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방인을 이방인으로 여기지 않은 사람의 이방인

나의 인간다움을 강조했던 프리뷰를 반성하며 쓰는 이방인 리뷰
글 입력 2018.09.0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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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이때까지 문화초대를 받은 연극 중 가장 기대를 많이 한 작품이다. 문화초대의 기회가 생기면 가능한 참석을 하려고 해서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된 이후로 프리뷰, 관람, 리뷰의 순을 많이 거쳤지만, 이방인만큼 제대로 프리뷰를 한 작품도 없는 것 같다.

보통은 작품을 관람하기 전에 최대한 배경지식을 가지지 않는 편이라 팜플릿도 글을 쓰기 위한 정도로만 읽고 간다.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작품을 다 감상한 뒤에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프리뷰를 작성할 때 제목만 보거나, 대충의 줄거리만 보고 나의 관련 경험을 떠올리며 어떤 작품일지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방인은 '알베르 까뮈'라는 어쩐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름의 작가가 쓴 원작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차피 연극을 본다면 책을 먼저 읽고 가야겠다, 고 생각했었다. 늘 영화의 원작소설을 보고 난 뒤에 영화를 보면 실망한다는 뻔한 사실을 연극이라는 이유로 다를 거라고 기대한 채. 어쩌면 연극은 소설보다 더욱 괜찮을수도, 영화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봤던 연극인, '비평가'와 '집에 사는 몬스터'가 예상 외로 너무나도 뛰어난 작품이었고, 낯선 인물이 등장해 낯선 감정을 연기하는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는 새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원작 소설을 읽으며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많이 우울해졌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도 수업 시간에 우연히 장례식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서 울적해졌다. 학교 교양 수업이 방학 기간 계절 학기에는 공결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장례식이 있어도, 입원을 해도 결석 처리로만 된다며, 저번 학기 수업에서 종강 3일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학생이 있었는데 학칙상 어쩔 수 없이 발인날짜를 제외한 이틀은 학교를 왔다가 장례식장으로 갔다가를 반복했었고, 발인 날짜인 종강날 그 학생은 학교를 오지 못했다고 했다. 교수님은 무척 안타까워하시면서 그 얘기를 해주셨는데, 나는 울컥해서 또 눈물이 날 뻔했고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겨우 참고 삼켜냈다. 한참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인간적으로도 조금 인정해주면 안되는걸까? 그 학생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일텐데 추가적인 등록금을 내고 다니던 계절학기마저 출석점수가 감점이 된다면, 그리고 교수가 안됐지만 학칙상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분하고 괴로울까. 만약 내가 교수였다면, 그 학생을 다른 학생들 몰래 출석점수를 인정해줬을 것이다. 물론 감정적인 행동이고 공평한 점수를 줘야 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는 교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교수가 아니기에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동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조부모가 돌아가셨다는 그 공통된 경험 하나로 내가 그 학생의 심정을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고 혼자 공감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 위안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교수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어리광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직 친한 사람의 죽음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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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받지 않고 담담해하며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칭하는 '뫼르소'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며 그를 이방인 취급하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그를 이방인 취급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2년 가까이 마음 속 고통을 안고 산다며 구구절절 설명을 하며, 최소한의 인간성도 없는 뫼르소를 나와 극적으로 대비시키면서 그를 고립시켰던 걸지도 모른다. 그는 내 마음 속에선 철저히 무자비하며 눈물도, 부모도, 소중함도, 사랑도 모르는, 왜 사는지 모르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의 주인공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 글을 읽을 아트인사이트에 몇 천 명의 사람들에게 호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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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나는 화가 났고, 어이가 없었고 얼른 그 곳을 나가고 싶기만 했다.

우선, 주인공이 등장할 때부터 당황했다. 연기자는 물론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정도의 외모는 갖춰야 하겠지만 주인공이 지나치게 말끔하고 잘생겼다. 내가 상상한 뫼르소는 늘 무기력하고 아무 생각 없고 감정도 없는 그런 평범하고 나이 든 셀러리맨이어야 했다. 그저 밀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인상의 아저씨가 나왔어야 할 자리에 깔끔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등장해 우렁차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엄마가 돌아가셨다.'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내뱉었다.

