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라진 곳에 새롭게 채워지는 것 [문화 전반]

건축학도가 쓰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아닌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
글 입력 2018.09.13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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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의 나눔과 베품 빵집이 사라졌다. 그리고 상도동에 있던 '브레드덕'이라는 빵집이 그 자리에 그대로 들어왔다. 간판의 색과 이름은 바뀌었지만 내부 구조는 동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운터는 여전히 커다란 기둥이 막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른쪽엔 여전히 냉장보관함이 있었고 가운데에는 네모낳게 빵전시대가 있으며 건물의 벽면을 따라서 빵이 전시되어 있다. 아직 완전히 오픈된 건 아닌지 약간은 텅 비어보였다. 원래 나눔과 베품은 건강한 빵을 팔기는 했지만, 딸기 위주의 디저트라던가 과일 디저트류가 더 유명했었는데 브레드덕은 건강빵 위주로, 계란, 버터,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깜빠뉴, 바게트 메뉴가 많이 보였다. 심지어 스콘조차 호밀을 사용한 카카오 호밀 스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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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만들어놓았는데 다 팔린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몇개 없었던 것인지 내가 갔을 때가 오후 5시쯤이었는데 이미 몇 개 남지 않았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나눔과 베품' 빵집은 저녁 늦게 가도 빵이 늘 가득했었던 것과 비교하니 되게 황량해보였다. '나눔과 베품'도 크림치즈베이글이나 빵 몇가지 종류를 늘 시식대를 열어놓았는데, 여기도 시식대를 열어놓아서 전혀 모르는 맛인 빵도 그 맛에 이끌려 사게 되었다.

같은 공간에 놓인, 다른 종류의 빵을 파는, 다른 이름의 빵집.

사실 '나눔과 베품'은 나에겐 두려운 공간이다. 다이어트를 할 무렵 빵이 갑자기 너무 먹고 싶었고, 오랜 기간을 참았다. 그러다, 치과 교정 치료를 받고 매복어금니를 세우기 위해서 잇몸을 마취하고 나사를 하나 박아넣었는데 그 고통이 너무나 극심해서 자제력을 놓아버렸다. 그 길로 '나눔과 베품'에서 생크림쌀빵, 쿠키 몇개, 녹차타르트를 사서 하루종일 흡입했다. 그 상태가 폭식증이라는 것도 모른 채, 나에게 에너지가 부족해서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너무나 달고 자극적인 맛이었고,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는 맛이었지만 그걸 꾸역꾸역 다 집어넣었었다.

어떻게 보면 나의 폭식증이 처음으로 발현된 곳이기도 하다. 먹고 싶은 빵이 없는데도 굳이 들러서 무슨 빵이 있는지 확인을 다 하고, 내가 먹었던 생크림쌀빵의 존재를 확인하고나서야만 나올 수 있었던 곳이다. 그런 곳이 없어지니 이상했다. 무슨 느낌인지 아직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이 모든 게 그저 의미부여일 수도 있다. 만약 아픈 내 눈 앞에 다른 빵집이 있었다면 나는 그 빵집에 들러서 거기서 폭식을 했을까? 그건 아니다. 치과 앞에도 빵집이 많았지만 나는 굳이 '나눔과 베품'까지 와서 빵을 샀다. 아마 평소에 계속 눈여겨보며 사고 싶었는데 참던 것이 폭발했던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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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은 유난히 길가의 가게들이 자주 바뀐다. 내가 입학하던 시절에 있었던 '몬스터밥'이라는 밥집도 어느샌가 사라졌다. 거기서는 새내기 때 동기들과 딱 한번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있다. 컵밥같이 고기나 야채와 밥을 잔뜩 때려넣고 비벼먹는 밥이었는데 그 당시엔 음식에 그닥 욕구가 강하지 않아서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없다. 그때는 음식의 맛보다는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더 중요했을 때였다.

