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파수꾼의 파수꾼, 그리고 다시 파수꾼 : 프리즘오브(PRISMOf) 9호 < 파수꾼 >

글 입력 2018.09.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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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의 법칙

 
글을 쓰다가 턱하고 막히는 순간이 있다. 말을 하다가 머뭇거리는 순간이 있다. 적합한 단어를 고심하고, 내가 하는 말이 정치적으로 온당한지를 곱씹는다. 이렇게 글을 쓰면, 이렇게 말을 하면, 나를 혐오에 찌든 사람으로 보진 않을까, 어쭙잖은 신념으로 칼을 휘두르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된다. 말이, 글이, 이야기가, 작품이 ‘정치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만큼 정치적인 것도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렇기에 더 두려운 것도 있다. 내 말에서, 글에서 어떤 비루한 감각이 읽히진 않을까. 사회적으로 비판받을 만한 지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결국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안기지 않을까 두려운 거다.
 
그래서 내 개인의 느낌과 생각을 말하는 것보다, 이미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들을 말하는 게 쉽다. 이를테면, 폭력의 가해자를 비판한다거나 한일 관계에서 일본을 비판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나의 정치적 입장이 이와 상충한단 소리는 아니다.) 그럴 때면 글과 말엔 힘이 실리고, 어조는 비장해지기 일쑤다. 공격받을 가능성은 적어지고 두려움도 사라진다. 근데 이 완전무결해 보이는 명제가 어떤 의미를 ‘낳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경계를 지키는 사람

 
그래서 저런 태도의 이야기를 만나면 불뚝하고 반발심이 솟나 보다. 이런 게 동족 혐오일까. 이건 이래서 잘못된 거야. 저건 저래서 나쁜 거야. 그러니 이럼 안 돼. 라는 식의 완전무결한 태도를 만나면, 순간 그 입장에 설복당하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져 나와 버린다. 이 같은 이야기가 가진 파급효과와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 역시 그런 이야기에 감사함을 느낀 게 한 두 번이 아니니.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간단히 해명될 수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불쑥 솟는다. 말 그대로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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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수꾼> 스틸 컷. ⓒ 네이버 영화


그런 의미에서 영화 <파수꾼>은 참 ‘불편한 이야기’다. 한 손에 저울을, 또 한 손엔 칼을 든 신의 입장에서 기태는 ‘학교 폭력 가해자’일 뿐이다. '어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겐 미성숙하고 철이 덜 든 청춘일 뿐일 거다. 물론 그의 폭력적인 행동은 인정받아선 안 되고 이해되어선 더더욱 안 된다. 정치적으로 위험하지 않게 말하려면, 기태의 죽음을 서사적 '응징'으로 취급하면 된다. 그의 폭력적 행위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추적하기보단, 피해자들의 고통을 쫓고 그들의 남은 삶에 천착하는 게 더 온당할 테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학교 폭력의 양상과 가해자들의 뻔뻔함을 생각해보면 답은 더욱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파수꾼>은 시종일관 모호한 태도로, 기태를, 희준이를, 동윤이를 비춘다. 누가 그들에게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을까. 라벨을 붙인다면 우리의 인식은, 이야기의 방향은 훨씬 더 쉬워졌으리라. 하지만 이 영화는 모호함을 끝까지 끌어안으며, 그 경계를 지킨다. 오프닝에서 학교 폭력 가해자의 전형으로 비춰지던 기태.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결말부로 갈수록 복잡해진다. 희준이도 동윤이도 마찬가지다. 기태는 죽었고, 희준이는 전학을 갔고, 동윤이는 학교를 그만뒀다. 그런데 잘못은 누가했나? 영화는 섣불리 답하길 거부한다. 그리고 단순한 '경계 짓기'를 '경계한다'. 관객이 학교라는 사회 내의 일들을 복잡하게 바라보도록, 그래서 한 사람의 개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도록. 그래서 수많은 파수꾼을 바라보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파수꾼'이다.


 
<파수꾼>의 파수꾼

 
이 모호함은 사실 상업영화의 문법에선 종종 ‘비문’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상업영화가 저속하다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상업영화의 대중성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다. 독립영화의 반대 개념으로 상업영화를 말할 때, 가장 큰 변별점은 바로 ‘자본’에 있다. 기실 상업영화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관객과 영화 제작으로 금전적 이익을 꾀하는 자본가, 그리고 장르의 뒷문에 메시지를 밀어 넣는 감독이 공모해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다수의 관객이 '불편하게 느끼는' 모호함은 사실 비문에 가깝다.

