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 죽음 그리고 실존

연극 이방인 리뷰
글 입력 2018.09.0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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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삶과 죽음으로 마주한 실존

Review 민현



삶과 죽음


Q. 삶과 죽음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무대에 관이 놓여 있었다. 지인의 부고를 듣자마자 이곳을 찾아서인지 그 관을 덮는 천은 새까맣게 하얀색이었다. 한기가 돌 정도로 극장 내부는 쌀쌀했고 무대를 둘러친 원형의 구조물도 차가워 보였다. 극이 시작되고 무대만큼 차가워보이는 주인공 뫼르소가 익숙한 첫 대사로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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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었다.”


그 대사를 듣자마자 ‘이방인’이라는 극을 끌고가는 주체는 뫼르소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아랍인의 죽음으로 절정에 이르고, 결국 주인공 뫼르소의 죽음을 바라보며 끝난다. 연극을 보기 전에는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감싸고 있었다면, 연극을 보는 와중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만이 따라다녔다. 사실 이전 프리뷰에서 던졌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질문은 죽음에 대한 물음과 같기도 하다. 새까맣게 하얀 천처럼 결국 삶과 죽음은 등을 맞대고 손을 맞잡은 모습이라는 게 느껴졌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사형선고를 받는다고 극 후반부의 신부는 말한다. 그 선고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엔 신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뫼르소를 몰아 붙인다. 뫼르소는 죽음 앞에서 신에게 귀의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다. 삶과 죽음에 대해 이렇게 뒤죽박죽인 생각을 하며 더 어렵게만 느껴지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바로 그렇게 뫼르소가 알아내고 싶어했던 ‘존재’에 대하여.



이방인, 죽음 앞의 존재


Q. 삶과 죽음 앞에 자신의 존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가장 와닿는 대목은 법정이다. 뫼르소는 타인들이 자신을 이방인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에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에게 말할 기회가 부여된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도 자기 자신을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존재가 이방인에 지나지 않음을 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독백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던 뫼르소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법정에 앉아있는 모습은 대비를 이루어 ‘이방인’이라는 존재를 더 부각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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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세상이 모두 내 얘기를 하지만,
나를 빼놓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할 얘기가 없었다.”


피고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할 얘기가 없다고 말한다. 사실 법정이 아니라 그 어디에 있더라도 뫼르소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법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뫼르소는 극을 벗어나 관객석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대신 우리가 그를 따라 극으로 들어가 관객이 아닌 배심원이 되어 뫼르소의 재판을 지켜본다.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검사는 질문을 던진다.


Q. 그렇다면 뫼르소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그 신선한 구성이 주는 몰입감에 나는 배심원이 되어 차가운 시선으로 뫼르소를 바라보았다. 뫼르소에게 주어진 판결은 그 인간의 행위에 대한 판결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를 마음 속에서 죽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을 때는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검사는 주장했다.

스스로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 나는 그가 왜 이방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아쉽게도 그가 이방인이 되었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내가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에 대해 고민할 때 이 책은, 이 연극은 대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 해답은 보통 주인공의 어린 시절, 자라온 환경, 주변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도무지 ‘이방인’에서는 어떤 맥락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소설과 연극이 하는대로 그의 내면을 파고들어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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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나는 법정에서 조금 벗어나 평가를 하고싶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뫼르소에게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할 얘기가 없었던 것처럼, 그에게는 마땅히 살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분명 그에게 “뫼르소, 왜 살아가고 있어?”라고 묻는다면 “딱히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라고 차갑게 대답할 게 뻔하다. 마땅히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살고 있었던 뫼르소라는 사람 앞에, 정말 죽음이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존재, 실존에 대해 느꼈던 것 같다. ‘나’를 인식하고 지속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뫼르소에게 판결을 내린다. 결국 모든 사람들의 삶 반대편엔 죽음이, 죽음 반대편에 삶이 있다. 다만 뫼르소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할 이 명제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사람은, 이 세계에선 다른 어떤 것에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 ‘죽음’이라는 판결을 내린 건 어쩌면 그가 윤리적으로 어긋나거나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이 세계의 이방인에게 죽음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결국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드디어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뫼르소의 마지막 대사가 어쩐지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미지 출처 : 산울림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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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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