극장은 작았다. 연기자들이 연기를 하는 원형의 무대를 중심으로 90도보다 조금 넓을까 싶은 각도를 가진 부채꼴 모양으로, 바깥으로 갈수록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형태였다. 당당한 뫼르소 씨의 목소리는 맨 뒷줄에 앉은 나에게조차 너무나 크게 들렸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으로 가서, 장례식장 지킴이가 어머니의 얼굴을 보라고 권유할 때도 그는 너무나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외쳤다. 연극의 특성상 관람객에게 잘 들리기는 해야겠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하는 다른 연기자들과는 달리 주인공은 너무 강하게 내뱉었다. 전에 봤던 '집에 사는 몬스터'에서도 주인공 덕이 너무 강하게 외쳐서 불편했었던 부분이다. 아직 연극을 본 경험이 많지 않은 나라서 그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연기자가 인식하는 그 주인공이란 그런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어쩔 수 없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체할 수 없는 걸까, 오만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뫼르소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내 상상 속에 있었던 뫼르소는 조금씩 사라져갔고 집중력은 마이너스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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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장례식 이후에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여자와 우연히 해변가에서 만나 함께 영화를 보고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다. 여성과 남성의 매우 대칭적인 구성. 그러면서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둘의 조화스러운 균형미가 아름다웠고 시각적인 미를 주었다. 또, 장소가 바닷가가 아님에도, 뫼르소의 어머니를 모신 관이 있던 공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연기자들의 연기 덕분에 그 곳은 바닷가로 느껴졌다. 눈 앞에 청량한 해변이 있는 것만 같았다.

자꾸 남성과 여성이라고 칭해서 정말 독자들에게 죄송하지만 나는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신기하게도 글을 읽을 때는 집중해서 잘 보는데 다 보고나면 주인공의 이름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까 인간실격의 주인공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모른다. 얼마 전에도 한번 더 읽었는데 잘 모르겠다. 이름에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인 것 같다. 누군가는 이름을 짓는 행위를 아주 중요시한다. 그래서 자녀를 낳고 절이나 점집에 가서 좋은 이름을 추천받기도 한다. 내 친구들 중 몇명은 사람은 이름대로 간다며, 내가 공부를 잘하는 이유는 이름에 '지혜로울 지'가 들어가고, '빼어날 수'가 들어가서 라고 했다. 아니다. 내가 공부를 잘 했던 이유는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교과서를 외웠고, 그 누구보다 많은 노력으로 수학문제집을 풀고 지우고 다시 풀고 연습장이 아까워서 지워서 풀고 몇십번을 반복했기 때문에 시험장에 가서도 모르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로워서가 아니라 노력해서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시험을 잘 쳤던 것이다. 그 둘의 의미는 정말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동등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우리 언니의 이름은 '바다 해'에 '빼어날 수'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동생은 '은혜로울 은'에 '빼어날 수'지만 전혀 은혜를 갚는 아이는 아니다. 순전히 갖다붙이기일뿐이고, 나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은 이름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자들의 변명거리이며 자기합리화일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나 역시 사람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것을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이름을 중요시하지 않아서라며 나를 변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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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가 왜 뫼르소를 사랑했는지 모르겠다. 여자가 약속이 있다고 하면, 뫼르소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않는다. 그런 뫼르소에게 자기가 무슨 약속이 있냐고 궁금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뫼르소는 별로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여자는 그런 뫼르소를 보면서, '자긴 참 특이해. 나를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거야?' 물어본다. 뫼르소는 또, 사랑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며, 여자도 뫼르소를 사랑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하고, 둘은 끝없이 의미없는 질문들을 주고받는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명랑하게, 가볍게 하는 말이 포인트다.

'나는 그래서 자기와 사귀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의미없는 물음과 답변이고, 정말 어이없는 결론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감이 가는 대화였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으로 정의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사랑을 했는지 아닌지는 본인들도 모를 수도 있고, 당연히 그걸 지켜보는 우리도 명확하게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아도 만나는 커플이 있고 사랑을 하더라도 만날 수 없는 커플도 있으니까. 이상한 만남과 이상한 끌림. 사랑은 때로 그렇게도 맺어질 수 있으며 정상적으로 만나더라도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들이 사랑을 하고 있었다고 느낄 수 있었던 건, 나중에 뫼르소가 감방에 가서 더 이상 여자친구를 만나지도 못하고 그녀의 편지를 받지도 못할 때, 목사에게 절규하며 외치던 말.

