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기타]

글 입력 2018.09.08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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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고 걸었다. 지하철역에서 20분 정도를 더 걸어야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에 신지 않던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걸으니 점점 발이 아파졌다. 새 신발이라 그런지 아직 길이 들지 않아 구두 뒤축에 닿은 살이 자꾸만 쓰라렸다. 아마도 물집이 잡혔던 곳이 터진 것 같다. 목적지 가까이 도착해서 길을 헤매며 높은 계단을 여러 번 올랐다. 더운 날씨 탓에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리고 결국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힘들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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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작 구두를 신으며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겪은 고통으로 '죽을 만큼' 힘들다고 했던 순간, 옴니버스식 영화 '어떤 하루 (2017)'의 연희는 당장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다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힘들다는 그 쉬운 한 마디를 뱉지 않는다. 그 말을 뱉으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거나 재가 되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오히려 입을 굳게 닫은 채로 간신히 하루를 버틴다.

연희에겐 검정고시를 준비해서 학교를 다니겠다는 꿈조차 사치다. 그녀에겐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가 있고, 방황하는 동생이 있다. 그들을 대신해서 내일의 밥과 반찬 값을 마련해야 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노래방 아르바이트뿐이다. 연희가 벌어오는 돈은 세 사람의 생활비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불법 사채업에 손을 벌리게 되고, 매번 빌리기만 할 뿐 갚지도 못하는 빚만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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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만하면 연희에게 닥칠 불행은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비 온 다음 맑음, 불행 다음 행복이 아니다. 불행은 더 큰 불행을 몰고 연희의 삶을 부수러 온다. 그녀가 사는 좁은 아파트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고 그들은 강제철거가 되기 전에 집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그들이 살 곳은 없다. 내일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그들에게 새로운 집을 얻는다는 건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재개발 목전에 다가올 때까지 그저 이사를 미루고 미룰 뿐이다.

연희는 노래방 사장에게 다음 달 월급을 가불해주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사장은 잠시 고민하다 그녀를 불러 갑작스레 그만두라고 통보한다. "연희야. 우리 서로 얼굴 붉히지 말자. 나도 장사가 안 돼서 힘들어 죽겠다. 하루 이틀 일 안 한다고 해서 굶어뒤지나?" 내일이면 잘 곳도 사라지고, 한 끼 먹는 일까지 걱정해야 하는 연희에겐 사장의 '힘들어 죽겠다'라는 말은 우스울 뿐이다.


"사장님. 힘들다는 말 참 쉽게 하면서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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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크기와 상관없이 가장 아픈 건 내 고통이다. 상대방이 발목이 부러져 깁스를 하고 와도, 당장 종이에 베인 내 손가락이 더 아프게 느껴질 뿐이다. 연희의 하루를 지켜보며 내가 처한 상황이 그녀보다 더 낫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지는 않았다. 남의 고통에서 얻은 나쁜 위로, 그리고 섣부른 동정심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연희의 앞에서 '힘들어 죽겠다, 하루 이틀 일 안 하다고 굶어 죽냐?'라는 말을 했던 사장은 바로 나였다. 모든 일과 말, 단어를 쉽게 쓰는 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시끄럽던 내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가볍게 뱉었던 불평과 불만의 말. 쉽게도 그런 말을 뱉던 나를 떠올리니 내가 내 삶을 얼마나 가볍게 살아왔는지, 얕은 깊이와 나약한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어쩌면 그런 시간 동안 나는 내 고통이 제일 힘들고, 남들이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특별한 일, 이규리.



[김하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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