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조선 양반의 록, 전범선과 양반들 인터뷰.

전역 축하드립니다. 다시 훨훨 날아봅시다.
글 입력 2018.09.1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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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와 가수 전범선이 카투사로 복무 당시 진행한 인터뷰이며 당시 정훈장교에 의해 게재가 금지된 글이다. 전립선과 양반들이라는 거짓이름으로 내보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이제는 두 명 다 전역을 함과 더불어 범선 형님이 홍대로 돌아온 것에 발맞추어 밖으로 꺼낸다. 앞으로의 공연과 함께 새로 발매 될 앨범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며 과거 인터뷰를 진행해준 것과 더불어 답답한 군 생활 속 이러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음에 감사를 보낸다. 혁명도 사랑도 모두 잘 써내려가는 전범선과 양반들. 아래는 2017년 겨울에 진행된 스트레스 많이 받던 군인 둘의 대담이다.




누군가는 얼마만의 들어보는 해학인가라고 평했고 누군가는 갈증을 달랬다. 3집 음반<방랑가>로 돌아온 전범선과 양반들. 1집 전범선의 앨범인 <사랑가>를 시작으로 광화문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외치던 2집 <혁명가> 그리고 현재 소요산에서 카투사로 방랑하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1. 안녕하세요. 시작에 앞서 간단하게 소개 및 인사 부탁드립니다.

- 저는 노래하고 글 쓰고 하는 전범선입니다. 전범선과 양반들이라는 록밴드를 하고 있고요. 지금은 소요산에 살고 있습니다.


2. 전범선과 양반들. 전범선씨는 보컬을 맡고 계신분이고 나머지 세 분들은 양반들. 양반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신중현과 엽전들, 장기하와 얼굴들 같이 다들 의미를 갖고 있을 텐데요. (신중현과 엽전들에서 엽전은 현재의 비하와 자조의 ‘김치’라는 의미로 쓰였다.)

- 전범선은 제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름이고 양반들은 큰 가락에서 봤을 때는 엽전들, 김치들이랑 맞아요. ~와 ~들이라는 형식 자체가 신중현과 엽전들에서 비롯된 일종의 한국 록의 전통이니까. 근데 그것과는 반대의 의미가 또 있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엽전들이나 김치들은 자조적인 약간 자기 비하적인 냉소가 섞여있는 거잖아요. 마치 장기하와 얼굴들처럼. 근데 저는 그건 아니거든요. 양반들 이란 게 우리는 스스로 김치, 퍼킹 김치맨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 반대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인터뷰를 많이 할수록 느끼는 건데 저는 민족주의자가 아니거든요. 사람들이 민족주의자로 보긴 하는데, 민족주의를 강요하는 학교를 나오기도 했고. 그래서 민족주의를 연구를 많이 했어요. 해보니 저는 민족주의가 아니고 민족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이에요.

제가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하거나 음악을 할 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얘네들 앞에서 멋있는 것을 하고 싶다. 물론 양반들이 지배계급으로서는 굉장히 나빴지만 또 조선에서 멋있는 것들은 양반들이 다 했거든요. 그런 Classy한 것의 나쁜 것들보다는 좋은 것들을 담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에요. 처음 지었을 때는 음악만 하려는 생각이 없어서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밤에는 풍류도 즐긴다. 그런 전인적인 르네상스형 삶을 살고 싶어서 지은 것도 있고요. 그걸 양반들한테 강요했죠. 그런데 뭐 요즘 세상에 민주주의가 뭡니까. 이 양반 저 양반 하면서 다 양반인 사회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가 성이 있잖아요. 성이 있다는 건 모두가 양반이라는 거죠. 이제 그런 사회에서 혁명적인 의미도 있고 다 갖다 붙이는 거에요. 양반처럼 멋있게 살고 싶다!


3. 최근에 멤버 교체에 관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기타(최현규), 베이스(이상규), 드럼 및 음향 감독(김보종)

- 고등학교 선배인 최현규 형은 회사와 전속계약을 했던 것이 아니어서 자기 길을 가기로 했죠. 음악을 계속 할 지는 모르겠어요. 원래 기타 치는 제 친구인 상규는 장원혁이 떠난 베이스를 도와주러 들어왔다가 현규형이 나가니까 이제 상규가 기타를 치게 되었죠. 그리고 아직 공개는 안됐는데 베이스 치는 멤버랑 건반 치는 멤버를 새로 계약했어요. 완전 이제 전범선과 양반들 1기는 끝났습니다! 2기가 시작됩니다! 5인체제로.