아, 흑석에도 '유가네'가 있었다. 지금은 왕돈까스왕냉면 체인집으로 바뀌어버렸는데, 새내기 때 얼굴을 막 알게 된 동기 8명이서 닭갈비를 볶아 먹으러 갔었다. 이성에 대한 관심도 많았을 때라서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갔었던 곳이다. 유가네에서는 늘 알바생이 닭갈비를 비벼주고 볶음밥을 비벼준다. 우리는 신나서 이야기를 하다가도 알바생이 다가오면 아무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을 하지 않고 비벼지는 모습만을 쳐다보고 있다. 야채를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상하게 닭갈비에 들어간 양배추는 무척 잘 먹었었다. 거기서 서로를 소개한 우리들은 2층에 있는 노래방으로 가서 실컷 노래를 부르고 저녁을 또 먹고 술을 마시러 갔었다. 나는 그 날 동기 오빠와 단 둘이서 새벽 5시까지 술을 마셨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썸을 타게 되었었다. 서로를 정말 잘 몰랐고, 안 지 하루만에 호감을 갖는 일이 그 시절에는 가능했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할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 오빠를 좋아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성에게 호감을 갖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 의도없이 무언가, 내가 아닌 상대를 또는 나를 좋아할 수 있었던 순수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서 조금은 그립기도 하다.

'왕돈까스왕냉면' 역시, '나눔과베품'이 '브레드덕'으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의 인테리어와 구조는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이제는 돈까스를 주문하면 10분 정도의 시간이 있다 돈까스가 나온다는 것 정도가 달라졌을 뿐이지만, 돈까스를 먹으러 그 곳에 가도 더 이상 유가네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건축쟁이들이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 중요한 물리적인 형태적 가치보다는, 불판에서 피어오르는 닭갈비의 향기같은 것이 좀 더 우리의 소중한 추억과 관련되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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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같이 셀카를 찍었던 동기언니는 내가 나이를 먹듯이 많은 나이를 먹었고, 우리의 얼굴에서는 이제 옛 얼굴의 흔적을 겨우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시간 속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정말로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다.





흑석은 대학가인데도 24시간 가게가 별로 없다. '뼈다귀 청기와 해장국'과 '더진국국밥'이 유일했는데 어느 순간 '더 진국'이 사라지고 '마라쿵푸'라는 마라탕 가게가 들어왔다.

나는 1학년 때 아주 방탕하게 놀았는데,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기숙사를 거의 옷장으로만 이용하는 정도였다. 그냥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르는 곳 정도여서, 내 책상 위와 침대는 엉망이었고 룸메이트 언니들을 보는 날이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였던 것 같다. 늘 자취하는 친구 집에 새벽 늦게 들어가서 좋아하는 분식집 치즈라면을 사다주며, 자고 있던 친구를 깨워서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 둘은 3개월동안 사이 좋게 5kg이 쪘었다. 그 뒤에 나는 술을 끊고 정신을 차려 그 때 쪘던 살은 다 빠졌지만 그 친구는 슬프게도 그 살이 자기 살로 고정되어 버려서 미안할 뿐이다.

어쨌든, 술을 마시고 나면 해장하러 가는 곳이 '더 진국'이었다. 가서 괜히 해장술이라며 한 잔 더 마시고 필름이 끊기는 날이 허다했다. 그 곳에서 먹던 수육국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알딸딸한 정신에 들어가는 그 담백하고 기름진 수육국밥. 새내기 시절의 기억과, 내가 선배가 되어 후배들에게 열심히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삼 만 원 어치의 수육국밥을 사주던 추억도 있다. 허세를 부리며 해장술을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마지막 잔에 정신이 비틀거렸었다. 필사적으로 자존심을 위해 정신을 챙겨 계산까지 마치고 추워서 빨리 간다고 택시를 타고 쌩하니 가버렸었다. 후배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다른 기억 중에는 배고플 때 가서 수육국밥을 동기와 먹기도 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밥을 잘 안 챙겨먹어서 24시간만에 밥을 먹곤 했는데, 늘 나의 허기짐을 달래주는 곳이었다. 나와 3살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이 서울에 대학에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엄마가 국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더 진국'으로 데려갔었다. 외식에 만족 못하는 엄마지만 그 곳은 맛있었다고 하셨다. 그 날 과제가 너무 많아 저녁밥만 같이 먹고 자취방에 같이 들어가지 못한 채 학교에서 밤을 새워 과제를 했지만, 가족들과 오랜만에 먹은 밥이라 그런가 든든해서 과제를 끝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7시쯤 들어가니 엄마와 동생은 면접 시간때문에 이미 내 자취방에 없었다.

