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믐, 그리고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공연]

삶의 가치는 미래의 해피엔딩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지금의 나 자신이다.
글 입력 2018.09.1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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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B라는 두 가지 노선이 있어.
A는 슬프지만 아름답게 오늘 헤어지는 거야.
B는 내일이나 모레쯤 헤어지는 거야.
대신 아주 비참하게 헤어지게 돼. 어떻게 할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연극도 아직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어하는데, 이 연극은

첫째로, 시간의 개념이 현재, 미래, 과거 상관없이 엉망이었으며
둘째, 보름달과 그믐달이라는 두개의 달 위에서 주인공들이 뱅뱅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목을 기형적으로 꺾고 엉금엉금 기어가듯이 돌면서 이야기를 한다는 점도 이상했고
셋째, 여자주인공이 갑자기 음악을 연주하던 다른 인물로 바뀌었기도 했다.
그리고 넷째,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한다는 주인공 남자의 이야기라고 읽은 것 같은데 연극에서는 전혀 그런 점이 보이지 않아서 너무 황당했다.

머리가 그닥 좋지 않고, 그런 주제에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싶어하는 욕심은 또 강해서, 내 머리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만나면 불쾌해진다. '이방인'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너무 나빴다. 그래도 그런 경험에 익숙해진 덕분인지 이번 공연은 2시간이라는 긴 시간이었지만 뛰쳐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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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연극 공연장에 비하면 무대가 굉장히 특이했다. 일반적으로 공연장의 무대 위는 평면적인 구성 형식을 가진다. 무대 그 자체보다는, 그 위에서 연기하는 주인공들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그래서, 무대를 최소화시킨 채,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게 제일 많이 움직이는 동작이자 가장 많이 쓰이는 동작이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의 무대는 아래에 조금 기울어진 보름달과 위쪽에는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경사진 보름달이 있었다. 기울어진 보름달은 중간 부분이 파여서 계단이 있었다.

때에 따라서 아래쪽 보름달이 조명을 받아서 빛나기도 했고, 위쪽 보름달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요할 때는 위쪽 보름달이 빛을 받아서 빛났다. 처음에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나와서 아래쪽 보름달을 빙빙 돌면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한다. 여자 주인공은 마치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푹 꺾고 다리도 조금은 절면서 빙빙 돌면서 말을 한다. 자기 이름이 보람이었는데, 반에 세 명의 보람이가 있었다고. 큰 보람, 중간 보람, 작은 보람. 이름을 개명하고 나서는 삶에 보람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관객들은 웃음에 터졌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웃는 것을 보면, 이게 진짜 우스운 이야기인가, 의문이 든다. 사회생활에 적응을 하게 되지 못하고 동떨어져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다. 학교 수업을 들을 때도 전혀 웃기지 않은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교수님이 헛소리를 하실 때 웃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웃는 것일수도 있는데, 나는 모두가 웃는 자리에서 진지하게 그들을 쳐다보며 그들이 웃는 이유에 대해 고민한다. 물론 모두가 웃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는 졸려서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도 있다. 웃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웃지 않는 사람들. 우리의 차이는 그 순간에 집중해있느냐 아니면 그 순간에서 멀어져있느냐 그런 차이일 뿐이다.

보람이란 이름의 언어유희일 뿐이다. 그것에 대해 웃어주는 것은 정말 우스워서일 수도 있지만, 공연자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사회적인 소통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나는, 내 자리를 박차고 웃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지금 웃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더이상 공연 따위는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다. 하지만 직접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나도 공연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차리는 사회적인 인간이기 때문일수도 있고, 사실은 그만큼 궁금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고, 그만한 용기가 없는 것일수도 있다. 어느 게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세가지 이유가 다 조금씩 있는 것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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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간중간에 주인공 남자가 학창 시절에 자기가 동급생을 죽이던 과거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그게 처음에는 과거 회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 기억은 주인공에게 뿌리깊이 남겨져서 자꾸만 떠오르는가보다.

동급생은 주인공을 많이 괴롭혔다. 급식에 카레가 나오면 그걸 바닥에 버리고 주인공에게 햝아먹으라고 하기도 하고. 뭘 보냐며 눈 깔라고도 소리치고. 주인공은 칼을 들고 그 동급생을 찌른다. 동급생은 자꾸만 찔러봐, 찔러봐 외치다가 어머니의 전화를 받기도 하고 다시 칼에 찔린다.