4. 민족 사관고는 선택해서 가신 건가요?

- 네 엄마는 대원외고 가라 그랬는데(웃음) 민사고 캠프를 한 번 다녀오고 나서는 운동장이 너무 크고 잔디로 되어있어서 난 무조건 여기 가야 된다. 가서 축구도 하고 조정도 하고. 어렸을 때는 운동을 지금보다 더 좋아하고 많이 하기도 했었고 초등학교 때는 축구선수도 하려 그랬거든요. 근데 운동은 하나의 방법론이었던 것 같고 그런 시골에 들어가서 애들이랑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대원외고도 가보고 용인외고도 가봤는데 캠프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은 민사고였기 때문에… 낭만… 촌놈인 거죠 제가. 제가 다 촌만 다녔거든요. 미국 다트머스도 촌에 있고 대학원 옥스포드도 마을 하나고 사실. 다 자연이 가깝고 지금도 당연히 용산미군기지 갈 줄 알았는데 촌으로 가다 보니 촌에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근데 동두천이 또 록의 본거지 아닙니까. 의미를 나름 삼고 있습니다.


5. 최근에 통일부 주관 유니 뮤직레이스에서 전범선과 양반들이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는데요. 다시 한 번 축하 드립니다. <전선을 간다>라는 노래로 참여하셨는데 한미 연합 구호가 많이 들려요. “같이 갑시다!”. 의도가 약간 있는 건가요?

- 제가 일종의 놀이를 한 거죠. 군인 신분으로서 대회를 나가는 것 자체가 영리활동이 안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최대한 해보고 싶어서. 또 군인 신분이 주는 제약이 있고 대회 성격이 주는 제약이 있고. 군인이 할 수 있는 말에서만 대회가 좋아할 것이고 정부에서 허가해주는 자유민주주의와는 좀 어긋나고 다르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를 위해서 군인들에게 허용되는 선에서 최대한의 장난을 해보고 싶은 어떤 거였죠. 예를 들어 “같이 갑시다”라는 한미 구호를 북한 병사에게 대상으로 쓰는 거잖아요. 그리고 전선을 간다라는 육군가를 평화주의적인 통일 노래로 바꾸는 것이고. 전우여 동무여 하는 것들은 사실 가능한 것들인데 오묘한 느낌이죠. 재밌는 줄타기를 한 거에요. 상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당연히 하긴 했는데(웃음) 제가 EBS 헬로루키 할 때도 1등 할 줄 알았는데 상을 안줘서 어…이번에도?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상을 받아서 아 내가 작년에 혁명하길 잘했구나. 이게 되게 중요하죠 이전 체제였음 못 받았을 것 같은데.


6. 앨범의 서사를 보면 1집<사랑가>, 2집<혁명가>, 3집<방랑가>앨범 제목만 봐도 그 수록곡들의 느낌이 직관적인데요. 마치 서양 현대 철학의 흐름 같기도 해요. 실존주의에서 구조주의로 거기에서 또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앨범을 만드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 근데 되게 신기해요. 예언가 같아요 제가. 선지자의 능력이 있는 것 같은 게 사랑가를 내고서 바로 영국에 갔어 14년 가을에. 영국에서 1년 동안 동화와 같은 사랑을 했어요. 아무런 걱정 없이. 옥스포드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긴 해요. 굉장히 안락하고 사람들 다 행복하게 보이고 자유롭고 상아탑의 거품 안에 있으니까. <낙원 아파트>가 현실이 된 거에요. 근데 거기 있는 동안에 혁명가를 쓴 거에요. 사랑가를 누리는 동안 혁명을 썼어. 그냥 재미 삼아 썼어. 근데 그 다음해 되니까 진짜로 혁명이 일어난 거에요. 혁명가 활동 하는 동안 방랑가를 썼어요. 물론 그때도 힘든 일이 있었지만, 방랑가를 쓰고 군대를 왔는데 진짜 “좆이나 뱅뱅” 하고 있는 거에요. 군대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서 방랑가를 쓴 건 아닌데 요새 되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든요 군대에 있으면서. 말하는 대로 다 현실이 되더라고 그래서 다음 정규앨범은 <희망가>로 쓰려고요(웃음). 너무 힘들어요. 내년에 공개하는 건 이제 당분간 정규앨범은 아니고 싱글이나 EP로 해서 잔뜩 만들고 있습니다. 정규 앨범이 <희망가>로 나와야 사람이 좀 행복해지고 희망적이고 하지 않을까.


