱉는다. 그녀의 거침없는 반응에서 그녀가 얼마나 자기방어에 능숙한지, 능숙해야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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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곤이 혜경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혜경이 술집 외상값을 독촉하러 갔을 때이다. 밀린 술값을 받아내려는 자리에서 그녀는 포효하듯 외친다.

“나 김혜경이야. 이 바닥 생활 10년 만에
빚이 5억이고 희망도 없는 X이야.”

자신을 내려다보는 잔악한 시선들에 잔뜩 날을 세우고 자신을 보호해 온 그녀의 그 처절한 완벽함이, 그저 ‘독하다’라는 말로 일축되어온 그녀의 날카로움이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척박한 삶 속에서 치열하게 고군분투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밑바닥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그녀를 두둔하고, 그녀는 그런 그에게 안정감을 느낀다.

그들이 사랑에 빠진 이유는 서로의 눈부신 장점 때문이 아니었다. 서로 닮아있기 때문에, 비슷하게 추하기 때문이었다. 재곤은 자신을 왜 좋아하냐는 혜경의 질문에 힘없이 대답한다. “혜경 씨가 내 약점이니까.” 그녀는 그의 약점이었고, 삶을 옭아매는 걸림돌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들을 강하게 하지 않았다. 끝없이 강한 모습으로 맹렬하게 자신을 보호했던 그들 역시 누군가에게는 약해 보이고 싶고 의존하고 싶은 하나의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그들은 깨닫는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휴머니즘이다.



진실이라는 허상을 믿고 싶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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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곤과 혜경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을 갈구하고 거짓을 의심한다. 재곤을 처음 본 혜경은 그의 거짓말을 예리하게 짚으며 정체를 묻는다. 그러나 재곤은 눈 깜빡 않고 더욱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사기꾼이냐는 질문에도 태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재곤과 혜경은 그렇게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그들이 믿는 진실이 허상에 불과하며 모든 게 거짓뿐이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진실을 원했다. 살인자의 곁을 떠나 자신과 함께 살자는 재곤의 말에 혜경은 진심이냐고 되묻고, 재곤은 거짓말이라며 웃어넘긴다. 그러나 재곤의 눈빛에 담긴 연민 섞인 진심을 발견한 혜경은 다시 한번 되묻고, 재곤은 자신의 말을 믿지 말라 당부한다. 살인자를 체포하고 정체를 밝힌 재곤이 혜경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분노에 찬 혜경은 진짜 이름을 묻고, 재곤은 대답하지 않는다. 혜경은 의심을 거듭하면서도 진실이라는 끈 끝의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재곤은 진실 따위 허상이라 이미 단정 짓고 거짓말쟁이가 되어 그 속에서 홀로 고독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혜경이 알아챘듯, 그의 사랑만은 진심이었다.

 

우리는 모두 무뢰한이다



무뢰한(無賴漢)

: 일정한 직업이 없이 돌아다니며
불량한 짓을 하는 사람


이 영화는 모두 같은 무뢰한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모두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평범한 일상의 그림자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다. 임무와 사랑의 경계에서 흔들리며 저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재곤, 나름의 꿈과 따뜻한 희망이 있으나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정글 같은 세상에서 냉철할 수밖에 없는 혜경. 볕들 곳 없는 음지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무뢰한들의 사랑과 아픔에 공감되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는 미래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하리만큼 평범한 일상을 꿈꾸는 그들은 사실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그저 하나의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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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감정을 최대한 건조하게 전달하는 이 영화는 그래서인지 더욱 마음이 간다. 과장을 하지 않아도, 극적인 순간이 없어도, 인물들이 보는 이들의 환상을 자극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슴 아린 것은 우리의 모습과 한없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추했기에, 진실이라는 허상을 믿고 싶었기에 서로를 사랑한 그들에 대한 연민은 돌아와 자기 자신, 더 나아가 인간 전체를 향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무뢰한이다. 누구 하나 정돈해주는 사람 없이 지저분한 인생의 위태로운 외줄을 걸어간다. 도착점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숨 가쁜 걸음은 좌절을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무뢰한의 안녕을 바라는 이 영화의 끝은 사랑이 인간에게 얼마나 짙은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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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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