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국 재벌 흑역사 - 삼성 [문화 전반]

기자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어야 한다.
글 입력 2018.09.0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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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 흑역사 - 이완배 저, 민중의 소리
 

이 글의 내용은 동아일보 사회부와 경제부를 거쳐 현재는 민중의 소리 경제담당 기자로 일하는 이완배의 저서 한국 재벌 흑역사를 원문으로 한다. 글의 대부분이 인용이자 재서술이기에 문제될시 삭제를 할 것이며 책의 순서에 따라 총 네 번에 걸쳐 삼성, 현대, 롯데, SK를 다룰 것이다. 이에 도움 주신 팟캐스트, 이상한 청년들의 고급진 상식 팀에게도 감사드린다.

국정농단과 박근혜 탄핵 이후 이재용의 판결은 집행유예였고 이제는 삼성의 180조 투자라는 명목 하에 그 불편부당한 오명을 지워나가려 하는 시점이다. 기업과 재벌의 공은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서술되어 있으나 그들의 과에 대한 역사는 부실하다는 저자에 공감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업과 재벌의 민낯을 알게 하기 위해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삼성의 흑역사는 이병철 – 이건희 – 이재용으로 이어오는 3대 세습에 관한 것이며 이들의 정경 유착, 비리 그리고 불법과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과오는 계속해서 반복 서술, 회자 되어야 한다. 더불어 이 글에선 개인의 성품에 대한 것보다 기업을 창업한 이후에 사건 위주로 말하므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책을 사서 읽거나 삼성그룹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담긴 책 ‘삼성을 말한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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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일가 3대 승계
이병철(좌), 이건희(중), 이재용(우)

 
삼성의 시작 – 이병철 
1910년 경남 의령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금수저 일본 대학 유학생활 마치고 술과 도박에 빠진다. 이후 1936년 아버지의 출자로 차린 협동 정미소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운수업과 땅 투기로 재기에 도전한다. 이병철을 미화하는 문헌에선 운수업으로 돈을 벌어 한 땅 투기를 사업적 전망을 기반으로 내린 결정이라 서술하나 이것은 당시 민중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투기였으며 일제의 수탈에 핍박받는 민중의 삶에 무관심했던 그의 모습이었다. 중일전쟁의 여파로 일제의 비상조치가 내려졌고 땅 값은 똥 값이 되었으며 그의 김해평야 투기는 실패로 그치고 만다. 이후 1938년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를 대구에 설립하여 과일과 건어물의 무역업을 하였고 이 수익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하에 있는 민중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국수 사업을 시작한다. 국수 사업의 성공을 바탕으로 전쟁중인 일제가 세금을 걷기 위해 대놓고 밀어주는 사업인 양조장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이를 통해 부호가 된 그는 조국이 해방되기 전까지 여자를 끼고 상다리가 무너질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의 회고록엔 “암담한 정세 속에서 찾아드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한 심정이 밤마다 발길을 주석으로 돌리게 했을 뿐이다.”라고 서술하나 독립 운동가와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삼성과 효성
일제 하에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그는 ‘사업보국’이라는 말을 만들어낸다.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사례는 하나도 없는 그가 만들어낸 것으로 "사업가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삼성물산공사를 1948년에 효성의 창업주 조홍제와 같이 동업으로 차렸으나 지분에 관하여 문제가 생겼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는 당시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을 경영하던 대부분의 경영자를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이 과정에서 탈세를 인정한 자는 이병철이었으나 사태의 책임을 지고 옥고를 치른 사람은 조홍제였고 지분 정리 절차에서도 당시 삼성 주력 계열사인 삼성물산, 제일모직, 제일제당 중 제일제당을 조홍제의 몫으로 돌리기로 했으나 이병철은 이를 파기하고 한국 타이어와 한일 나일론 두 회사를 가져가라며 기존의 합의를 뒤집었다. 6.10 만세 운동을 하며 옥고를 치르고 이병철과의 관계에서도 버림의 미학을 보여준 조홍제와는 다르게 그의 손주들은 삼성 가문의 자식들처럼 승계로 인한 집안 싸움을 이어나갔다.