7. <방랑가>곡들을 <혁명가> 부를 적에 썼다는데 어떤 감정 간의 괴리가 있진 않나요?

- 방랑가 곡 쓸 때는 혁명하고 왔고 밤에 혼자 쓰는 거니까 그 허탈함이 더 크죠. 그때 굉장히 정열적으로 쑤시고 다녔거든요 삼월에 음반이 나오고 12월 입대할 때까지 한 해 동안. 상당히 몰아쳤어요. 11월에 광화문에서 사람들이 다 모였던 거고 12월에도 그 열기가 남아 있었고 입대 전전날에 ‘나그네’ 뮤직비디오 찍고. 정말 몰아치다 왔죠. 근데 그런 상황에서 밤에 곡을 쓸 때는 개인적인 일도 굉장히 많았고 힘든 일도 꽤 있었고. 바쁘게 움직이는 만큼 잃어버리는 것들도 많고. 그게 혁명 뒤에 오는 허전함이라고 비유인 건데 실제로 적용된 거죠. 제가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들이 많았거든요. 멤버들이 떠나가고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편찮으시고 애인이랑도 헤어지고 그래가지고… 다 그 시기에 이루어진 것들이라. 혁명을 하다 보니까 놓치는 것들이 많은 거죠. 포스트 모더니즘인지는 잘 모르겠고요(웃음). 근데 또 맞는 것 같아요. 혁명이 근대적인 아이디어니까 혁명이 안된다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탈근대로 가야 하기 때문에. 근데 진짜 맞는 얘기에요. 방랑이라는 게 목표가 없는 행위잖아요. 굉장히 동양철학적인.. 혁명이란 건 굉장히 서양 철학적인거고.


8. 이전 인터뷰를 보며 의아했던 점이 생겼는데요. 희망적이고 급진적이었던 1집 이후 옥스포드 대학에서 프랑스혁명, 미국혁명을 배우며 온건한 자유주의자로 바뀌었다. 어떤 의미인지 물어봅니다.

- 틀린 말은 아닌데 제가 그리 온건하진 않아요. 상대적으로 온건하다 정도로. 근데 저건 문맥에서 좀 어긋난 것 같고요. 더 온건해져서 자유주의자가 됐다. 굳이 나누자면, 옥스포드에 있으면서 제 교수가 굉장히 보수적인 자유주의자였어요. 굉장히 영국스러운. 데이비드 흄을 좋아하고 이런 사람이었는데 계속 저를 밀어붙이더라고요. 거긴 다 1대1일 수업이라서 가서 맨날 대화하고 발리고 했는데 혁명사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얘기하면 계속 딴지를 거는 거에요. 결국 끝은 하나 더라고. 자유와 평등이란건 충돌하고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하지만 자유와 민주라는 건 충돌하잖아요. 그 모순의 다다르지 않으면 좋은건데 그 모순에 내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발생했을 때 자유를 택할 것이냐 평등을 택할 것이냐는 사실 개인의 취향이잖아요. 거기서 자유를 택하면 리버럴인거고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평등을 택하면 소셜리스트인건데 저는 거기서 굉장히 부르주아임을 깨달았죠. 자유가 먼저구나. 저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는 아닌데 정치적 자유주의자로서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방랑이 더 중요한 것이고. 굉장히 개인적인 이야기죠.


9. 일전에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을 원어로 읽으시는 걸 봤습니다. 그것이 이번 앨범의 곡들에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또 이번 앨범 설명에 만다라는 김성동, 서울의 예수는 정호승, 이쾌대와 나도향. 다양한 문인들과 장터에서 얻은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 그건 좀 거창한 것 같고. 소재를 훔쳐온 거죠 제가. 근데 김성동님이나 정호승님의 문학을 잘 알지도 못하고 나도향 원작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고 이쾌대도 그림 몇번 봤을 뿐이고 훔쳐 온것에 대해 예를 표하는 정도인 것 같고요. 올더스 헉슬리는 되게 중요한 게 제가 옥스포드를 간 이유 중 하나가 헉슬리에요. 다트머스에 있을 때 헉슬리 집안의 철학 공부하고 헉슬리가 버트란드 러셀이랑 되게 친하고. 제가 굉장히 영미철학적인 사람이거든요. 대륙철학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재밌어하긴 하지만 저는 영미철학 쪽에 더 가까운 무신론자이고 실용주의자고 과학중심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헉슬리가 한 걸 되게 좋아해요. 제가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베일리올 컬리지라는 옥스포드에서 가장 급진적이라고 소문 나있는 곳을 나왔어요. 제가 생각하는 지적인 영웅들이 책읽던 공간들이 그대로 있으니까 개인적인 만족감이 엄청났어요. 거기에서 읽으면서 올더스 헉스리를 귀감으로 삼는 이유가 서양의 양반이고. 저는 양반이라 생각했을 때 조선 양반보다 영국 귀족들이 많이 생각나요. 옥스포드에선 양반들이 하는 행위를 해요. 밥 먹을 때 라틴어로 기도하고 가운입고 와서 이러는 것 보면 저는 상놈 출신으로서 되게 짜증나는 것도 있는데 일단 비싸니까. 근데 자존심이 보인다는 것에서 멋있기도 해요. 영국의 문화적 보수성 뒤에는 일종의 자존심이 있어. 조선은 식민과 전쟁을 통해서 다 끊겼는데 거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민족주의라기 보단 개인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것은 멋있는 것 같아요.

