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글쓰기에 대한 단상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9.0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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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단상


꽃이 피어있었다.jpg
 

시골집으로 내려간 지 일주일이 흘렀다.

멍하니 흘려 보낸 날들이 지나고
작열하던 태양이 한 풀 꺾일 무렵에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꽃이 
피어있었다.

마른 장작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한 때 푸른 빛 뽐내던 작약이 자리했던 곳은

한동안 아무것도 없던 그 자리에
꽃이
피어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서 조용히.

세상엔 생생한 것들이 넘쳐난다.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거저 주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가끔씩
마법처럼
이들이 나를
찾아오길 바란다.

문득 혼자서 조용히 피어난 꽃을 발견한
그 순간처럼.

*

문득 시골집 마당에서 꽃을 본 순간이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피어있던 꽃을 발견한 그 순간의 감정을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평소라면 단번에 에세이처럼 쭉쭉 그 순간과 꽃을 묘사하며 장황하게 글을 이어나갔을 테지만, 한창 평소에 비해 글을 자주 쓰던 시기여서 인지 다른 갈래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방식이 ‘소설처럼’이었다. 물론 절대 소설은 아니었다. 애초에 새로운 새계를 창조하는 글을 제대로 써본 경험도 없었을뿐더러 창작과 비평은 매번 다르다고 밥 먹듯이 이야기를 하던 나였기에 감히 소설이라는 말은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저 글감을 가지고 처음 쓴 초고를 (소설을 쓰는) 친구에게 처음 보여준 결과, 한 마디로 대차게 까였다. 정확히는 내가 썼던 초고를 이모저모 짚으면서 세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정말 놀랍게도 내가 글을 쓰면서 했던 생각들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초고에는 강아지 ‘희망’이가 존재하는데, 강아지의 이름과 희망이란 단어를 억지로 동일시 하여 연결 지은 점이 작위적이라거나, 문체가 수사가 많은 만연체가 집중을 떨어트린 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친구의 조언을 듣고 내 초고를 다시 보니 임팩트를 줘야 할 ‘꽃이 피어있었다’ 부분 앞에 너무 장황한 수사가 자리하고 있어 중심 문장이 가려져 버렸고, 실제 우리집 강아지의 이름이 ‘희망’이나, 이 사실 역시 꽃의 의미를 퇴색시켜버리는 듯했다. 결국 앞부분을 확 줄이고, 강아지의 존재를 빼고 나서야 저 습작 아닌 습작을 여러 채널에 올릴 수 있었다.



글은 무엇일까

이 과정을 거치며 친구와 ‘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취미를 ‘글쓰기’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글’은 나에게 친구이자 스트레스 조절 도구이기도 하고,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내가 쓰는 글들은 대부분과 비평이나 에세이 형식이고 대부분 내가 자유롭게 쓰기에 특정한 양식이나 방향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자유롭다. 좋게 말하면 장점이고 나쁘게 말하면 단점인 자유로움이 내 글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성격의 글쓰기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걸 실감했다. 특히 친구는 나와 결이 다른, 다른 갈래의 글을 써 내기에 수사와 기법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작위적인 표현을 걸러내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소설의 특성 상, 하나의 콘텐츠를 매개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에세이나, 비평과는 확실히 다른 성향을 보이는 듯 했다. 이런 갈래의 차이 외에도 서로 주로 쓰는 글의 성격에 따라 글을 쓰는 방식도 달랐다.

예를 들어 이 친구는 감상을 위한 글을 쓸 때, 글 자체에 감정을 쏟아낸다면 반면, 나는 감상 직후 떠오르는 것들을 자유롭게 적되 그 안에서 새로운 주제를 뽑아내려고 한다. A영화를 보고 난 직후, 모든 연상들을 기록하되 이 소스들을 약간 묵힌 후, 이들을 현실과 연결 시킬 만한 계기를 찾아내는 식이다. 나 역시도 처음엔 리뷰나 감상글을 쓸 때 친구처럼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했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보다는 하나의 단일하고 통일된 주제로 새로운 글을 만들어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작품을 계기로 삼되, 그 자체가 또 다른 콘텐츠가 될 수 있도록. 서로 쓰는 글의 종류에 따라 확실히 접근법이 달라진다는 걸 몸소 느끼며 오랜만에 고등학생 시절 독서토론을 하는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무용하지만 풍부한 것들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졌다.