삼분폭리 사건
1964년 2월 1일 경향신문은 삼분폭리 사건을 보도하고 그 주범을 삼성그룹으로 지목한다. 밀가루, 설탕, 시멘트를 부르는 삼분은 1962년 기록적 흉년과 더불어 1963년 태풍 셜리로 인해 186명의 사상자와 6만 2000명의 이재민을 내고 폭등한다. 태풍 셜리로 인한 피해액은 25억원 가량이었는데 밀가루 업체가 취한 폭리는 43억원, 설탕 업체가 취한 폭리는 25억원에 이르렀다. 제조업체가 앞장서 물가를 올리고 국민들의 사재기로 이어진 이 사건은 당시 설탕 시장의 60%이상 점유하고, 제분 시장에서도 2위를 다투는 제일 제당이 중심에 있었다. 당시 야당 삼민회의 발의로 문제가 되었으나 여당 공화당이 국회 조사를 막아내며 검찰은 당시 이 폭리 이익을 박정희 대선 자금으로 흘러들어 갔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검찰은 삼분업체에게 고작 몇 천 만원의 세금을 물리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고 삼성은 경향신문과 서로 소송을 걸며 싸웠으며 이병철은 당시 자신은 수요가 있기에 비싸게 판 시장경제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제일제당이 판매한 밀가루 중 4500톤은 정부가 국민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원조를 받아온 것이고 제일 제당 자체가 국민들이 받아야 할 선진국의 원조(18만 달러의 정부 특별 외화 대부)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이병철의 태도는 국민들에게 원조를 해도 모자란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카린 밀수사건
삼성정밀화학의 홈페이지 연혁을 보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그것은 바로 이 회사의 전신인 한국비료공업이 1966년 ‘한비 사건’ 혹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를 삼성 밖으로 밀어내었으며 고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는 대통령이 아니라 밀수 두목이다”라고 말하게 된 일로 1966년 5월 24일 이병철이 세운 한국비료 수입품 컨테이너 안에 사카린이 대량 발견된 일이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재계 은퇴를 선언했고 차남 이창희는 구속됐다. 경영권은 이맹희에게 넘어갔으나 청와대로 이병철의 비리 6개로 정리된 투서가 날아와 다시 이병철 – 이맹희의 대립으로 6개월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박정희는 쿠데타 당시 이병철의 숨통을 끊는대신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을 설립한 뒤 그에게 회장직을 맡겼고 한국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 비료공장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박정희가 이병철에게 한비를 세우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맹희에 의하면 박정희와 이병철 사이에 밀약이 있었고 일본 미쓰이로부터 100만 달러를 리베이트 받아 이를 박정희의 정치자금으로 쓰이게 했다. 현찰로 100만 달러를 들이는 것이 어려워 당시 금수품인 사카린 등을 밀수하였고 그 현장을 자신이 지휘했다고 한다. 투서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한국비료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했고 이병철은 이 투서를 이맹희가 썼다고 믿었으며 이맹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삼성 역사 밖으로 밀려나 이후 1993년 삼성그룹 계열 분리로 제일제당(CJ)를 아들 손에 쥐게 한다. 차남 이창희는 사건 이듬해인 1967년 징역 10년을 구형받았으나 기업인 구속 – 없던 병이 생김 – 병 보석으로 출감을 거친 뒤 1991년 혈액암으로 사망한다.


용인자연농원
1976년 4월 17일 용인자연농원이 문을 연다. 당시 국민들에게는 동물원과 놀이기구 탑승이 한 곳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는데 용인자연농원의 입장료는 성인 600원 어린이 300원으로 어린이대공원의 요금의 3배였다. 자연농원의 사파리 관람료는 어른 500원, 어린이 300원으로 추가 책정했으며 주요 놀이시설에도 추가 요금이 붙었다. 당시 구로공단 여공의 하루 일당이 600원이었고 당시 이병철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는 돈지랄을 한다는 의미의 돈병철이었고 그 돈으로 국가 기간산업을 지은 것도 아니기에 자신의 별장이 있는 용인 야산에 놀이공원을 만든 것은 좋은 평을 받을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 이 별장의 부지는 대지 1만 5000평, 건평 120평으로 알려졌는데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섰을 당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주택과 함께 다른 재산 일부를 기부했다. 그러나 그 재산 기부처가 바로 삼성문화재단이었고 기부 이후 이병철은 다시 삼성문화재단과 5100만원에 저택에 대한 전세계약을 맺어 삼성문화재단이 이 저택에 대한 재산세 등 모든 세금을 냈다. 자신은 세금을 내지도 않고 편하게 살면서 거짓 ‘기부’를 한 셈이다. 또한 자연농원의 450만평중 중앙개발이라는 삼성 계열사는 38만평만 갖고 있었고 나머지 땅은 이건희 172만 8,100평이었고 그 외에는 조금씩 삼성가에게 돌아갔다. 이병철 개인이 구매 해 이건희에게 증여를 한 것이고, 용인자연농원 개장 1년 반전에 조세감면규제법이 개정되어 이 둘은 상속세와 증여세도 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당시 세간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이병철은 본인이 직접 땅을 사지 않고 용인군수, 경찰서장, 면장, 농협조합장 등 지역 유지와 군수 등 관내 기관장을 동원해 국민들로부터 나라 산업이라는 명목하에 순순히 땅을 가져간 것을 알 수 있다.