올더스 헉슬리는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답을 동양에서 찾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올더스 헉슬리의 책을 부대에서 하나 번역해서 내년이면 출판이 될 것 같아요. Doors of Perception(인식의 문)이라는 책인데 내용은 마약 얘기에요. 마약은 소재일 뿐이고 약물을 통해서 받는 경험과 동양적인 불교철학적, 힌두교적인 깨달음에 대한 연결을 지적으로 처음 지은 사람이에요. 반문화인 60년대 히피문화와 50년대 비트족 문화, 비틀즈도 인도에 가고 The Doors도 불교에 심취해 있고 시작을 열어준 사람이 올더스 헉슬리 거든요. 서양철학, 기독교철학 혹은 맑시즘에 답이 없다 느끼면 동양철학으로 가는구나. 제가 조선쪽으로 돌아가는 창구를 연 사람이 헉슬린 것 같아요. 서양철학이 멋있다 멋있다 해서 끝까지 갔는데 헉슬리는 인도 가있고. <영원의 철학>이 그런 내용이에요. 전 사상사를 통틀어서 무언가를 본 선지자들은 한 말들이 다 똑같다. 영원히 진리인 것들만 모아 놓은 일종의 잠언집이에요 영원의 철학은. 거기에서부터 저는 더 이상 제도하에서 공부하고 싶지 않고 제 나름의 기조를 찾은 것 같아서 박사도 안하려 했던 것이고. 그런게 기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에 방랑가가 나왔던 것 같고 사운드는 제가 아직 원하는 만큼 사이키델릭 하진 않은데 앞으로 좀더 그런 방향으로 갈 것 같아요.




10. 2집 타이틀곡 ‘아래로부터 혁명’은 2017년 제 14회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락음악상을 받기도 했지요. 이 노래는 작년 광화문에서도 또 여러 곳에서 널리 울려 펴졌죠.
 
- 그 전에도 진보적인 특정 정당에서 전당대회 때 한번 와달라 요청이 있었고 돈을 있는대로 줄테니. 근데 그때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이어서 못갔고. <혁명가>, 아래로부터 혁명이라는 노래를 하는 록밴드가 있으면 그쪽에서 수요가 있을 테고 민중총궐기가 있을 당시에는 모든 국민이 그랬겠지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혁명가라는 공연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연이 열린다, 집회가 커질 것 같다’ 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가 본부에 연락을 했어요. 그 때 까지는 정기적인 공연이 열리고 사운드 시스템이 들어온 것이 아니어서 이 날에 이승환 선배님이 장비를 갖고 공연에 들어오시니까 이 날에 같이 공연을 해라 라고 들었는데 그 이후에 출연한다는 요청이 빗발쳤어요. 그런데 저랑 주최하시는 분이 약속 하셨으니까 무대를 세워주긴 세워줘야 하는데 전범선과 양반들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들이 계속 해달라고 하니 저희는 계속 앞으로 밀려지고 그 사이에 크라잉넛도 오시고 조PD 등도 오시고 많이 오셨죠. 그래서 첫 순서쯤에 했죠. 무대에 서는 게 의미가 있는 거니까.


