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ina] 탈코르셋의 의미

글 입력 2018.09.09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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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NS를 통해 자신의 탈코르셋 과정을 공개한 여성들의 사진이 줄을 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삭발한 모습, 코스메틱 제품들을 박살내고 하이힐을 벗어던진 사진으로 저마다 다양한 탈코르셋의 모습을 전시한 것이다. 여기서 코르셋이란 와이어로 만들어져 여성의 흉통을 잔뜩 조이던 중세시대의 속옷을 현대 여성들이 수행하는 꾸밈노동에 비유한 셈이다.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은 이처럼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미적 억압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을 탈코르셋으로 명명한 후 적극적인 실천으로 사회적 주목을 이끄는 데에 성공했다.



누가 너보고 꾸미래?


하지만 탈코르셋이 이슈가 되자 남성들은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출했는데 누구도 여성에게 꾸밈노동을 강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꾸밈노동은 여성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야말로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무형의 억압을 흐린다. 여성은 대중매체와 사적, 공적 기반을 통해 한 가지 유형의 여성을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여성상으로 삼을 것을 끊임없이 주입 당한다. 남성 중심 사회가 용인하는 여성이란 마르고 젊고 늘 완벽하게 외모를 치장한 채 미소를 띠는 여성뿐이다. 오직 외적 이미지를 통해서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여성들은 자신을 이 도달할 수 없는 범주에 편입시키고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멱살을 쥐어 잡고 당장 꾸밈노동을 이행하란 실체자가 없어도 스스로 꾸밈노동을 의무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같은 논리로 외모 꾸미기가 자신에게는 억압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사를 밝힌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오히려 탈코르셋이 강압적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내비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선택의 영역으로 간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라는 말만큼 공허한 메아리가 없다. 화장을 시작하고 화장품을 구입하는 여성의 연령대는 점점 어려지고 있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마스크를 낀 채로 얼굴을 가리는 여성들도 존재한다. 날씬한 여성은 다이어트 성공 제품을 홍보한다. 살이 찐다는 것은 여성에게 형벌이나 다름없다. 또 여성들은 불필요하게 신체 부위를 노출시키도록 제작된 오프숄더와 같은 의복을 입고 발에 통증을 안겨주는 힐을 신는다. 나이든 여성은 자신의 흰머리와 주름을 바라보며 세월을 한탄한다. 유방암 수술로 한 쪽 가슴을 절개한 여성은 양쪽의 균형을 맞추려 패드가 든 브래지어를 착용한다. 여성 환자들에게는 대체 어떤 자신감을 불어넣고 싶은 건지 메이크업 시연 행사를 주최하기도 한다.

사진관에서는 인조인간을 만들 기세로 여성의 피부톤을 보정하고 목의 주름을 없애고 얼굴의 대칭을 맞춘다. 턱을 깎고 심지어는 헤어스타일까지 변형시킬 수도 있다. 성형 수술 광고판은 도심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는 여성의 신체를 부위별로 파편화해 가치를 매긴 이미지를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긴 머리, 화장, 치마, 구두, 제모, 네일, 다이어트, 브래지어, 성형, 소음순 수술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꾸밈노동을 중단한 여성들은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이냐는 조롱 혹은 남자 같다는 거부감을 가장 빈번하게 겪는다. 사회적으로 구분된 여성성을 재현하지 않으면 여성에게 고환이 생겨나 남성으로 돌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남성은 꾸밈노동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인간다움을 유지하지만 여성에게는 감히 그런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여성의 꾸미기가 미적 실천의 일환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의 미적 규범과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꾸밈노동과 자기 대상화


여성이 고통스러운 꾸밈노동을 억압으로 여기지도 않고 탈코르셋에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기저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두려움, 불안감이 혼재되어 있다. 남성사회가 도식화된 여성성(우리가 여성성으로 취급하고 착각했던 모든 것들)을 마치 올바른 여성의 상징처럼 찬미하는 이유는 평가의 주체를 선점함으로서 여성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은 늘 자신이 어떻게 보여 질지 걱정한다. 꾸밈노동은 자기만족을 위함이라고 하지만 24시간 거울을 눈앞에 두고 다니지 않는 이상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보는 건 불가능하다. 나오미 울프에 의하면 여자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배우게 되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이러한 자기 대상화는 외부의 승인을 목표로 삼게 되며 필연적으로 자기혐오, 자책감, 자괴감, 우울증, 섭식 장애 등을 유발한다. 안드레아 드워킨은 미의 기준이 심리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육체적 자유는 심리 발달, 지적 가능성, 창의적 잠재력과 태생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꾸밈노동은 여성에게 아름답지 않아도 될 자유, 다른 목표와 성취에 몰두할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와 시간뿐만 아니라 비용마저 갈취해간다.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적 의식을 중단할 수 없도록 만든다.



탈코르셋은 여성들이 써내려가는 저항 운동


만약 여성이 계속 남성들이 만든 문법을 따라가거나 순응한다면 이 종속적 구도는 영속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은 다음 세대에도 그 다음 세대에도 자신의 진정한 자아상이 아니라 남성들의 성적 만족을 위해 창조된 허구의 여성만을 연기하며 평생을 자기혐오 속에서 방황하다 소멸되는 삶을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의 승인과 시혜를 거부하고 저항한다면 그곳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진정한 여성해방을 쟁취할 힘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있다. 그러므로 탈코르셋은 남성 중심 사회가 구축한 낡은 구조들을 허물고 여성들의 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겠다는 저항의 운동 중 하나인 셈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괴로운 자기 부정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그 힘을 꾸밈노동에서 찾기란 불가능하다. 반면 투쟁과 저항, 여성들 간의 연대 의식에서 오는 해방감은 여성을 놀랍도록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그 원동력이 상처받고 비틀린 자아를 회복시켜준다. 그리고 여성성이라는 허상에 갇혀 있던 상상력의 한계를 넓혀준다.

저메인 그리어는 완전한 여성이란 남성의 성적인 환상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거나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남성에게 기부한 채 남성에 기대어 사는 여성이 아니라 아름다워져야 할 필요조차 없는, 똑똑하고 나이에 걸맞은 권위를 지닌 여성이라고 말했다. 이 흐름이 더 많은 여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육체적인 코르셋 뿐만이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심리적, 정신적 코르셋을 벗고 진정한 자신으로 독립하는 과정이 되길 바란다.




[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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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조현정
    • "선택의 영역으로 간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라는 말만큼 공허한 메아리가 없다." 깊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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