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데서 온 ‘이야기’인고 : < 판소리 오셀로 >

글 입력 2018.09.0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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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없음’ 시대의 이야기꾼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우린 ‘얘기 없음’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옛 시대의 이야기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 구전에는 주로 조언, 지혜 같은 것들이 담겨 공동체의 기억을 전승했다는데, 요컨대 할머니가 이부자리에서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같은 것이겠다. 특히 이 이야기꾼은 중세 길드 체제에서 빛을 발했는데, 그건 방랑하는 자와 정주하는 자의 이야기가 한데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여행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집으로 가지고 돌아오는 먼 곳의 얘기와, 한곳에 정착하고 있는 사람이 익히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가 상호결합”하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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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쇄술이 발명되고 소설이 보급되면서, 이야기는 제자리를 잃기 시작한다. 이는 경험의 가치하락과 맥을 같이한다. 신문으로 인해 구전되는 ‘경험의 가치’가 곤두박질치면서 경험을 전승하는 이야기도 각광받지 못하게 됐다. 이때에 소설은 개인의 고독함을 반영하기 시작하는데, 벤야민은 어떤 전승도 받지 못했고, 전승해줄 것도 없는 고독한 개인이 소설의 산실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이야기꾼들의 무대가 논두렁이나 넓은 마당이었던 것에 비해, 소설가의 무대는 고립된 방이다.

벤야민은 이런 시대에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감소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곧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겠다. 누군가가 전해주는 조언, 지혜가 케케묵은 것들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조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공동체의 기억은 상실되고 문제적 개인들만이 남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 없음'의 시대다.

 
 
어데서 온 이야기인고

 
서론이 길었다. 벤야민의 논의를 빌려온 건, <판소리 오셀로>의 위치를 따져보기 위함이었다. 판소리란 것이 여러 사람의 입을 오가며 적층되어온 구비문학이거니와, 그 뿌리가 오롯이 ‘소리’에 있다는 점에서 벤야민적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현재 판소리는 인쇄술에 힘입어 세상에 남고, 이것이 당시적 의미의 조언과 지혜를 전달하는지에 관해서는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만. 어쨌든 한 사람의 이야기꾼이 ‘구전되던 이야기’를 전한다는 점에서, 판소리는 벤야민적 ‘이야기’의 면면을 숙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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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열 /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판소리 오셀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를 판소리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네 사람의 악공과 한 사람의 소리꾼을 내세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채택한다. 거기에 <오셀로>와 비슷한 사건이 담긴 신라시대 향가 <처용가>를 덧붙여 작품의 두께를 더한다. 이로 인해 동양의 <처용가>와 서양의 <오셀로>라는 구조가 극의 초반부터 설정되고, 이 서사는 여성화자 '단', 한 사람의 소리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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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열 /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하지만 원체 홍보 방향으로 내세웠던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 사이의 대비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구조는 텍스트 내에선 크게 의미화되지 못하는데, 단의 해설자적 참견이 적은 탓이 크다. 단은 <처용가>와 <오셀로>를 들려주는 것에 충실하다. 처용과 오셀로의 이방인적인 특징, 그들을 시기하는 자가 있었다는 공통점, 서로 다른 결말을 맞았다는 차이점은 분명히 짚지만, 이 비교를 하나의 줄기로 잡아 재해석하진 않는 거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사이의 확고한 의미를 잡고자 한다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테다. 애초에 중점은 ‘재해석’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위 그 자체에 있었으니 말이다.
 

 
이야기꾼, 박인혜

 
이 가운데 작품의 의미를 직조하는 건 소리꾼 박인혜의 존재다. 사실 단의 역할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서 그친 탓에, 극 중 이야기꾼은 '박인혜'라고 해도 크게 무리 없을 정도다. 공연을 보다보면, 단이 박인혜의 닉네임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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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열 /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박인혜라는 이야기꾼은 <처용가>와 <오셀로>를 능수능란하게 소리로 ‘전달한다.’ 두 이야기의 병치가 커다란 주제적 의미를 만드는 건 아니지만, 박인혜의 소리를 타고 이는 벤야민적 ‘이야기’를 떠오르게 만든다. 중세 길드 체제하에서 ‘멀리서 온 이야기’와 ‘이곳의 오랜 이야기’가 중첩되었듯, 서양 서사와 동양의 서사의 병치는 한 사람의 이야기꾼을 통해 모양새를 갖춘다.

더욱이 여성 화자의 소리로 <처용가>와 <오셀로>가 전달된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의 결은 다르게 다가온다. 오셀로의 정념에 가려지기 일쑤였던 데스데모나의 목소리는 박인혜의 소리를 통해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이야기꾼 박인혜의 ‘소리’는 텍스트를 현대적 시각으로 다시 읽어내고, 재구성하는 것은 많이 내려놨지만, 그 ‘들려줌 자체’만으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아마 소리꾼이 다른 이었다면, '이야기'는 역시 다르게 다가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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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열 /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록된 텍스트를 넓은 마당에서 전달해주는 소리꾼. 이 작업이 ‘얘기 없음’ 시대에서 사라진 이야기의 자취를 좇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특히 오셀로 이야기에서 교훈을 발견한 듯한 소리꾼의 첨언이 '조언'처럼 다가오니 말이다. 다소 거칠고 비약적인 생각일지도 모르나 (그리고 벤야민적 의미에서 한참 벗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박인혜 명창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게 그 옛날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공연정보



INTRODUCTION

공 연 명
2018 정동극장 창작ing 시리즈
<판소리 오셀로>

공연일정
2018년 8월 25일(토) ~ 9월22일(토)

공연시간
화-토 8시, 일 3시
(월 쉼. 9월7일-9월9일 공연없음)

공연장소
정동극장

관 람 료
R석 40,000원 / S석 30,000원

관람등급
8세 이상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

주최‧제작
(재) 정동극장

주관
(재) 정동극장. 희비쌍곡선



CREATIVE STAFFS

출 연

소리꾼 박인혜, 신유진
 
아쟁 김성근, 김범식 타악 정상화
가야금 심미령, 피리 오초롱

스 태 프

작·작사·연출 임영욱
음악감독·작창 박인혜, 작․편곡 유찬미

무대 박동우, 의상 김영진(차이킴), 조명 김건영,

음향 정새롬 소품 김이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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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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