11. 또 일전의 인터뷰에서 혁명은 짧습니다. 혁명의 끝난 이후 허무감, 실패감, 상실감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말은 이번 방랑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텐데요. 민주화 운동이든 짧은 혁명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소시민적 삶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까요. 혹은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과거를 비추어 봤을 때 그때는 우리가 아는 것만큼 많이 알지 못 했을 수 있었죠. 우리는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혜택이 있는 거니까. 저는 실질적으로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은 동물운동을 하려 하는 것이고 신분의 제약상 제대로 활동을 못하고 있긴 하지만. 동물권 운동이라는 것도 또 요즘 여성주의가 화두이기도 하고. 제가 효과적인 목소리로 낼 수 있는 분야가 동물권인 것 같아요. 동물권 운동하는 남자가 적기도 하고 차가운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좀 필요한 것 같았어요. 방법론적으로 봤을 때 제가 예전보다 온건해졌다고 말하는 이유가 효과적인 것이 개인이 하나의 예시가 최고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동물권이라는 개념이 있고 채식이라는걸 해야 하는데 제가 바로 “혁준씨 고기 먹어요? 어떻게 그럴 수 가 있어요? 어떻게 시대의 책임을 방기하고 수많은 동물의 고통이 보이지 않아요?” 혹은 “엄마는 광주 때 뭐했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발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다고 당장 바뀌지 않잖아요. 저도 처음에 1~2년은 분노에 차있어서 내가 이렇게 공장식 축산업에 동조하고 있었구나 나를 속였구나 이러면서 괴롭혔는데 그랬던 경우에는 아무도 전도를 당하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이런 사람이 채식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구나. 이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는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기만 해도 주변사람들한테 제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들을 봤어요 따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 입장에 존중해주는 사람도 늘고. 굉장히 자유주의적인 방법론인데 저는 그게 가장 현실적인 것 같아요 여성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저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폭력은 정당화되지 않다 생각하고. 가능하다면 저의 예시를 통해, 자유로운 대화와 설득으로… 천상 리버럴 다됐네. …(웃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런 게 안 먹히는 체제가 있어요. 여기 같은 경우에는 아무런 대화가 통하지도 않거든. 제가 계속 여기 살아야 한다면 혁명론자가 되겠죠.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가 그만큼 성장했으니까 이런 얘기할 수 있는 거죠. 북한이었으면 혁명하자 했겠죠 탈출하거나. 탈출해야겠네 혁명하면 죽으니까.


12. 학림다방에서 백기완 선생님을 만나 얘기 나눈 것을 보았습니다. 누군지 못 알아 뵙고 일제강점 당시 사연을 들으며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 조차 줄어듦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있었는데 어떠한 얘기를 나눴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 저도 잘 몰랐어요. 광화문에서 처음 뵀어. 공연하는 날 도올 선생이랑 백기완 선생님이 오셨는데 그때도 그냥 인상에 굉장히 강하게 남은 게 광화문 전체에서 한복 입고 있는 사람이 나랑 백기완 선생님 밖에 없었어. 백기완 선생님은 까만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고 저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고. 백기완 선생님 입고 계신 옷이 ‘질경이 우리 옷’ 이기연 대표님이라고 저희 많이 도와주시는 분이신데. 그날 제가 입은 옷은 이기연 대표님 옷은 아닌데 평소에 입고 다니는 많은 옷들이 질경이 옷이라. 정신이 담겨있죠. 이기연 대표님은 백기완 선생님의 모든 옷을 다 만들어주셔서. 그때는 그냥 저 사람이 누구지? 인상이 눈에 익었고 전인권 선배님이 무대에 올라가서 우리나라 최고 어른이라고 백기완 선생님을 소개 했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이기연 대표님께서 한 번 만나봐야 한다고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빨리 한 번 만나보라고 해서 찾아 뵙게 된 거고. 가서 많이 혼났어요. 가면 다 혼나요. 어떤 분인가 보고 싶었던 거죠. 제가 그분의 입장을 다 동의하거나 하진 않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존중하고 충분히 인정과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하는 분인 것은 맞다고 생각을 하고 지금 조선땅에서 한복을 가장 멋있게 입는 분이라 생각했어요. 혁명가의 눈에는 항상 록스타적인 모습이 있어. 그걸 좀 배우고 싶었어요. 강렬 하시더라고요.

학림다방을 50년 째 매일 가세요. 그런 공간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곳이 사실 역사거든요. 제가 런던을 좋아하는 이유가 카페 하나하나에 수 백 년의 역사가 있어. 여기는 누가 와서 놀던데 조지 버나드 쇼가 와서 커피마시던 데, C.S 루이스랑 톨킨이랑 싸우던데 이런게 써있어요. 그런 이야기들이 남아있는 게 멋있고 양반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고 물론 그런 문화적 보수성들이 있어서 영국이 안되는 것도 많지만 분명 멋있는 것들이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아직 그런 게 길어봤자 50년인거잖아요 전쟁 후니까.


