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초대 받지 않은 밤손님 물리치기 [도서]

글 입력 2018.09.0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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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
백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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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밤에 잠을 잘 못 잔다. 새벽 시간대에 깨어 있다보니 감성적인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서 자연스레 요새 올린 블로그의 글 초고는 대부분 새벽 시간대에 쓰게 되고 한 이주 가까이는 이 시간대에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고 있다. 주제는 주로 자기 내면, 감정에 대한 거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현재 핫한 베스트셀러다. 기분부전장애, 2년 이상 경도의 우울감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진단이라고 했다. 작가는 기분부전장애를 꽤 길게 앓았고, 자신과 맞는 병원을 찾아 주기적으로 상담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전보다는 좋아졌다고 하지만, 사실 정신과라고 하면 여전히 부정적인 시선이 남아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거나, 자신의 마음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작가는 그래서 자신이 먼저 자신의 마음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세상에 꺼내보기로 했다. 블로그에 자신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책의 출간과 지금의 인기로 이어졌다. 결국 이 책의 인기 역시 현대인의 마음에 만연한 우울감이라는 놈의 커다란 영향력을 반증하는 셈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했던가. 생각보다 이 놈은 자주,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문득 문득 찾아온다. 괜찮아졌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고, 사라졌다 싶으면 또 나타나는 그런 존재다. 10년이 넘게 이런 사이클을 반복했다는 작가에겐 우울감이 아주 익숙하며서도 웬수같은 그런 묘한 존재이지 않을까.  아무튼 나 역시 새벽녘에 이 놈이 찾아온 김에 어떻게 이 웬수같은 녀석을 돌려보낼까 고민하다가 이 책을 다시 폈다. 부록의 글들을 필사할 순간이 바로 지금이구나 싶었다.

손으로 하는 필사면 더없이 좋고 낭만적이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 손으로 필사를 조금 하다가 펜을 놓아버리고 키보드를 잡았다. 아래부터는 책에 삽입된 부록 에세이들 중 내 마음을 끌어당긴 구절들이다. 마음같아선 블로그에다가도 전문을 다 올리고 싶을만큼 좋은 문장들이지만, 저작권이 명백한 문장들이기도 하기에 따로 필사한 부분들 중 일부만 인용해본다.



시선을 옮겨야 해 (p.167-168)


자의식 과잉이 나를 덮칠 때마다, 나의 불만과 슬픔, 짜증, 두려움이 내 행동을 짓누를 때마다 생각한다. 시선을 옮겨야 해.

오직 나를 향한 ‘좋게좋게’와 오직 나를 향한 싸움은 결국 나를 편안하게 만들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동기와 시도가 나에게로 집중되는 게 얼마나 복잡한 피곤함을 가져다 주는지.

시선을 옮기자. 나에게서 타인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편안함에서 불편함으로. 다수에서 소수로. 쓸모있지만 나를 녹슬게하는 것들에서 무용하더라도 나를 아름답게 하는 것들로.

시선을 옮기면 삶의 구석을 엿볼 수 있다. 시선은 행동을 이끈다. 행동은 삶을 변화시킨다. 오로지 나를 위해 내가 변할 수는 없다는 것. 나를 변하게 하는 건 내 시선이 닿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라는 걸 깨닫는다. 삶의 구멍은 수없이 깨닫는 것들로 채워진다는 걸 배운다.


자기 검열과 자기 성찰은 다르다. 건강한 자기 성찰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지만, 과도한 자기 검열은 스스로를 주저앉힌다. 자기 검열이 강해지면 강박이 되고, 강박은 스스로 짜낸 틀 안에 갇혀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나’에 대한 과도한 검열은 확실히 앞만 보는 경주마와 같이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다. 시선을 옮기자. 세상의 모든 고난과 슬픔이 나에게로 덮쳐오는 것 같을 때 시선을 살짝 빗겨보면 문제는 단순해진다. 나에게 몰입되어 있지 말고 빠져나가자. 세상엔 많은 것들이 있고, 그들로 인해 잠시나마 내가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면, 그 시간만큼은 자학적인 자기 검열을 멈출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외부의 것들이 내 삶을 풍성하게 채우는 열쇠가 된다. 중심을 잃지만 말자. 외부의 세상에 잡아 먹혀 나를 잃어서도 안 되지만 세상을 외면하고 나만을 바라보며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잊지 말자. 과도하게 몰입되어 있는 나만의 공간에 외부 것들을 채워보자. 취미, 친구, 가족, 반려동물, 여행 등등.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 내 시간을 채운다면 비교와 자학으로 얼룩졌던 시간은 어느샌가 버젓이 누리는 삶의 시간으로 바뀌어 있을 테다.