이건희의 삼성 자동차 몰락
이건희의 자동차 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의 사망 이후 약 열흘 뒤 12월 1일 이건희는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른다. 안정적이고 고정 수입이 있는 사업을 추구했던 이병철과는 달리 이건희는 그 해가 넘어가기 전 승용차 사업 진출 방안 수립을 지시한다. 당시 현대차와 기아차 그리고 대우차 3개 브랜드가 한국에서 경쟁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자동차 브랜드의 필요성은 의심쩍었지만 1995년 3월 삼성자동차가 공식 출범한다. 3년 뒤 삼성은 첫 자동차 SM5를 선보였으나 마침 IMF가 절정인 1998년 2월이었고 이로 인해 김대중 정부의 빅딜, 재벌들 간 비주력사업 맞교환 대상에 포함되어 퇴출 되었다. 삼성차의 부채는 4조 3000억에 이르렀고 삼성차 빅딜 대상인 대우는 이 문제를 책임질 여력이 없었다. 결국 1999년 7월 1일 이건희는 삼성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그 대신 부채 4조원을 삼성생명 400만 주와 계열사들이 1조 2000억원을 부담하기로 했다. 삼성은 이건희의 삼성생명을 주식 주당 70만 원으로 계산해 400만 주의 가치를 2조 8000억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건희는 1999년 초까지만 해도 삼성생명의 주식을 10%만 갖고 있었는데 법정 관리를 신청한 7월 1일 26%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삼성생명은 비상장주였고 이건희는 300만 주에 가까운 비상장 주식을 퇴임 임원들로부터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주식이 원래 이병철의 것이었고 삼성 임원들에게 차명 주주로 등록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차치하더라도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건희의 매입단가였다. 1999년만 해도 비상장 주식 거래에 대한 명확한 규제가 없어서 이건희의 매입단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삼성자동차가 법정 관리를 신청하기 1년 전 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주식 340만 주를 매입했는데 이 당시 매입 단가가 9000원이었다. 이건희가 얼마에 사들였는지는 몰라도 오너인 그가 9000원보다 비싸게 샀을지는 의문이며 이에 대해 삼성은 삼성생명이 실제 상장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가치를 계산해서 나온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따르는 문제는 3,4개월전 주당 70만 원짜리 주식을 주당 9,000원에 사들였다면 2조 1천억원을 270억 이라는 헐값에 매입한 것이고 이에 대한 증여세 1조원을 내야한다. 그러나 이건희는 이것에 대해 증여세를 냈다는 말이 없다. 이건희의 삼성생명 400만 주의 출처도 알려지지 않았고 이건희의 사고는 그룹 전체와 대한민국 사회가 나눠 짊어지게 된 꼴이다.


대한민국을 관리하는 삼성
놀랍게도 삼성에는 대한민국에 힘이 있거나 힘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에 개인 정보가 담긴 문건이 존재한다. 삼성이 이를 통해 인재 관리를 한다는 것은 2005년 안기부(현 국정원)의 X파일 녹취록이 공개됐을 때다. 故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공개한 X파일에 따르면 녹취가 진행됐던 시절 중앙일보 사장이던 홍석현은 “회장께서 지시하신 거니까”라는 명목으로 명절 때마다 일부 검사들에게 떡값을 돌렸다. 故노회찬이 공개한 검사들의 명단에는 최경원, 김두희 전 법무부 장관, 안강민 전 대검 중수부장, 김진환 전 서울지검장, 홍석조 전 감찰국장, 한부환 전 법무부차관이 있었고 법무부 차관 김상희는 명단 공개와 더불어 이들과 비교해 떡값 레벨 중 낮은 취급을 당해 이중 망신을 당했다. 김용철 변호사가 공개한 <회장 지시 사항>이라는 문건에는 이건희가 직접 지시한 로비 지침 및 내용들이 담겨 있었으며 정, 관계 인사들뿐 아니라 기자들, 시민 단체에 대한 개인 정보가 삼성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건희의 지시는 참여 연대 같은 NGO 단체에 삼성에 해를 입히는 부분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 몇 십억 정도 지원해보면 어떤지 검토할 것, 한겨레쪽에 다른 신문사의 기사를 보여주며 광고를 조정하는 것을 검토할 것, LG가 해외에서 덤핑을 일삼는데 국가적 손해고 전부 망할 수 있다는 여론을 만들어 볼 것, 경제담당 기자가 교수를 시켜 비교해 홍보하고 이게 얼마나 손해인지 여론을 조성해 볼 것 등이 존재한다.