13. 케이팝스타 출신 안예은씨와 함께 늴리리야라는 곡을 함께 했지요. 안예은 씨는 위안부 관련 팔찌, 일제 강점 관련 곡뿐만 아니라 고유한 개성으로 사랑 받는 가수인데요. 저는 이분이 이렇게 까지 낭낭하고 청아한 목소리를 가졌는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 이 분 목소리가 나오면 광장이 펼쳐져요. 저는 또 계곡이 보여요. 예은씨를 많이 뵙지는 못했었고 녹음실에서 뵀었을 때가 처음인가 두 번 째였던 것 같아요. 체형도 작으시고 저는 케이팝스타 나오셔서 ‘홍연’하는 것을 봤었고. 녹음실에서 제 노래를 들려드렸어요. 노래를 미리 듣고 오시긴 했는데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지만, 제가 악보를 그려놓진 않거든요. 처음엔 사실 백킹 보컬이 필요해서 여자 목소리가 있으면 좋겠다 해서 불렀는데 부스에 들어가서 목을 푸시는 순간 아 2절은 그냥 다하세요(웃음) 피쳐링으로 좀 해주세요 했죠. 저는 처음엔 피쳐링을 생각 안하고 쓴 거라 남성 키였는데 예은씨한테 너무 낮았죠. 그게 너무 아닌 것 같아서 어떡하지 하다가 예은씨가 “하나 더 올려서 부를까요?”해서 어떻게 한 옥타브를 더 올려요? 했는데 부르더라고. 어후 진짜 로큰롤이더라고요. 저는 창을 하셨나 했는데 전혀 아니고 록을 좋아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랬습니다. 아 나는 노래하면 안되나 이런 생각을 했었죠. 드럼 치는 형이 음향 감독이어서 연이 있었는데 함께 해보자 한 거였고 오버워치를 좋아하셔서 답례로 오버워치 선물을 보내드렸습니다.


14. 많은 활동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인종 차별을 넘어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종차별주의를 없애려는 노력도 하고 계시고. 현재 군생활 하시면서 채식만 한다 들었습니다. 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린 헐버트박사의 기념사업 중 일환인 헐버트 청년모임의 대표이시기도 하죠.

- 아..(웃음) 역사에 비밀은 없습니다. 맞아요 지금은 사실 제가 모임이자 대표여서 지금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에요. 저는 아까도 말했듯이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말의 함의 중 하나가 우리 민족 것이라고, 우리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도 부정하기도 하고 이 땅에 사는 거라고 해서 칭송하는 것들이 되게 많잖아요. 저는 그 중에 한 8할 9할 정도는 다 거짓이라 생각을 해요. 그 중에서 제가 아무리 전 세계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건 멋있다라고 여기는 것이 한글이고 그걸 일찍이 알아 본 사람이 헐버트고 저의 대학 선배이고. 그것도 도서관에서 책보다가 우연히 헐버트가 쓴 대한제국멸망사라는 발견하면서 뭐지? 이 분은 120년 전에 조선에 가서 역사책을 쓴 것이지? 하면서 올더스 헉슬리랑 마찬가지로 발견하게 되고 거기에 빠져서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화두로 잡았고. 지금은 별로 안보긴 하는데 번역도 하고 다 해가지고. 그 당시에 큰 충격 중 하나는 한글이 배우기 쉽고 민주적이라는 점. 이 것은 제가 한글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널리 알려야 하긴 하는데 이것 또한 민족주의적인 프레임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요. 민족주의가 다문화 가정, 인종, 타문화에 대한 배척을 야기하고 민족주의가 내포하는 집단주의가 가장 싫고. 역사적으로 거짓이고 민족이란 게 허상이니까.


15. 내년 여름에 또 다른 앨범 계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군 안에서 느낀 것들이 소재로 사용될 예정인지요?