삶의 과제 (p.170-171)


(전략) 나는 지금 애매하고 좋지 않은 상태다. 내 천성은 우울하고 찌질하다. 생각이 깊거나 통찰력이 있지도 않다. 잘하는 건 반성과 자학인데, 이것도 순간에 그칠 뿐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쉽게 습득한 지식이 쉽게 온몸으로 번지고 체화될 리 없다. 페미니즘을 응원하고 인종차별 반대를 외치면서도 중국인들을 보면 몸을 움츠린다거나, 예쁘지 않은 레즈비언을 보면 불편하다는 ‘몸의 반응’을 일으키는 내 모습. 아주 찌질하고 모순적인.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을 자학하고 혐오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안다. 나는 이렇게 모자란 인간이라는 걸 그냥 받아들이고, 매 순간 다가오는 반성과 성찰의 기회, 몰랐던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부끄러움과 희열을 느끼며 1밀리미터의 변화를 기대하는 수밖에.

결국 난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들 곁으로 단숨에 다가갈 수 없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내가 멋져지는 길은 오직 지금 나로부터 아주 조금씩 지지부진하게 나아가는 것뿐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느끼되 강요하지 않으면서, 내가 느끼는 수많은 판단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자책한다고 한 순간에 똑똑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아마도 삶은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 같다. 받아들이거나 내려놓는 건 삶의 특정한 시기에만 꺼내올 태도가 아니라 평생 살아가며 연습해야 할 과제라는 느낌이 든다. (후략)


성질이 급하면 여러모로 손해를 많이 본다. 뜨거운 냄비를 덥석 잡으면 손을 데이기 마련이다. 너무 뜨거울 때는 판단을 유보하는 게 좋다. 뜨거움이 약간 가시고 따끈한 상태가 되었을 때 음식 본연의 맛이 나오듯이, 뜨거운 가슴을 식혀줄 적절한 이성의 냉기가 매 선택의 순간에 필요한 법이다. 허지웅 작가의 오른쪽 팔에는 이런 뜻의 문신이 있다. “냉혹한 현실 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자.” 본인의 트위터에서, 그리고 저서 『나의 친애하는 적』에 언급된 부분인데, 나는 저 말이 참 좋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되, 현실과 함께 갈 수 있는 냉철한 이성을 가지기를. 나를 지탱하는 열정과 함께,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할 현실감각을 가지기를. 적절하게 마음을 데우고, 또 적절하게 가슴을 식히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사랑의 문제 (p.174)


(전략)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고, 마음이 움직일 때 글을 쓰고, 그에 맞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늘 사랑의 힘으로 움직이는 사람이고 싶다. 삶의 무수한 여백에 이성적인 힘이 마구 끼어든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빛나는 힘과 여유마저도 잃어버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이성적으로 가난해도 감성적으로 빛나는 사람이고 싶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고 싶다.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에 우위를 따질 수는 없지만, 분명 질감은 다르다. 난 사랑과 감성으로 채워진 질감을 더 세심하게 느끼고 즐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이성과 감성은 인간의 삶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두 가지 선택지다. 정말 다행인 건 이성과 감성의 문제는 무 자르듯 깔끔하게 떨어지는 OX의 문제가 아니란 사실이다. 둘은 늘 함께 간다. 나는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버티고, 감성의 힘으로 세상을 누린다. 언제나 함께 가고 싶다. 질감과 결이 다른 이 두 가지와 함께 흘러가는 인생을 맞고 싶다.

“가능한 것만 꿈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언젠가 뉴스룸에 나온 이효리가 한 말이다.(뜬금없지만 적절한 호칭을 붙이고 싶은데, 애매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능한 것만 꿈꾸며 사는 삶은 감성이 메마른 삶이라고. 가능하지 않을 듯한 꿈을 꾸기에, 사람들은 낭만을 먹고 살 수 있는 거라고. 이 말은 언뜻 감성에 우위를 두는 듯하지만, 낭만을 꿈꾸는 사람을 현실에 살게 하는 건 이성이다. 결국 이성이 존재하기에 감성이 지탱된다. 그리고 이성으로 점철된 삶에 활기를 불어 넣는 것은 감성이다. 이성과 감성의 영역은 다르지만, 이 둘은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가 작아지지만,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사라져버린다. 나는, 감성과 이성 두 기둥이 지탱하는 균형 잡힌 삶을 오늘도 꿈꾼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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