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9.0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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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중에서, 시간만큼 귀한 게 또 있을까.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역사에서 죽음이라는 관념은 단연 가장 중요하고 두려운 존재로 군림해왔다. 죽음은 신을 만들고, 운명을 만들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까지도 창조해내는 힘을 가졌다. 죽음은 그 어떤 권력과 유혹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으며,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공평하게 생의 단 한 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이 존재하기에 생은 한정적이고, 그 속에서 유의미한 족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인류의 본능은 시간이라는 자원에 어마어마한 가치를 부여한다. 그 속에는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내가 존재했던 날들과, 나를 존재하게 만들 수많은 기회들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켜켜이 쌓인 시간들 속의 사소한 발자취가 모여 나라는 존재를 많들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는 공평한 속도로 부재를 향해 달려간다. 시간은 나를 존재하게 하고, 시간의 부재는 죽음을 불러들인다.

결국은 죽음이나 시간도 그 자체만으로 가치있거나 권력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욕망, 그리고 거기서 오는 <부재>에 대한 공포이다. 시간은 이를 통해 힘을 얻고, 인간이 가지는 모든 욕구와 가치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시간은 마치 우리에게 어떤 재해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이 나에게 개입하는 절대적인 존재. 그래서 인간은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이 무저비한 독재자를 몰아내기를 꿈꾼다.

우리가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통제 불가능함에서 오는 모든 힘을 잃고, 시간을 기준으로 생겨난 모든 가치들이 빛바래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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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여기 두 명의 남녀가 있다.
남자와 여자는 고등학교 때 연인사이였다.
남자는 동급생 살인죄로 교도소에 들어간다.
남자는 <우주 알 이야기>라는 소설을 써서 여자가 일하는 출판사에 보낸다.
여자는 소설 내용이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을 알고 남자를 찾아 15년만에 재회한다.
남자는 자신의 살인이 세상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아 간다.
남자는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릴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이번에 극단 동이 선보일 연극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이하 < 그믐 >) 역시, 시간을 되돌리는 개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실 시간을 정복하는 것이 인간의 오랜 소망이었던 만큼, 시간여행이라는 주제는 이미 여러 장르에서 시도되었던, 다소 진부할 수도 있는 소재이다. 더군다나 시간이 개인과 공간과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매우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소재이기 때문에 시간을 다룬 수많은 작품들 중 '웰메이드'라고 칭할 수 있는 작품은 손에 꼽는다. 「과거의 무엇이 바뀌면 현재의 무엇이 바뀌고, 또 그를 통해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진다.」세계관을 형성하기 복잡한(그래서 소위 "설정 구멍"이 많이 나오는) 데 비해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은 다음과 같이 거의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어, 그동안 필자에게 시간 여행을 다룬 극은 크게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 그믐 >은, 기존의 시간을 다루던 작품들과 달리 한 가지 실험적인 시도를 더해 흥미를 끌었다. 바로 시간의 해체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시간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은 인간이 시간의 흐름에 직접 개입하되, 시간이 정해놓은 커다란 틀, 즉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 자체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시간은 단 한 번의 기회만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시간을 매개로 한 사건들이 인과관계를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권력을 가진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시간을 되돌리기만 해서는 "바꿀 수 있다"는 시간의 거대한 힘을 뒤집지 못하고 그저 기댈 수만 있을 뿐이다. 반면 사건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벗어나 인과관계를 깨뜨린다면, 시간이 가지는 절대적 힘의 근원, <그리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명제가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제20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장강명의 동명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2015)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과거에서 현재라는 한쪽 방향으로, 단 한 번씩 만 경험할 수 있다는 전제를 뒤집으며 시작한다.

연극은 주인공 남자가 쓴 소설 <우주 알 이야기>처럼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도 않고 사건 순서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인과관계를 알 수 없게 뒤섞인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모두 한 사람, '남자'의 인생이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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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B, 두 가지 노선이 있어.
A는 슬프지만 아름답게 오늘 헤어지는 거야.
B는 내일이나 모레쯤 헤어지는 거야.
대신 아주 비참하게 헤어지게 돼. 어떻게 할래?"


남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나열하고 때로는 상상한 것을 더하고, 또 여러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한다. 남자는 현재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해석하고 새롭게 만들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나가려 한다. 시간의 해체라는 외형적인 형식과 신체행동 연극이라는 극단 동의 작업방식이 만나 관객은 과거로부터 쌓여져 온 결과론적인 현재가 아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현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인물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위 기획노트에서도 알 수 있듯, 연극 < 그믐 >은 각각의 사건들이 얽매여있던 인과관계를 탈피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을 벗어난다. 시간의 순서를 벗고 모든 순간이 현재로 존재하게 되면서, < 그믐 >은 시간이 만든 구조 자체를 해체한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가지 순간을 모두 동시에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어떻게 변화할까? 그리하여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어떻게 변할까? 다소 난해하고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그만큼 기대가 된다.

더불어, 원작을 기반으로 한 <그믐,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글이 가지는 무한한 상상력을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어떻게 풀어낼지, 신체행동이라는 생소한 작업 방식이 어떻게 와닿을지도 기대가 되는 지점 중 하나이다.

막연한 상상과 즐거운 기대를 담아, 연극 < 그믐,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을 두 눈으로 확인할 날을 기다리며 이 글을 마친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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