- 저는 이상한 게 아까 말씀 드렸듯이 혁명할 때는 혁명 얘기 안 쓰고 방랑 할 때는 방랑얘기를 안 할 것 같아서 지금 사실 작업하는 것들은 군대 오기 전에 다 썼던 곡들이에요. 방랑가에 들어갈 뻔 했던 했던 곡들 중에서 남은 곡들이 굉장히 많아요. 여기서는 계속 군대 나가서를 생각하고 있어요. 희망가는 아직 시작도 안했고. 사실 오늘 대중음악사 읽으면서 1920년대에 희망가라는게 있다 해서 이거 괜찮겠는데? 하고 생각했던 것이고. 여태 작업한 것은 록의 대한 화두. 조선땅에서 록이라는게 뭘까. 무형문화재 보존하는 것 같거든요 저는. 록은 점점 재즈화 되어가고 있고 재즈는 점점 국악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희귀하기도 하고 록의 역사가 길기도 길고. 역사가 없었다면 저도 관심이 없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여기에서 록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 가에 대한 화두가 있었고 사랑 노래는 항상 쓰는 것이고 영어 노래도 쓰고 있어요. 요새 인정했어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에서는 못느꼈는데 미국령에서 근무하다 보니까 아 내가 우주의 입장에서 봤을 땐 미 제국의 거대한 하부 관리일 뿐이구나. 신중현의 엽전들도 여기서 나온 것이고 미국의 변방에서 나왔다는 게 나쁜 것이 아니라 저의 가장 객관적인 위치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해서 영어 음악도 좋아하고 글쓰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해서 굳이 영어로 곡을 안쓰기는 없다. 처음에는 영어 노래가 너무 많아서 한국어로 쓰고 싶어서 시작했던 건데 둘 다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해서 이제 쓰고 있어요. 군대 얘기는 몇 개 있긴 한데 무료배포하든가 해야죠.


16. 역사를 교육하는 사람과 더불어 계속해서 노래 부를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어떤 사람이 마저 되고 싶은지 듣고 싶습니다.

- 역사 교육이라 하면 거창하고 그냥 글쓰고 말하고. 저는 역사를 주로 공부한 사람이니까. 유시민 작가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서양에는 Public intellectual이라는 개념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이제 학자들에게는 욕먹지. 학자가 아니니까. 근데 유시민 작가는 지식 소매상이라고 표현하시더라고요. 생산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인정하시는데 대중과 친밀하게 소매업을 한다고 표현하는 것 같아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글쓰고 방송도 하고 강연도 하겠죠. 인문학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으니까 음악도 저의 이야기를 퍼트리는 일이잖아요. 역사책도 쓰려고 하고 있고. 한국의 역사를 미국의 역사와 연관지어서 대한민국이란 현상 자체를 미합중국이 확장해가면서 탄생한 결과라고 보는 사관을 정립하고 싶어요. 민족사관 말고 신라나 단군왕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미8군이다. 하지 중장이 들어와서 딱 한 거라 홍익인간이랑 별 상관이 없어요 대한민국 체제 자체는. 그걸 얘기 안하고 일제를 더 얘기하죠. 불편한 진실이죠. 좌파는 싫어하는 진실이고 우파는 숨기고 싶어하는 진실이고. 그것을 좀 정면 돌파하는 관점을 좀 가다듬고 있습니다. 제목은 문재인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가져올 것이라서 ‘대한미국’이라고.


17.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어떤 것이든 좋으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좆이나 뱅뱅이다. 이 시벌 

좆뱅이의 어원을 아세요? 확실한 어원은 없는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한 것은 좆을 팽이로 생가하면 돼요. 이 귀두가 도는 꼭지점이 되어서 상상이 가죠. 좆뱅이 깐다라는 말이 곧 친다. 둘다 팽이를 돌리는 행위에요. 그걸 사람으로 치면 정말 극한의 고통이잖아요. 팽이가 된 사람. 네이버 지식인에서 본 건데 이게 사실 굉장히 무의미한 행위이고 본질이 좆팽이라는 건데. 우리는 정력에 좋다는 걸 다 하잖아요. 나무로 남근상 만들기도 하고. 나중에 약간 남근상 모양의 팽이를 만들어서 까는 행위예술을 하고 싶어요. 어제부터 들었던 생각이에요. 좀 잘 만들어서 잘 돌아가게. 티셔츠도 하나 만들고 해서. 이게 지금 저의 심정입니다.

좆뱅이 깐다. 그게 조선 청년의 현실이 아닌가. 청년세대가 부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회는 부유(富有)한데 부유(浮游)하고 있어요 방랑하는 것 같고. 다들 비슷한 것 같은데 부모세대에게 의미를 부여했던 민족이 됐든 종교가 되었든 새마을 운동이 되었든 사회주의 강성대국이 되었든. 다 의미가 없잖아 우리한테는. 각자 떠있잖아요. 그게 우리 세대의 정신인 것 같은데 그래서 문화예술적으로 흥미로운 것 같아요. 20년대의 로스트 제네레이션이 될 수도 있고 비트 제너레이션이 될 수 도 있고. 역사적 조건이 처음 갖춰진 세대가 우리라고 생각해요. 민주화 이후에 태어나고 경제적인 큰 배고픔 없이 자란 그리고 열려있고. 그런 움직임들이 보여서 얼른 여기를 탈출해서 재미있는 일들을 하고 싶어요. 같이 했으면 좋겠네요.