그런데 매 순간 떠오르는 장면이 조금씩 다르다. 어쩌면 그게, 주인공의 평행세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세계의 일, 다른 과거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프롤로그에서처럼, 주인공은 과거를 돌리고 싶어서 과거로 돌아가지만, 과거로 돌아가면 어쩔 수 없이 그 동급생을 죽이고 다시 자기가 살인자가 된 미래를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과연 동급생을 죽인 그 과거를 후회했던 걸까? 후회하면서도 과거로 가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를 죽인 것일까?

주인공은 계속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의 그 동급생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운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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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한 아줌마가 나와서 주인공에게 어디 사냐고, 요즘은 잘 지내냐고 묻길래 주인공의 어머니인줄 알았다. 밥솥은 있냐고 한 통 사다주지만, 이상한 점은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던 장면이었다. 아주머니가 신문에 정당방위라고 죽였다는 신문기사에 반박을 하라고 전화통화를 시켰을 때다. 왜 그래야 하지? 궁금했는데 알고보니까 주인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주인공이 죽인 동급생의 어머니였다.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주인공을 아들처럼 돌봐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그에게서 아들의 흔적을 찾고 있엇다. 카레를 주면서 자기 아들이 카레를 좋아해서 며칠씩 해줘도 좋아했다고 말할 때, 주인공은 사실 그 애는 카레를 싫어했다고 말한다. 아주머니는 절규를 한다.

주인공은 자기가 두 사람의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 자기가 죽인 동급생의 삶을, 그 아주머니때문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무의식적으로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처럼 살 것을 강요한다. 주인공은 그 아주머니가 있는 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여자주인공은 그런 주인공을 변호한다. 나라에서 9년 동안의 시간동안을 감옥에서 보내는 벌을 주었고 그것을 통해 그가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 아주머니에게 더이상 주인공을 따라다니지 말라고 부탁을 한다. 만약 그들의 입장이라면 그것이 고통스럽겠지만 아들을 잃어 미쳐버린 엄마의 심정을 어떻게 나라에서 위안시킬 수가 있을까. 나 역시 연극을 보는 입장에서는 학교폭력을 당하고 결국은 살인을 해버린 한없이 불쌍한 주인공 편이 되어서, 자꾸만 그들을 따라다니는 아줌마가 미웠지만 그 아줌마의 자식을 잃어버린 고통은 상상도 못할만큼 클 것이다.

*

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누군가에겐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들이지만, 누군가에겐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무서울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이다. 같은 사람이더라도 자기에게 어떤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에 따라서 다른 행동을 취한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살인을 당한 그 동급생은 '어머니'에겐 효심을 다해야하기 때문에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은 카레도 먹을 정도였고, 전화도 꼬박꼬박 받으면서,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왕따인 주인공에게는 사납게 대한다. 욕을 서슴없이 하며, 수치스럽게 한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특징이다. 결국은 자기가 벌어들인 결말이다. 주인공의 삶에서는 더이상 동급생이 살아남는 미래는 없다. 그의 인생, 평행세계 전체에서 이 세상에 함께 사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만큼 살인충동이 강했던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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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인공을 괴롭히는 건 그 동급생만은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은 매우 폭력적인 분이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 늘 있었던 그런 표준적인 선생의 표본이었다. 1번, 11번, 21번을 발표를 시키는 분이었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체로 벌을 내리는 사투리를 쓰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에게 주인공은 '인권'을 논한다. 선생님은 그가 아니꼬워 그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에게 다 벌을 준다. 그래서 주인공은 동급생에게서 왕따를 당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전부터일수도 있지만 그 일로 왕따가 더 심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인공은 그 선생님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는데도, 그 선생님을 죽이는 대신 동급생을 죽인다. 주인공 역시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했던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도 그 선생님을 죽이는 과거는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선생님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인권'을 주장했던 스스로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어쩌면 주인공은 그렇게 말한 스스로를 계속 원망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름이 바뀌면 그래도 다른 사람이 되니까. 그것은 첫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 것과 오버랩된다. 그 때 자기 삶에 보람이 없어졌다는 여자 주인공의 말에, 남자 주인공은 이름을 바꾼다고 뭐가 달라질까? 질문을 한다. 정말로 궁금했을 것이다. 자기는 이름을 바꿔도 여전히 살인을 저지른 자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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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간에 여자주인공이 바뀐다. 그 의미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A와 B라는 두 가지 노선이 있어.
A는 슬프지만 아름답게 오늘 헤어지는 거야.
B는 내일이나 모레쯤 헤어지는 거야.
대신 아주 비참하게 헤어지게 돼. 어떻게 할래?"


