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 읽는 밤 [기타]

삶을 관통하는 짧은 언어의 힘
글 입력 2018.09.04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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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의 말이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고유의 문자도 갖춘 나라는 더더욱 없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하여 세종대왕께서 친히 창제한 한글은 긴긴 세월을 버텨 이렇게 노트북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순간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오래도록 사람들에 의해 쓰여 오면서 언어에는 우리 특유의 정서가 담겨왔을 것인즉, 단어 하나하나가 가진 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글은 다름 아닌 시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나 수필처럼 긴 글에 비해 시에는 비교적 함축적인 언어가 사용된다. 종종 그 짧은 연과 행에 단어 하나하나 허투루 쓰인 것 없이 뜻을 가득 머금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마치 그 단어에 삶을 관통당한 듯 와, 하는 감탄사를 내뱉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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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교과서로 학습하던 때, 나에게 문학은 그저 시험을 위해 분석해야 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여러 시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쓴 시들이 적힌 공간은 그저 어떤 수사법을 사용했는지 필기해야 하는 종이 쪼가리로만 여겼다. 시험지에 쓴 서술형 답안이 틀리기라도 하면, 왜 이렇게 헷갈리는 표현을 사용해서 내 국어 점수를 깎아 먹는 것인지 원망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한창 '오글거린다'는 말이 유행할 즈음이어서 수많은 문학 소년 소녀들이 그 말이 가진 힘에 몰매를 맞던 시절이었다.

입시가 한창인 고등학교 시절, 대학이라는 문턱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 같고 한창 예민해진 아이들이 지뢰 터지듯 웽웽대는 데 지쳐 마음의 우물이 바싹 말라버렸던 그때, 자기 전 시를 몇 편 읽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교과서에서, 혹은 문제집에서 읽은 적 있었던 시구들인데도 새벽녘 찾아오는 촉촉한 우울 앞에서 언제 우리 만난 적 있었냐는 듯 처음 보는 낯빛으로 눈꺼풀 위에 달라붙곤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하는 백석 시인의 구절 앞에서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하는 부처님의 입을 빌린 정호승 시인의 위로는 오지도 않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를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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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힘들었던 시절을 떠나보내고 매사에 무던하니 담담해졌지만, 지금도 가끔 마음이 울적하거나 감수성이 충만해질 때면 그때 나를 위로해주었던 시구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본다. 파도를 타고 타고 넘어가 처음 만나는 시구들과 인사할 때도 있는데, 경험의 축적치와 현재 마음 상태에 따라 와닿는 시들이 달라지는 게 재미있다. 최근 들어 딱딱해진 가슴을 품고 살아가고 있단 생각이 든다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가슴을 말랑하게 해주는 시 한 편 읽어보는 건 어떨까?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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