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원작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연극의 마법

글 입력 2018.09.0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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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원작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연극의 마법
이방인


나는 글을 읽는 당신이, 이 글이 '완결'이 아니라 '진행'에 쓰였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이 글이 한 사고의 완결이 아니기에, 이 생각은 손바닥 뒤집듯이 글을 마치고 변화할 수 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도 내 생각은 계속 흘러갈 것이다. 이 논평은 온통 내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변명하자면, 이 작품에 있어서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글을 완성하기 전까지-뭐 내가 도자기를 깨는 장인이라도 된 것은 아니지만- 꿈에서도 이방인에 대한 글을 썼다. 내가 프리뷰에서 "이방인의 해석이 그 사람의 삶을 반영한다"라고 주장한 사실을 먼저 말하고 싶다. 최소한 나에게 <이방인>은 자유에 관한 이야기다. 이방인을 해석하는 것은,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유는 정의되는 순간 빛을 잃는다. 애당초 나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 안의 뫼르소는 완결되기를 거부한다. 깔끔하지 못한 글을 독해하는 수고에 대한 사죄는 이정도로 하고, 글을 시작한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연극 <이방인>은 내가 읽은 이방인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연극은 꽤 소설 내용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다만 내가 읽은 뫼르소와 표현된 뫼르소간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읽은 뫼르소와 다르다고 해서 연극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 차이에 주목했다. 연극 <이방인>의 뫼르소는 괴로워한다. 원작의 뫼르소도 괴로워했고, 그가 똑같이 관중들의 분노를 지켜보길 바라면서 막이 내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뫼르소보다, 그는 좀 더 푹 꺼진 눈으로 감옥 안에서 괴로워했다. 연극의 뫼르소는 원작의 뫼르소보다 친숙했다. 내가 읽은 원작의 뫼르소는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초월한 무엇이었다. 책을 덮었을 때, 모든 인간이 '삶'이라는극복할 수 없는 끔찍한 저주를 이고 돌산을 오르는 '행복한' 시지프스임에 전율했다. 나는 끔찍한 세상을 기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 마조히스트적인 기쁨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내게는 희망의 깨진 조각조차도 찾을 수 없는 이 끔찍한 저주에서도 인간은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는 것이 너무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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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불안이라는 끔찍한 저주는 인간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신에게 구원과 자비를 구걸하지만, 모든 것을 바친 수행사제조차도 그들의 신이 모두(그 자신을 포함해)를 위해 그것들을 베풀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이처럼 아무런 손 쓸 수 없는 끔찍한 저주 속에서도 승리와 희망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현실적인 사고나 환상이라고 하면 할말 없지만, 최소한 그는 그의 정신만큼은 구원하고 있지 않은가. 저주를 내린 하늘을 향해 웃으며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는 저주를 내린 신보다 위대한 무언가다. 나는 뫼르소가 우리에게 전율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위대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이러한 가능성을 크고 작게 실천해나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제외하고선 그 어떤 생물도, 지옥에서 천국을 꿈꾸지 않는다. 하여튼 내가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세운 이 삶의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뫼르소는 탈출했었다. 승리한 시지프스인 그가 관중들에게 보냈던 것은 자조가 아니라, 저너머의 무언가를 본 자의 상쾌함이었다. 나에게  뫼르소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적인 무언가였다.

문득 소설 이방인의 난해함에 대해 쓴 글이 떠오른다. 나는 그 글에서 "도덕적 굴레에 갇힌 사람은 뫼르소를 뫼르소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라는 투의 구절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내 나름대로 공감하며 받아들였다. 도덕과 이상에 갇힌 사람은 그 감옥에 끔찍한 저주와 사랑을 동시에  쏟아붓는다. 그런 그에게 그 곳을 넘나드는 뫼르소가 '뫼르소'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운 법이다. 실제 배우로 만나는 뫼르소는 내가 소설로 만난 것보다 비참했다. 구절 속 뫼르소는 초월자였는데, 공연장에서 소리지르고 몸을 비트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무언가였다. 나는 이 갭에 압도되었다. 사제를 만나기 전까지 머릿속에서 굴려대던 뫼르소의 해석이 어쩌고, 연출이 어쩌고 하던 문장이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물론 지금 나는 그것에 대해 더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내 손끝과 머리를 맴도는 것은 배우의 몸을 빌린 뫼르소의 비명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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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만난 <이방인>은, 사상과 이념의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실제의 이야기였다. 배우의 맨 입으로 터져나오는 말은 원작 <이방인>의 그것과 같이 비현실적이고 간단명료했지만, 숨소리와 성대를 지나온 진한 육성이 섞여 기묘한 실제감을 느끼게했다. 육체를 가진 뫼르소는, 초월자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였다!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있지만, 그는 그냥 현실의 인간을 닮아있었다. 칼에 찔리면 괴로워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눈은 희망을 쫓는 인간이었다. 그것은 분명 영광스러운 장면이었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 육체 뒤에 드리운 긴 그림자처럼 고통이 존재했다. 시지프스의 몸을 빼곡히 온통 상처가 뒤덮고 있었다.

연극으로 <이방인>을 만나는 것은 정말 너무, 괴로운 경험이었다. 훌륭한 작품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줬다. '소설'과 '연극'의 갭을 잘 느끼게 해준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장르의 변화가 이렇게 마음을 흔든 적이 없으니, 그 과정이 된 최소화된 장치와 배우의 연기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알던 뫼르소는, 배우의 몸을 빌려 더 낯선 무언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ㅡ당연하지만ㅡ나를 닮았다. 우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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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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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아거아거
    • 너무 좋은 글이에요.."이방인의 해석이 그 사람의 삶을 반영한다"라는 말 진짜 머릿속에 남을 것 같아요.
      이방인 공연도 공연이지만 리뷰가 정말 제대로네요!ㅠ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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