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화려함의 중심에서 소박함을 외치다. [도서]

소확행의 선구자, 사울 레이터
글 입력 2018.08.3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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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콘택트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오프닝 씬을 아시는가.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을 순서대로 지나며 펼쳐지는 광활한 우주의 풍경 위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제를 논하는 뉴스 앵커들의 바쁜 음성이 깔린다. 카메라가 지구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그 드넓은 위용을 드러내는 은하계와 달리 심각한 듯 했던 이념 대립의 목소리들은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조잘거림 수준이 되어버린다. 인간과 그들이 벌여대는 무수한 갈등들은 이 거대한 우주 앞에서 얼마나 미세하며 덧없는가.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사진가가 주는 선물은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일 경우가 종종 있다.

p.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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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 컨택트 >의 오프닝 씬 같다.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그저 바라보는 사울 레이터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인도, CEO도, 종교인도, 노인도, 어린이도, 남자도, 여자도 결국에는 모두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미세한 인간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시선의 끝에서 꼬이고 꼬인 이해관계는 더 이상 의미를 잃는다. 그저 비슷하게 웃고, 비슷하게 울고, 비슷하게 그리워하다가 인파에 섞여 퇴근하고, 비슷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비슷하게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개개인만이 있을 뿐이다. 사울 레이터의 투명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을 거치면 그들 일상 속의 별 볼 일 없는듯하던 소박함은 가장 편안한 아름다움으로 탈바꿈한다. 소확행(소소하면서도 확실한 행복)의 선구자가 아닐 수 없다.

 
 
There’s just too much. 다들 너무 과하다.

 
이번 주 화요일. 평소와 다름없이 시나리오를 쓰다가, 덮어버렸다. 내가 이 일이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회사랑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 만드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잘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나보다. 하여 그대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하필이면 ‘There’s just too much. 모두 너무 지나치다’라는 문장이 초반에 툭 튀어나왔다. 맞다, 나는 너무 지나쳤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안에서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투우 경기장의 황소 같은 기질이 있어서 일단 눈앞에 시뻘건 천이 팔락거리면 뒤도 안돌아보고 냅다 뛰어가는 편이다. 이제는 나의 이러한 성향을 잘 알기에 중간 중간 고삐를 당겨주며 왜 뛰고 있는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되짚어보는데 요즘은 그럴 심적 여유조차 없었나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또 다시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하여 모순적이지만 내 여러 가지 꿈 중 하나는 나만의 단단한 소신을 갖고 내적인 평온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꿈은 이루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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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나와 달리 사울 레이터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내적평온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책 전반에서는 여유와 평온이 묻어나온다. 정신없이 날뛰던 황소는 사울 레이터 덕에 잠시 한 숨 돌리고 몸을 눕힐 수 있었다. 사울 레이터는 자신의 여유가 몇 십 년 후 지구 반대편의 어떤 아이에게 휴식처가 되어줄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그가 이뤄낸 업적은 비단 사진뿐이 아니다.

 
 
이야기가 담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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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프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사진에 대해 정말 일자무식이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지금껏 아름아름 봐왔던 사진이란 것들과는 분명 차이점이 있었다. 그의 사진에는 한 편의 스토리가 담겨있다는 평은 괜한 말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사진이 담아낸 순간의 앞과 뒤를 상상하게 만든다. (나는 사진을 보고 나만의 제목을 지어보는 식으로 사진을 감상했다.) 그것은 아마 사울 레이터의 작품이 어떠한 의미도 담지 않은 흰 도화지의 모습을 띄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신기해진다. 어떻게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오로지 애정의 시선만을 보낼 수 있었을까. 한 명의 예술가이기 이전에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참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예술가다. 그것도 ‘소신 있는’ 예술가였다.


 
많은 사진가들이 컬러 사진을 얕보거나
가볍고 얄팍한 것으로 여길 때에도
나는 컬러 사진을 좋아했다.

p. 176


시대마다 선호되는 가치관은 분명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추앙되는 인재상은 근면성실의 승부욕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느리더라도 자신만의 소신을 가지고 차분히 나아가는 사람에게 인기가 몰리는 듯하다. 남들이 모두 흑백사진을 추켜세울 때에도 취향을 굽히지 않은 덕에 색의 선구자가 되고, 남들이 지구 반대편으로 출사를 나갈 때에도 묵묵히 소소한 일상을 담아낸 사울 레이터는 분명 부드러운 듯 단단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성향이 최근의 추세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의 포토 에세이가 지금, 2018년에 출판된 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언젠가는 다시 근면성실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에게 박수가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때가 되면 욕심 없이 삶을 살아냈던 사울 레이터의 이름은 대중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잊힐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점은, ‘소신’이라는 것은 그것을 품은 사람을 빛나게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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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는 예술가다. 그것도 ‘소신 있는’ 예술가였다. 모두가 화려함을 지향하던 그 세계의 한복판에서 홀로 차분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 1950년대의 사울 레이터의 모습이,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릿하게 잔상으로 남는 건 꺼지지 않는 그의 소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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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 All about Saul Leiter -


원제 : All about Saul Leiter

지은이 : 사울 레이터

옮긴이 : 조동섭

펴낸곳 : 도서출판 윌북

분야
사진집
사진 에세이

규격
148*210

쪽 수 : 312쪽

발행일
2018년 7월 31일

정가 : 20,000원

ISBN
979-11-5581-149-8 (03660)




문의
도서출판 윌북
031-955-3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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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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