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Episode 4.

가끔은 네가 밉다고 말해도 될까
글 입력 2018.09.07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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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둘이서 여행을 다녀올 거라고 하면 ‘싸우지 말고’ 잘 다녀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 나는 '우리가 이제 싸우는 나이는 아니잖아.’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는 치고 박고 서로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감정을 진탕 소비할 만큼 어리석은 나이는 아니라는 뜻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굳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도 관계의 서사를 서서히 종결시킬 줄 아는 나이라는 뜻이었다. 싸움을 벌이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 너의 가장 밑바닥을 짚어보지 않고서도 우리는 서로에게서 차분히 정을 뗄 줄 아는 나이, 관계라는 것에 여전히 매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신물이 난 나이였다. 그래서 내 나이가 몇이냐는 물음에 ‘스물 셋인데요?' 라고 답하면, 누군가는 콧방귀를 뀌며 스물 셋이 무얼 아느냐 비아냥 대겠지만, 스물 셋은 그런 나이다. 어떤 걸 분명히 알아 차렸고 그것들이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은 나이, 도전 정신과 동시에 몸을 사리는 본능이 들어찬 아이러니한 나이가 스물 셋이다. 삶을 살아내는 다양한 갈래 중 관계의 맥락에 접어들면, 어쩐지 맥이 탁 풀리며 허무해져버리는 나이. 스물 셋이라는 나이가 그렇다. 나는 내 나이를 ‘더는 싸우지 않는 나이’라고 부르는 게 꽤나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우리는 지루한 안전을 누릴 수 있다. 마음을 쏟아 붓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각자의 해석으로 쓰이고 읽힌 사람들은 과감한 서사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았고, 덩달아 나는 안일하고 따분한 해석들을 바꾸려 들지 않아도 됐다. 우리에게 모험은 없다. 늘 하던 대화를 되풀이한다. 내가 보는 너와 너에게 보이는 나는 결국엔 나도 너도 그 누구도 아니지만, 관계의 맥락에서만큼은 무명의 조연 역할을 적절히 해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짓지 않아도 되고 듣지 않아도 된다. 딱, 그만큼. 너의 이름이 나에게 깊이 새겨지지 않는 만큼 나는 연기했고, 너는 다음 대사를 이미 외우고 있다. 안녕? 어 안녕. 잘 지내니? 잘 지내. 언제 한 번 보자. 완벽한 짜임새로 완결성을 자랑하는 위의 대사는 우리들 사이의 클리셰. 가끔 농담을 섞는 일로 변화를 주지만 가끔일 뿐이다. 적절한 선에서의 안일하고 따분한 대화는 꾸준하고 충성스럽다. 나는 어쩌면 너에게 영영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때로는 소리를 지르거나 책상을 두들기며 감정을 마구 쏟아 붓고 싶어진다. 네가 나를 미워하게되더라도 너를 향해 내 맘을 털어놓고 싶고 너 또한 나에게 말했으면 싶다. 무슨 말이든지 나에게 하지 않은 그 말을 했으면 싶다. 우리가 각자의 비밀스럽고 처량한 곳으로 집어 삼킨 말들이 서로를 향해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전해질 수는 없을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싸움에서, 서로를 향한 모진 말들에서 분명해질 수는 없을까. 말들이 집어삼켜지고 그 자리를 빼곡히 채우는 까맣고 아득한 나와 너라는 개인들은 빽빽하게 거리를 채우고 수많은 방향으로 흩어진다. 얼굴도 이름도 무성하게 자라지만 어느 것 하나 서로를 향하지 않고, 그런 생각이 나를 무섭게 한다고, 자꾸 슬프고 서러워진다고 하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 고함을 치고 함께 울고 다시금 껴안으며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을까.

더는 싸우지 않는 나이. 나는 너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고 너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말을 삼키고 거짓을 꾸며낸다. 그리고 너 또한 나를 위해 감정을 지어낸다. 우리는 한없이 서로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어, 그렇게 서로를 영 알 수 없는 시간들 안에 갇혀 희미해진 메아리들만을 전하고 있다. 때로는 네가 미워, 라는 말 한 마디가 어려워서, 서서히 서로의 곁을 내어주지 않으며, 호박 속에 갇힌 벌레가 된다. 주황색 입자가 옹알옹알 굳어버린 호박. 그렇게 우리 모두 딱딱해지고 덩그라니 혼자가 되어버리면, 결국 우린 뭐가 될까. 우린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마음을 공유하게 될까. 너와 나 사이에 허락된 것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씩 사라져 갈 때, 우리 어떡해야 하는 걸까. 너에게 사실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고 말해도 될까. 가끔은 네가 밉다고 말해도 될까.



* Ramon Casas i Carbó 의 그림입니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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