"마리가 다른 남자에게 입술을 내어준들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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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장에서 나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누구보다 열심히 연극을 본 것 같다. 기억력이 나빠, 주인공의 이름 하나, 대사 하나하나 잘 외우지 못하는데, 신기하게도 '이방인'은 어제 본 것처럼 기억이 선명하다. 벌써 일주일이나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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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이고, 총격을 추가로 몇번 가해서 재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죽인 사람때문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담담하고 밀크커피를 마셨으며 그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어머니의 시신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죄로 더 심한 책임을 물어야만 했다.

뫼르소의 친구들은 그를 변호하고, 뫼르소를 잘 알지 못하며 요양원 주변인들은 뫼르소를 책망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여자친구 마리를 만났기에 그것이 죄가 되었고, 마리는 변호를 해도 변호가 되지 않았다. 뫼르소의 친구 역시 질이 나쁜 사람이었기에 그가 변호하는 것은 오히려 그런 친구를 뒀다는 신호로 뫼르소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어머니를 모시지 못해서 요양원으로 보낸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극중에 나오는 것처럼, 요양원이 국가에서 진행하는 사업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외할머니는 5년 전 갑자기 길에서 엉덩방아를 찧으신 뒤, 그 다음 날부터 몸을 움직이지 못하셨다. 우리집은 원래 병원에 잘 안가고 놔두면 낫는다는 믿음을 가진 집안이라서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시니 멍이 좀 오래가나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꼼짝을 못하셨고 매일같이 영양제를 맞으러 병원에 다니시던 습관이 있어서 119를 타고 왔다갔다 했다. 그러다 엑스레이를 찍게 되었고, 할머니의 척추가 영원히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할머니는 음식도 잘 드시지 않았다. 손녀들의 전화번호를 다 외우시고, tv에 육상을 하는 아이돌의 이름까지 다 외우시던 할머니께서는 치매에 걸리셨다. 똥오줌을 엄마가 받아내야 했다. 국가에서 도우미 서비스를 지원해줬는데 그마저 돈을 내야 했고, 도우미들은 오후 3시쯤 되면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게다가 도우미는 나이가 너무 많아 할머니를 목욕시키지 못했고 결국은 엄마와 도우미 할머니 둘이서 할머니를 돌봐야했다. 3년간 엄마가 그런 생활에 지쳐갈 무렵, 할아버지도 치매에 걸리셨고 자꾸만 길을 잃으시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엄마가 찾아나서서 겨우 할아버지를 찾아오시는 날이 늘어났고, 결국 두 분은 다 요양원으로 가셔야했다.

길고양이들에게 쥐약을 놓는 동네 할머니들은 욕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마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늘 큰 길로 다녔던 엄마는 언제부턴가 좁은 골목길로만 다녔다. 하지만 할머니를 돌보는 일에서 자유로워진 엄마는 일주일에 한번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러 가기는 했지만 드디어 자신의 삶을 사시게 되었다. 가족들과 전국으로 여행도 다니셨고, 일주일에 한번은 주변 시외지역 동굴에 아빠랑 데이트를 가기도 했고, 고양이를 여유롭게 키울 수도 있게 되었다. 여전히 할머니집에 혼자 사는 외삼촌을 위해서 매일 저녁마다 밥을 짓고 반찬을 하러 가기는 했지만.

그러다 일 년 전쯤 이모가 갑자기 할머니를 집에 데려오자고 해서 결국 다시 엄마는 자유를 잃었다. 이모는 미용실 때문에 오후 3시가 되면 집으로 가서 엄마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할머니를 돌보게 되었다. 일요일은 이모가 쉬는 날이라 하루종일 엄마가 할머니집에 세네번 왔다갔다 해야 한다. 엄마는 다시 자유를 잃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잘 먹게 되어 다시 전화도 잘 걸고, 살도 너무 많이 쪄서 목욕시키는 날이면 나와 언니와 이모 세명이서 할머니를 목욕탕까지 들어올려야 겨우 들 수 있다. 걸음을 못 걸으셔서 모든 근육은 퇴화되셨지만 많이 드시니 배는 엄청나게 나와 있으시다. 목욕을 하는 날이면 수고한 할머니와 우리들에게, 치킨 또는 탕수육을 먹는 일을 한다. 예전부터 치킨과 탕수육을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먹었어야 했고 남으면 저녁 밥 반찬으로 먹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수많은 '치킨성애자'들과 달리 치킨을 정말 싫어한다.

