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스페인,맑음] 준비하다#1. 로망 깨기

글 입력 2018.09.11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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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25. 땡볕 더위
비자 신청하기


빠진 것은 없을까. 잘못 된 것은 없을까. 수십 번 체크를 하고도 불안한 마음을 안고 비자 신청을 위해 스페인 대사관으로 향했다. 날씨는 왜 이렇게 뜨겁고 대사관은 왜 하필 언덕에 있는 거야. 다음 일정이 있었기에 원래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을 일찍 도착했지만 대사관엔 이미 나 같은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결국, 예정되어 있던 다음 일정은 취소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내 순서를 기다렸다.
 
막상, 내 순서가 되니 왜 이렇게 긴장했었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비자 신청 접수가 끝나버렸다. 유학원 없이 나 혼자 준비한 서류들에는 다행히 별 문제가 없었고 직원 분은 10일 정도 후에 대사관 사이트를 확인해보라고 하셨다. 오예! 올 땐 덥고 짜증만 났는데 끝나고 내려갈 땐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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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6
비자 감옥


직원분이 말씀하신 시간이 지나고 비자 승인 명단이 나왔다. 그런데 이게 뭘까. 같은 날 신청한 다른 친구들은 비자 승인이 떨어졌는데 내 번호는 명단에 없었다. 신청이 끝났다고 비자라는 이름의 감옥을 탈출했다고 생각한 건 나의 오산이었다. 진정한 감옥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스페인이 비자 받기 힘든 나라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미국과는 사뭇 다른 이유다. 미국은 신용을 보장하는 서류를 까다롭게 검사하고, 외국인과 영어로 면접도 봐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스페인 대사관의 분위기는 엄격하거나 까다로운 느낌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엄격함만큼 사람들을 힘들고 지치게 하는 것이 바로 스페인의 ‘느긋함’이었다.
 
쏟아지는 태양과 시원한 바다. 해변에 누워 한가롭게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 내가 꿈꿔 온 스페인의 한가함과 느긋함이 독이 될 수 있음을 처음 깨달았다. 10일이 지나고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나 출국일은 가까워지는데 비자는 나오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대사관에 전화해 봐도 대사관과는 연락하기조차 힘들었다. 겨우 전화 연결이 되었을 때에는 스페인 측에서 승인을 내지 않는 이상 대사관에서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으며 그저 기다리라는 무미건조한 이야기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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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그래도 비자 감옥을 겪으며 하나 더 깨달은 것이 있는데 바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대사관은 비자 관련 문의를 받는 시간이 매우 한정적이다. 나처럼 비자가 늦게 나와 고민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보니 대사관과 연락이 닿는 것조차도 매우 힘들었다. 서로가 민감한 상황 때문일까. 인터넷 카페에서 비자 발급 관련 글들을 보면 대사관 직원들이 너무 무섭다거나 태도가 좋지 않다는 글들이 꽤 있었다.

세상 최고 겁쟁이 중 한 명인 나는 그 글들을 보고 전화 연결이 되기 전부터 겁을 집어 먹었다. 혹여나 내 말투 하나, 태도 하나가 비자 문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까 싶어 문법을 파괴하는 수준의 높임말을 사용했던 것 같다. 그 덕분일까. 카페에는 여전히 불만 섞인 글들이 올라왔지만 전화 연결이 안 되어 답답했던 적은 있어도 직원 분의 태도나 말투에 기분이 상한 일은 없었다. 선조들의 말씀이 괜히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낀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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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17
POR FIN!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자 승인이 드디어 나왔다. 친구를 만나던 중 나와 함께 초조한 마음으로 비자 확인을 해보시던 엄마가 소식을 알려주셨다. “마음의 짐을 덜었다”라는 표현이 참 와 닿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비자 때문에 비행기 놓치는 꿈도 꿔보고 매일 핸드폰만 보고 있었는데 마침내 비자를 품 안에 넣을 땐 정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비자를 무사히 받은 건 다행이었지만 가기도 전부터 이렇게 고생하다니.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나의 로망에 금 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가롭고 여유로워 좋아 보이기만 했던 스페인이었는데 비자 문제를 계기로 '느긋함'이 '게으름'으로, '한가함'이 '답답함'으로 여겨질 수도 있음을 상기하였다. 로망이라는 가면에 가려져 잠시 잊고 있었던 스페인의 민낯을 몸소 겪으며 그렇게 스페인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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