18. 1집의 시작, 2집의 출사표, 3집의 성숙 계속해서 발전하고 담아내는 모습에 앞으로가 더욱 기대가 됩니다. 오늘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잘 나오는지 그걸 3집내고 알았어. 힙합하는 사람들은 믹스테입 내잖아 저는 곡쓰면 다냈어요. 그래서 이제 정규앨범은 잠깐 미루려고 하는 거고. 먹고 살아야해서 이제는 더 잘 나올 겁니다. 사랑가도 좋았고 혁명가도 좋았지만 방랑가는 더 좋은 음반이라 생각해요. 떠나있을 때 가정하고 쓴 건데 갑갑하네요 떠났다기 보다는 갇혀있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나그네 나는 낚으네.

이 얼마나 유쾌한 대화의 연속인가. 인터뷰를 진행함에 있어 계속되는 웃음은 그의 지식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유머 때문일 것이다. 풍자와 해학을 왔다갔다하는 줄타기는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었고 그의 발화에서 중간중간 느껴지는 어투는 사람 전범선이 느껴진다. “이 냥반 저 냥반 집 자제 훈장질해서 무슨 나랄 구하랴” 했건만 이 사람이 하는 훈장질은 오래토록 혹은 질리도록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아는 많은 꼰대들의 일장연설과 자기는 그래도 착한 사람이라는 호소와는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전범선에게서 느껴지는 여유가 부럽다. 그것이 자유의 발로이든 명석함으로부터 온 것이든 여러 것으로부터 달궈진 침착함. 쉽사리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대 속 위인들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그들과 동등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자부심.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쉽사리 행할 수 없는 자존감 그 양반스러움이 보인다. 그에게는 자유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침착한 분노가 있다. 충분한 숙고와 사유를 통해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자유주의자라고 말한다면 보수를 주창하는 사람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베지테리언에서 비건으로 동물해방운동을 하며 자기 배려를 하는 그는 자유주의가 잘 이루어지는 곳에서 민주주의가 피어 오름을 몸소 보여주려 하는 듯하다. 그의 자유주의는 사회적 자유이며 이 땅의 리버럴보다 앞서간다.
 
민주주의는 사실 아나키즘이다. 랑시에르적 표현으로는 police(치안)가 아닌 politique(정치). 모든 사람이 주인이기에 하나의 획일적인 지배가 없는 것. 우리의 주권을 양도하고 대의민주나 절차를 통해 문제를 유보하는 것이 아닌 직접적인 참여로 인해 옳고 그름을 논하며 각자가 고유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율이 될 수 있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말한 코뮤니즘이 될 수 있다. 시인 김수영은 <달나라의 장난>에서 팽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도는 팽이, 공통된 무엇으로 도는 것이 아닌 개개인이 고유한 중심으로 도는 것, 자기만의 스타일로 도는 팽이다. 그렇게 거부되는 공통의 중심은 이념, 종교, 자본, 권력이다. 그가 꿈꾸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되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고 시인이라는 구별이 없어지는 사회, 시인이 불필요해진 사회이다. 언어의 고통만이 아닌 언어 이전의 고통까지 느낄 수 있어야 함이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가 가지는 의미일 것이다. 인문학은 무릇 감정의 고유성이기에 정치적 정신의 회복이라는 강신주의 해석에 동의한다. 고통이 없는 자유는 억압된 자유라는 점까지도. 좆팽이에서 고통이 오는 것은 그렇게 다른 것이 중심이 되어 휘둘리기 때문이지 않을까. 개개인의 고유성은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사랑은 너와 나를 관통하는 것이며 지독히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고통으로서의 예술이다. 비겁하지 않게 고통을 여실히 느끼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권위와 권력, 검열에 도전하는 일만큼 필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배후에 있는 자본의 논리는 또 어떻고. 구조에 대한 비판은 곧 그러한 구조에 부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더럽게 힘들지만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자유를 보여줌에 있어서. 전범선과 양반들 그가 조선 땅에서 록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정립될 것인가를 기대한다. 기저에서 느껴지는 긍지로서의 휴머니즘. 남루함과 갈증의 해소를 부탁한다.




[김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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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김나연
    •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ㅋㅋㅋ후아 전범선과 양반들 신곡 나오면 또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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