엄마가 자유를 잃으면서, 언니도 자유를 잃었다. 동생과 내가 타지에서 자취생활을 해서 6마리의 고양이를 온전히 언니가 돌봐야하기 때문이다. 언니에게 여행을 가자고 하면, 그럼 고양이는 누가 보냐는 말을 한다. 엄마에게 여행을 가자고 하면 할머니는 어떻게 하냐고 한다. 동네 할머니들은 다시 엄마를 보면, '느그 엄마는 어떻노, 니가 수고한다'며 동정어린 말을 하고, 어쩌면 당연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요즘은 그런 말을 하진 않지만 처음에 할머니를 모시느라 너무 힘들 때 엄마는 우리 세 자매에게, 자기가 치매걸리면 바로 요양원으로 보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동생은 그 말을 듣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얼마 전에 나에게 한번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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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재판에서 생각한다. 나에 대한 재판인데 나는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이 나의 재판이 흘러간다. 나에게도 말 할 기회를 주라며 그는 속으로 외치지만 다시 무기력하게 의자에 앉으면서, 사실은 할 말이 없다, 고 한다. 이 장면도 인상깊게 봤던 장면 중 하나다. 양옆에서 자신을 사형에 처하려는 검사와, 자신을 변호하려는 변호사. 둘 사이에서 내적갈등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장면과 더불어, 해변가에서 아랍인을 죽이기 직전에 무대에서 연기가 몇 초 간격으로 나오면서 뫼르소가 대사를 하는 장면도 매우 인상깊었다. 나는 그에게 너무 동화되어 그가 하는 말을 듣기조차 힘들었다.

그냥 햇빛때문에 그를 죽였다고. 마지막 최후변론을 마친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며 느꼈던 지겨운 햇빛.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였지만 사실은 자신을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가 살아있었을까? 그는 사형되기 직전 감옥에서 비로소 살아있게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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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다 보고 돌아와서 남자친구에게 혹평을 했다. 주인공이 너무 강렬해서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는 달랐고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리뷰쓰는 걸 미뤘다. 이렇게 일주일이나 지나 마지막 날에 쓰는 건 또 처음인 것 같다. 혹평을 했음에도 연극 <이방인>은 나에게 아주 강렬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어 그에 대한 평가를 쉽게 하기 힘들었다. 입으로 쉽게 내뱉은 실망이라는 말을 글로는 쉽게 쓸 수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잘 한다. 하지만 거짓된 글을 쓸 수가 없다. 분명 불편했다. 담담하게 외치는 그의 분명한 어조와 말끔하게 차려입은 옷차림과 그의 잘생긴 외모가 불편했고, 감옥에서 좌절하며 목이 쉬도록 외쳐대는 그의 감정적인 태도가 불편했다. 내가 생각하는 뫼르소는 그렇게 '사람같지' 않다고. 좀 더 기계적이고 무감각해져봐. 그래야 내가 생각하는 '이방인'인 채로 뫼르소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나와는 다르게, 뫼르소를 연기했던 분은 뫼르소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그토록 인간적으로 뫼르소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아마 내가 뫼르소를 연기했다면 무기력하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좌절하고 있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연기를 했겠지.

연극은 원작 소설과는 같을 필요가 없다. 영화와 드라마 또한 마찬가지다. 그건 2차적인 생산물이며 원작을 읽은 자들의 욕심이다. 연극은 관람객이 애착을 가지고 지켜보는 문화예술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연기자와 연출가가 만들어가는 세계이며, 그들이 작품을, 주인공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나는 무척 오만했다. 내가 그들의 작품을 보러가면서, 나의 입맛에 맞춰달라고 요구를 한 것이다. 좀 더 나의 상처가 돋보이고, 내가 인간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고 나를 제발 동정해달라고, 나는 이토록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로.

다시 한번, 소설 이방인을 읽어야겠다.
나는 그러면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인식할지, 아니면 이제는 그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게 될까? 만약 후자라면, 나는 가장 열심히 준비한 프리뷰를 내 인생 가장 부끄러운 글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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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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