삼성 X파일과 비자금
1965년에 창간한 중앙일보는 여전히 사주에 대한 보호 본능이 강한 신문으로 평가받는데 그 이유를 이병철의 중앙일보 창간 이유와 이건희가 주도한 개혁에서 알 수 있다. 이병철이 돈이 되는 사입어 아닌 신문을 창간한 이유는 5.16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절감한 ‘권력의 막강한 위력’ 탓으로 해석한다. 정치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방식으로 언론사를 설립한 것이고 삼성의 기관지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다. 언제나 삼성의 잘못을 작게 보도하는 것은 숱하게 많았고 삼성과 완전한 분리를 주장한 이후 발생한 삼성중공업 예인선 충돌이 원인인 2007년 태안 기름 유출사고에 대해서도 중앙일보는 원인과 책임에 관한 보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중앙일보의 1세대 회장은 홍진기로 1940년 고등 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법조인이 되었고 194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가 됐다. 명백한 친일 관료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대사전>에 이름을 올리고 이승만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으로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경향신문을 폐간시킨다. 4.19 혁명이 성공하고 서울에서 발포를 명령한 사람이 홍진기임이 밝혀져 1960년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사법정도 사형을 선고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항소심에 무기형으로 감형 받고 6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다. 이에 이병철의 도움이 확실했음이 보이며 이건희를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시킨다. 이후 홍진기의 아들 홍석현이 1994년 중앙일보 대표이사 자리에 선임되며 이건희의 자금줄과 함께 동아일보를 제치고 보수 언론으로 자리 잡는다. 2005년 MBC 이상호 기자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도청 내용을 담은 90 분짜리 테이프를 입수해 폭로한 사건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졌고 이회창 후보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X파일은 안기부가 ‘미림 특별 수사팀’이라는 이름으로 1994년 6월부터 3년 반 동안 무려 1000여 개의 불법도청 테이프를 만든 것이고 도청 대상은 여야 최고 정치인과 더불어 언론사주, 보안사령관, 참모총장 등이 망라돼 있었다. 이회성(이회창의 동생)은 홍석현과 삼성으로부터 60억원을 받은 사실을 말했으나 황교안(당시 서울지검 2차장, 박근혜 정부 세 번째 국무총리)의 봐주기 수사로 허무히 끝나 버린다. 이후 2002년 대선자금에 삼성 비자금이 들어갔다는 의혹이 있었고 2003년 검찰 조사에서 삼성이 이회창 후보 측에 340억 원을 불법 지원한 것으로 밝혀냈으나 검찰은 이 돈이 비자금에서 제공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수사를 접는다. “이미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처벌 받은 바 있어 한나라당 고위 간부가 사용한 13억원에 대해서도 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이며 특검은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재용과 박근혜 그리고 최순실
이재용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60억을 대한민국의 미진한 세법을 이용하여 9조원의 자산가가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재용 때문에 비상장기업을 이용해 주식을 저가에 사고파는 일과 전환사채, 신주인수권부사채 등의 저가 발행을 통해 편법으로 부를 증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에버랜드 편법 증여를 통해 이재용에게 삼성을 물려주려했던 이건희와 삼성은 2013년부터 3세 승계에 가속도를 낸다. 에버랜드는 제일모직의 패션 사업 부문을 인수해 제일모직이 되고 이재용이 최대 주주로 있던 삼성 SDS로 상장해 상장 차익을 노렸다. 그러나 삼성전자라는 마지막 산이 남아 있었고 이건희는 이재용이 삼성전자에 대한 영향력을 갖기 전 죽을 수도 없는 운명에 놓였다. 이건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3.38%, 이재용은 0.57%였고 삼성전자를 제대로 물려받으려면 막대한 증여세와 막대한 지분 매입 자금이 필요한데 이재용에게는 그 돈이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그 유명한 ‘삼성엔터패션컨스트럭션인터내셔널’이라는 에버랜드, 제일모직, 삼성물산의 합병 기업이다. 이 말도 안되는 회사는 사실 삼성물산이 공교롭게도 삼성전자의 지분을 4.1%를 갖고 있었기에 시가 8조에 해당하는 이 지분을 갖기 위해 이재용이 합병 발표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앨리엇매니지먼트라는 벌쳐펀드(파산한 기업이나 경영 위기에 처한 기업을 싼값에 인수하여 경영을 정상화시킨 후 비싼 값으로 되팔아 단기간에 고수익을 올리는 자금의 일종)에게 덜미가 잡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은 난항을 겪는다. 앨리엇은 삼성물산의 지분을 7%를 끌어올려 이 두 회사 합병의 부당함을 알렸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자산 규모는 세 배나 차이가 나는데 삼성물산의 3주가 제일모직 1주의 가치와 같은 가치라는 것이 그 문제였다.