그런 기억들이 어린 '더 진국'이 사라지고 '마라쿵푸'라는 가게가 갑자기 들어서서 나는 그 골목을 아직도 가지 못한다. 원래 짬뽕같은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굳이 그 골목에 들어가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방학이 지난 뒤, '싸움의 고수'가 사라진 중앙대 정문 대로변에 갑자기 '더진국'이 들어섰다. 이제는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더 진국'이 들어서버려 더이상 시선을 피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4년동안의 대학생활을 하고, 친구들이 한명한명 반수를 하고 재수를 하고 휴학을 하고 전과를 하며 내 곁을 떠나는 동안 나는 어느새 혼밥도 잘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수육국밥을 먹으러 들어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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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 수육국밥을 먹던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였으니까.

그게 다시는 보기 싫은 사람이던, 볼 수 없는 사람이던, 군대에 간 후배이던, 휴학을 한 친한 친구이던 가족들이던간에 상관없이. 가장 외롭고 힘들었던 새내기 시절을 함께 있어준 사람들과 함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면, 그 시절에 외로웠던 걸까,
아니면 지금이 외로운 걸까?
어쩌면 지금의 폭식증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은 외로움의 빈 자리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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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벚꽃 시즌에 동기들과 함께 여의도 한강공원에 소풍을 갔었다. 비록 신문지로 깔아놓은 돗자리지만, 먹을 건 다 있다. 근처 편의점에서 산 종이라면들과 순대, 오뎅국물, 떡볶이.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게 '나눔과 베품'에서 팔았던 딸기타르트 디저트다. 딸기에 슈가파우더와 설탕 코팅이 되어있어서 너무 달았지만 타르트와 과일을 합친 디저트를 처음 먹어봤기 때문에 엄청 맛있게 먹었다.

맛 자체가 맛있었기 때문보다, 그냥 벚꽃이 흩날리던, 봄이라기엔 아주 추웠던 그곳이 너무 좋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벚꽃이 피면 늘 고향에서 엄마와 가족들과 벚꽃놀이를 가서 그림을 그리고 상을 타오곤 했었다. 우리가족은 옛날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벚꽃축제를 즐기고, 꽃을 넣은 책갈피를 만들고, 여러 부스에 참가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왔고,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을 땐 봉사활동 참여자로 벚꽃축제에서 놀았다. 대학생이 된 뒤로는 늘 벚꽃시즌이 애매해서 참여하지 못했는데 3학년이 되어서야 꽃을 보러 간 것이다. 그 날도 너무 추워서 덜덜 떨면서 봤지만.

또, 내가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딴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들 어떻게 실기를 준비했냐고, 어땠냐고 물어보는데 가족들에게는 전화로밖에 이야기하지 못한 것을 그렇게 직접 이야기하고 실시간으로 반응을 들으니 무척 기뻤다.

이런 저런 기억이 얽혀서 바로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내 안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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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은 변화가 빠른 동네다. 눈 떠보면 생긴지 얼마 안 된 건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또 새로운 게 들어서 있다. 토지이용정보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초라해보이기만 했던 흑석의 땅값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 이야기는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니 잠시 접어두자.

은평구 구산동에 '구산동도서관마을'이라는 이름의 도서관이 있다. 예전에는 주택으로 사용되던 여러 곳을 합쳐서 리모델링해서 도서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그 곳을 답사하던 때에는 몰랐지만, 내가 그 곳에 살았던 주민이라면 도서관으로 바뀌어버린 자기들의 집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 그 건물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은 만약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라면 자기 집이 이렇게 바뀌었다며 신나는 모습을 보여줄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나라면 굉장한 상실감을 느낄 것 같다. 그 곳이 사라지면, 그 속에서 그렇게 행동을 했던 내 모습은 이제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외로웠던 내가 담겨있던 곳과 서서히 이별하는 연습을 하는 중.


[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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