하지만 상업영화라고 해서 작가주의적 태도와 철학적 메시지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정말이지 큰 오해다. 상업영화의 감독들은 모호함 대신, 뒷문을 이용한다. 뒷문을 열지 않으면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는 '잔혹한 사이코패스가 사람 죽이는 스릴러'일 뿐이다. 하지만 뒷문을 열면, 그 안에 신자유주의 사회상과 자본주의가 키운 두 악마가 있다. 그래서 좋은 상업영화에는 해석자가 필요하다. 그 뒷문의 이야기를 꺼내어 펼쳐 보일 해석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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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수꾼> 스틸 컷. ⓒ 네이버 영화


반면 유지영 영화감독의 답변처럼, 독립영화의 특권은 ‘모호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자본의 간섭이 상대적으로 덜한 독립영화는 확고한 이야기, 확고한 장르가 아니라 모호함 속을 유영하곤 한다. 그래서 ‘어렵다’, ‘난해하다’는 평이 생기는 것일 테다. 희준이와 동윤이가 기태의 죽음을 딛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여줬더라면, 혹은 기태 아버지가 기태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끝났더라면. 이야기는 좀 더 명료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파수꾼>은 불안하고 흔들리는 상태로 영화를 끝맺는다. 그리고 누가 가해자야, 누가 피해자야, 그래서 누가 죽인 거야라는 식의 태도가 영화의 시선과 맞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작품을 관통하는 기태 아버지의 태도를 통해.
 
‘어렵다’, ‘난해하다’ 혹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말로 모호함을 단정 짓는다면. 세상은 명료한 것들의 젠체로 가득찰 것이다. 이 모호한 영화에 해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리즘오브(PRISMOf)가 <파수꾼>에 렌즈를 들이미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의미를 입는다. 한 영화를 바라보는 영화감독의 시선, 평론가의 시선, 등장인물 나이 또래의 시선 등을 모아, 또 영화 속 인물을, 카메라의 움직임을, 플롯을 추적하는 시선들을 모아 <파수꾼>의 모호함을 감싼다. 사회 속 파수꾼을 감싸는 이야기의 파수꾼이 영화 <파수꾼>이라면, 다시 그를 지키는 비평의 파수꾼은 프리즘오브다.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프리즘오브가 담은 다양한 프리즘은 <파수꾼>의 떠다니는 기표들을 해명한다. 이 영화가 계보 속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부터 시작해, 영화 내적인 해석과 사회 속 영화의 메시지를 따져보는 것에까지 다다르면, 우리는 나름대로 <파수꾼>의 위치를 짐작해볼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를  ‘학교폭력 가해자 옹호’라고 말하는 것과 ‘모호하고 난해한 허세의 집합체’라 말하는 것도 ‘틀린 해석’은 아닐 거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니. 하지만 분명히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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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오브의 다양한 접근과 깊이 있는 시선은 ‘더 좋은 해석의 장’을 열어준다. 그 자체가 좋은 해석이라고 말하기보단 그렇게 말하고 싶다. <파수꾼>을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 해석을 읽은 사람이라면 영화를 ‘함부로 말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영화 속 다듬어지지 않은 청춘들이 서로에게 함부로 건넨 말이 결국 파국의 도화선이 되었듯, 이야기도 ‘함부로 건넨 말’에 상처받고 파괴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잡지는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프리즘을 보여주고 영화의 걸음을 지르밟는다. 이런 해석과 비평이 독립영화에, 더 넓게는 이야기 전반에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국내에선 작품 하나를 특정해서 계간지로 만든 경우가 없었던 만큼, 프리즘오브의 존재에선 이야기에 대한 해석자들의 사랑과 좋은 해석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신형철 평론가의 주장을 빌리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그렇다면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무엇일까. 우리는 영화를,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신형철 평론가의 기준은 “‘생산된 인식의 깊이’다.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꾸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 이런 선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해석이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그리고 우리는 이 산파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이야기, 더 나은 내일을 감히 꿈꿀 수 있게 된다. <파수꾼>이 하나의 상징이 되어 독립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듯 말이다. '불편한 이야기'와 그를 바라보는 '좋은 해석'이 필요한 이유다.



도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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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 유진선, 조현경
Head Editor 안현경
Editor 손예은
Art Director & Designer 송경은
Photographer 임종인
Calligraphy 배태랑
Contribution 김소희, 배태랑, 장병원, 함성주



[목차]

[LIGHT]
24 한국독립영화 계보
30 독립영화, <파수꾼>
34 모두의 이야기

[PRISM]
44 기태 - WE NEED TO TALK ABOUT HIM
48 아들이 죽었다
50 <파수꾼>의 공간: 기찻길, 집, 학교
58 회상하는 화자들의 이행: 정보의 심도가 주는 플롯의 효과 
64 희준 - 도망자는 모두 비겁한가
68 <파수꾼>의 촬영: 키노아이로 바라본 파수꾼
76 공의 궤적
82 동윤 - 어른이 된다는 것

[SPECTRUM]
92 <파수꾼> 관객 서베이
94 인터뷰 - 청소년 대담
108 이행기(liminality)의 소년들과 ‘거울’
114 나는 남고 출신입니다
120 여기 또다른, <용서받지 못한 자>
124 인터뷰 - 유지영 영화감독
136 소년들은 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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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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