글쓰기의 진정성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한동안 ‘글’이라는 게 뭘까, 계속 고민했던 것 같다. 글쓰기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글을 쓰는 태도는 어떠한 지 등등.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의 글쓰기는 자유롭다’는 사실이었는데,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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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이치의 말대로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일단 매일 시간을 정한다. 한 시간 정도라면 가장 좋겠고, 삼십 분이라도 상관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기억해. 뭔가 쓰는 순간, 넌 작가가 되는 거야.”).

(중략)

그러다가 번쩍하면서 그 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 알아차리는 바로 그 순간, 노트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쓴다기보다는 받아 적는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 받아쓰는 것이니 순서나 논리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언뜻 보기에 그 물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생각이라도 떠오르는 건 모두 노트에 적는다. 쉬지 말고 계속 적는다. 문법 같은 건 맞지 않아도 상관없으며 진부한 표현도 가리지 않는다(“질보다는 양이야. 모든 재능이 그렇듯이.”) 하루에 최소한 세 페이지는 반드시 채워야만 하며, 더 쓰고 싶다면 얼마든지 더 써도 된다. 만약 정해진 시간에 세 페이지를 채우지 못했다면 그날 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충분히 썼다는 생각이 들면 노트는 덮은 뒤, 지정된 장소에 둔다. 한번 쓴 글은 다시 펼쳐서 읽지 않는다. (“말하자면 숙성과정이 필요한 거야.”)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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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정 시간 달리기와 수영으로 몸을 만드는 그의 루틴은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하루에 다섯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200자 원고지 20매를 쓴답니다. ‘아, 오늘은 글이 잘 풀리니까 사흘 치를 써볼까?’ 하는 일은 없답니다. 그런 생각은 곧 ‘아, 오늘은 글이 안 풀리니까 하루 쉴까? 지난 번에 사흘 치를 썼으니까, 뭐’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거든요. 중요한 것은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20매씩 꼬박꼬박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한 달에 600매, 반년이면 3,600매를 쓰게 됩니다. 그의 또 다른 소설 《해변의 카프카》 초고가 3,600매였답니다.

- 김민식, 『매일 아침 써봤니?』 中



꾸준히.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글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절대 원칙,
‘꾸준히’.


나는 이 원칙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매 순간 발견한다. 사실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나의 자유로운 글 역시 ‘꾸준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어찌되었든 중학생부터 ‘리뷰’라는 카테고리의 글을 계속 써오고 있긴 하니까. 문제는 이 관점의 주기가 짧아질 때다. 나는 많은 이들-글을 진지하게 다루는 이들-이 매일, 매번 같은 시간에, 매번 같은 분량을 써 내려간다는 걸 안다. 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들도, 매번 완벽하진 않지만 달성하려 노력하는 이들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정말 취미로, 내키는 순간, 그 날의 기분에 따라 글을 쓴다. 꾸준함의 원칙을 모르는 바 아니고, 글에 대한 욕심도 있는 편이지만, 무엇이 두려운 지 내 글쓰기는 늘 이 단계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글쓰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또 일이 되어버리는 건 싫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좋아하는 일이 돈과 얽히기 시작하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고, 가장 좋아하던 일로 먹고 살던 사람이 직업을 잃었을 때는 돌아갈 곳이 없다고. 딱히 나는 그런 딱 떨어지는 구분을 선호하진 않지만,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직업 자체를 하나로 한정시키지 않는 사람이기에 더 어려운 것 같다. 양질의 글을 생산할 것이냐, 글쓰기 자체에 대한 애정을 남길 것이냐의 문제인 셈인데 나는 그냥 지금 이 상태로 있고 싶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굳이 속단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냥 여러 시도를 해보며 좀 더 생각해보고 싶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시작하며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 이걸 했어야 하고, 저걸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모두 다 정답 없는 주관식 문항이라 너무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글은 계속 쓰고 싶다는 거다. 그게 업의 형태든, 취미의 형태든, 지금은 그런 형태에 관계없이 글을 쓰고 싶다. 명확해질 날이 언젠가는 오질 않을까 하며 글을 마친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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