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고전 듣는 시간, '판소리 오셀로' [공연]

재해석은 아쉽지만 동서양의 만남이 매력적인 극 '판소리 오셀로'를 만나다
글 입력 2018.09.0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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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운치를 더해주던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극장에서 공연 중인 '판소리 오셀로'를 보러 갔다. 개량 한복을 차려입은 직원들의 친절한 인사를 받으며 공연장에 도착해 티켓에 적힌 자리를 찾아 착석한 후, 무대를 바라봤다. 저 뒤에 고수를 포함한 네 명의 악사가 보이고, 그 앞에 놓인 작고 네모난 방 한 켠이 예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장 편한 자세로 고쳐앉으며 무대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는데, 정적을 깨는 탁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 하나가 귀에 꽂혔다. 어느 악사가 말하는 건가 목을 쭉 빼고 앞을 살피는 관객들에게 "나 여기 있소"하며 관객석 뒤편에서 등장하는 소리꾼의 카리스마 넘치는 여유로 극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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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열 /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는 아주 먼 데서 온 이야기.
그대 슬프고 잔인한 이야기 속 불쌍한 사람들아...


소리꾼은 신라 '처용'과 역신의 이야기를 읊고 나서, 거울에 비추어보면 사물이 거꾸로 되듯이 결말이 반대된 서양의 이야기도 있다며 셰익스피어의 고전 '오셀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처용과 오셀로는 낯선 생김새의 타지인이면서도 공을 세워 어느 정도의 위세를 떨치고 훌륭한 아내를 맞이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아내의 외도라는 사건에 대처하는 일에 있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소리꾼은 관객과 소통하는 판소리 특유의 여유와 고수의 추임새를 타고 관객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현란한 솜씨로 오셀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셀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등 여러 인물을 넘나들며 극한의 분노, 슬픔, 처절함을 모두 보여주는 소리꾼 박인혜의 성별과 신분을 넘나드는 일인다역 연기는 관객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극에 몰입할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오셀로 시놉시스

이탈리아 베네치아, 그리고 키프로스 섬에서 벌어진 이야기. 베네치아의 유능하고 명망 높은 장군, 오셀로. 그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늘 부관이 되기를 원하는 이아고는 부관 캐시오에게 앙심을 품고, 오셀로에게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와 부관 캐시오가 밀회를 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결국 이아고의 꾐에 넘어가 배신당했다고 굳게 믿었던 오셀로는 질투에 눈이 멀어 데스데모나를 죽인다. 결국 모든 것이 모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오셀로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훌륭한 장수였던 오셀로가 자신과 캐시오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이아고의 음모와 간계로 인해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마치 운명의 신이 장난질을 쳐놓은 듯 오셀로의 의심에 불을 지피는 여러 상황이 벌어지자 오셀로는 데스데모나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굳게 믿는다. 그에 괴로워하면서도, 복수를 하겠다며 아내를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오셀로의 모습은 그 다양한 감정의 폭을 표현해내는 소리꾼의 재주를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작품으로 '오셀로'가 제격이라는 생각을 관객에게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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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열 /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그러나 이 훌륭한 고전 '오셀로'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판소리화에는 내가 기대했던 '재해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성 배우가 홀로 여러 인물을 표현해내는 작품이지만, 작품의 포스터나 홍보에 쓰인 '여성의 눈으로 재해석한 오셀로'를 기대하고 온 나와 같은 관객에게는 계속 머릿속에 물음표를 안고 가야 하는 작품이 되고 만 것이다. 이아고의 간계로 아내 데스데모나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게 된 오셀로가 아내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극의 절정 부분, 사실이 아닌 것을 믿어버린 오셀로의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극의 흐름은 나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어긋난 교훈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럼 바람피운 여자는 가만히 맞아 죽어야 되나요?"


얼마 전 본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바람피운 아내를 무차별하게 폭행하던 남편을 찔러 죽인 여성에 대한 재판이 한 에피소드로 등장했다. 평소 잦은 바람과 폭행을 일삼던 남편은 아내가 바람을 핀 것을 알게 되자 평소보다도 더욱 무자비하게 아내를 발로 차며 폭행했다. 아내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옆에 있던 칼로 남편을 찔러 그를 살해한다. 과연 이 여성은 정당방위인가, 남편을 죽였으니 더욱 엄벌에 처해야 하는가? 정당방위를 적용해 형벌을 감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인공은 바람피운 여자라고 때리는 걸 그저 맞고만 있어야 하냐고 묻는다.

'오셀로'에서 갖게 되는 의문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이야기에서 오셀로의 아내 데스데모나는 물론 바람을 피지 않은 정숙한 여인이다. 때문에 오셀로는 진실을 알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스스로 자결을 택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대에 쉽게 납득되지 않는 전제가 하나 깔려 있다. 만일 데스데모나가 정말로 바람을 피웠다면, 오셀로는 아내를 죽여도 되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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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열 /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페미니즘적 시각이 부재하다고 해서 그 작품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이 오래도록 이야기되고 사랑받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비록 현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불편한 요소들이 있기도 하지만, 당시의 배경을 고려하면 납득 못 할 것도 없다. 또한 모든 이야기의 최종 도달 지점이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 일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한다. 페미니즘적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 있는 만큼, 그 외에 다른 여러 가치를 이야기하는 작품들도 다채롭게 존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 전통인 판소리로 서양의 고전을 풀어낸다는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와 훌륭한 소리꾼의 재주를 강조하면 되었을 것을 굳이 있지도 않은 '여성의 목소리로 재해석'한다는 홍보 문구를 더해 도리어 오셀로 이야기 자체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먹지 않아도 되었을 욕을 먹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때문에 혹여 오셀로의 획기적 변형을 기대했다면 돌아가시고, 오셀로와 판소리의 획기적 만남을 기대한다면 정동극장을 찾아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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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오셀로
- 2018 정동극장 창작ing 첫 번째 -


일자 : 2018.08.25(토) ~ 09.22(토)
 
*
09.07(금) ~ 09.09(일)
공연없음

시간
화-토 8시
일 3시
월 쉼

장소 : 정동극장

티켓가격
R석 40,000원
S석 30,000원

주최/제작
(재)정동극장

주관
(재)정동극장, 희비쌍곡선

관람연령
8세이상 관람가능

공연시간 : 80분




문의
(재)정동극장
02-751-1500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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