이재용의 편법 증여와 승계에 대한 안좋은 여론이 돌았고 합병은 7월 17일 주주총회에서 판가름 나게 되었다. 합병 가결을 위해 참석 의결권 주식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찬성표를 얻어야하는 삼성물산은 같은 재벌 가문인 KCC에게 SOS를 보냈고 KCC는 장외거래를 통해 5.76% 주식을 사들이며 도와준다. 전국 약 100여 개 신문 1면과 주요면에 광고까지 내면서 삼성은 애국심에 호소하였고 네이버와 다음, 증권방송과 종편채널에도 비슷한 광고를 쏟아냈다. 이 합병의 행보를 가른 것은 삼성물산의 지분 11.21%를 들고 있던 국민 연금이었다. 국가나 공공기관이 운용하는 공적자금인 연기금은 세계 의결권 자문사들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방대한 반박자료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세계 의결권 자문 시장 1,2위의 의견은 모두 합병 반대인 것에 비해 국민연금은 평소 개최하던 외무 전문회의(주식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마저 생략하고 비밀리에 찬성 입장을 정했다. 이재용의 삼성은 출범했고 놀이동산과 건설회사라는 웃긴 조합의 회사가 합병되었으며 합병 이후 삼성물산의 주가는 20%가까이 폭락했다.

이재용은 이후 박영수 특별검사 임명되면서 구속되었지만 1심 판사 김진동은 특검의 구형 12년을 5년으로 줄였고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과정이 이재용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삼성 그룹에도 이익이 있다는 비상식적 판단을 내렸고 이재용이 낸 것은 수동적 뇌물이라는 모순적 표현을 이용했다. 2심 판사 정형식은 항소심 선고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여 이재용은 풀려났다. 그는 삼성의 승계 작업이라는 포괄적 현안이 존재했다고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승계 작업을 위한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도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1심에 이어 수동적 뇌물도 활용하며 이재용이 직접 만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문형표, 홍완선 전 기금 운용본부장의 합병 찬성도 이재용과 상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수동적 뇌물은 말 그대로 박 대통령의 겁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준 돈이 되어버렸고 청탁을 한 일이 없으니 뇌물을 바쳐 얻은 이익도 없게 된 것이니 말이다.


그 외
CJ 그룹 회장 이재현의 비자금, 이병철의 막내딸 이명희의 신세계 백화점의 무노조 경영, 이명박의 이건희 원 포인트 1인 사면 등 우리 사회에서 삼성 일가가 영향력을 행사한 점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삼성의 역사는 정, 관계, 법조계 인사들이 삼성가와 재벌가와 결탁한 카르텔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의 특별검사 조준웅은 이건희 등 관련자를 모조리 불구속기소하여 면죄부를 주었고 조준웅의 아들은 10여년 사법고시를 낙방하고 직장 경험이 전무한 상태로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한다. 우리 사회는 삼성의 그늘 아래 삼성공화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으며 혹시 떨어질 떡고물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촛불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보여준 탄핵과 구속은 계속될 것이며 우리에게 새겨진 성공의 기억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멈추지 않는 희망이 될 것이다.


[김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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