후기 글을 찾아 읽어보니 A라는 대안을 선택했을 때 행복하게 헤어지는 여자주인공인 경우와, B라는 대안을 선택했을 때의 여자주인공으로 이렇게 두가지 결말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 같다. 또는, 젊은 시절의 여자(현재)와 늙은 시절의 여자(미래)를 보여주는 것일수도 있다고 한다. 전자의 추측이 좀 더 정확한 것 같지만 후자인 경우도 나름 괜찮은 해석같다.

나는 그 알기 어려운 주인공의 바뀜보다는 내용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 저 이야기와 함께 했던 게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결말 이야기다.


인터스텔라의 결말에서
겨우 아버지와 딸이 만나는데
그 장면을 굳이 왜 넣은 것일까?
결말만 해피엔딩이라면,
그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해피엔딩인가?
10분 전에 아버지가 죽어 딸과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해피엔딩이 아닌가?


어느 게 더 좋은 선택이냐, 결말이냐는 개인의 가치판단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A와 B를 선택하는 이야기에서 나라면 B를 선택할 것 같다. 사랑하는 이와 어떻게 헤어지든 상관없이, 나는 이 순간에 행복하고 싶다. 만약 A라는 대안을 선택한다면 오늘 고통스럽지만 평생 그와 행복했던 시간을 간직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추억에 불과하다. 과거에 모델처럼 날씬해서 프로필 사진도 찍을 정도였지만 지금 모든 몸매가 망가진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B는 오늘은 행복하고 미래에 헤어지게 된다. 여기서 주어지는 조건이 당장 다가올 미래라서 선택이 별로 차이가 없지만, 대신 오늘은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 그 자체가 행복하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지 상관이 없다.다가올 미래, 그것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는 정말 그렇게 행동하기도 했다. 남자친구와 한번 헤어졌을 때 그래도 서로의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헤어졌었지만, 나는 24시간도 되지 않아 그의 집 앞으로 가서 울면서 구질구질하게 그를 붙잡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잠시 변명하자면 나는 절대 그렇게 구질구질한 사람은 아니다. 이때까지는 전남자친구들을 먼저 찼고 다시는 연락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 남자친구에게는 어쩔 수 없이 매달리게 되는 것 같다. 그가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수십번 고민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또 내가 같은 실수를 해서 우리가 다시 헤어지는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최선을 다하기로 스스로와 다짐했고 그를 붙잡았다. 만약 다시 헤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때는 절대 다정하게 서로를 꼭 껴안으며 헤어질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때 남자친구를 붙잡았던 그 일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똑같이 힘든 일을 겪은 인물 (가)와 (나)가 있다고 하자. (가)와 (나) 모두 힘들 일을 겪었지만, (가)는 실패하고, (나)는 성공했다면 (나)의 인생 이야기는 성공스토리가 되고 (가)는 서울역 노숙자가 되겠지. 그리고 우리는 인생에 어느 정도 실패가 있어야 자수성가의 의미가 있고, 그를 부를 대대로 물려받은 이보다 더욱 높은 가치를 가진 사람으로 존경하고 부러워한다. 둘다 동일한 경험을 겪었고 성공과 실패의 여부가 단순히 운이라고 가정할 때조차 마찬가지다. 우리는 속세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고, 성공이 무엇인지에 관계없이 실패보다는 성공을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의 말에 기분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와 명예 등에 관계없이 자기 삶에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경우를 성공이라고 가정했다.)

인터스텔라의 해피엔딩에 관한 것에도 결말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해피엔딩이 아니라면 그의 삶은 의미가 없는 걸까? 라는 질문은 생각해볼만 하다. 사업에 실패해 만약에 노숙자로 산다면 그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렁뱅이 인생일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바라보고 거기서 욕구와 싸우며 좀 더 나은 삶으로 가기 위해 애쓰는 삶. 그것이 지금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어쩌면 그래서 인터스텔라를 인상적으로 봤던 것 같다. 그들은 탈출하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그 순간 순간을 기다리고 최선을 다하고 준비를 했고, 결국은 떠났다. 무중력에, 산소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극단의 상황을 제공해서 시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우리의 삶 속의 고통을 극대화시킨다. 그 속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발견한 것이지, 우리는 결말의 딸과 재회하는 모습에서 흥분한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던진 물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국은 살인을 저지른 과거도 있더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삶에게 던진 질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살인을 저지르고 9년간 감옥에서 썩고, 다시는 평범한 사회에서 일을 할 수 없더라도 그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그의 삶에는 의미가 있을까? 그건 앞으로 그가 살아갈 삶에 따라 달려있다. 남의 삶에서 그의 삶은 의미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이다. 남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만족을 위한 의미없는 행동에 불과할 뿐이고. 그래서 다시 한번 결론을 내리며, 나의 삶의 가치는 그저 나 자신으로 살고 있는 것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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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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