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사진만 보고 혼약, 큰 낭패! 연극 < 운명 >

순응. 혹은 곧 죽음이더라도 해방을 향한 발버둥.
글 입력 2018.09.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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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사진만 보고 혼약, 큰 낭패!
연극 '운명'


미국에 있는 신랑,
조선에 있는 신부.
사진만 보고 혼약 큰 낭패.

-매일신보 기사, 1915년



국립극단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운명>


국립극단이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아홉 번째 시리즈로 윤백남의 <운명>을 선보였다. <운명>은 근현대 희곡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으로, 1921년 초연 이후 약 97년 만에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공연에 그치지 않고, 국립극단은 지난 9월 15일 국립극단 이야기마당2 ‘우리연극의 풍경 1920-1930’을 개최해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더했다. <운명>과 개화기 극에 대한 이해도뿐만 아니라, <운명> 다음으로 무대에 오를 <호신술>에 대한 기대 역시 높일 수 있는 자리였다.

<운명>을 쓴 예술가 윤백남은 연극이 가진 사회적 기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작가로, 실제로 극단을 조직해 다양한 연극 활동을 했다. 그 중 <운명>은 1920년에 쓰인 작품으로, 당시 빈번히 있었던 해외 사기 결혼을 지적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로 작품 전반에서 사진결혼의 폐해뿐만 아니라 당시 하와이에 사는 조선인들의 애환과 삶, 유교 문화와 가부장제의 문제점 등을 사실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시놉시스

이화학당 출신의 박메리는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하와이에 살고 있는 양길삼의 사진만 보고 결혼한다. 중매자에 의하면 양길삼은 훌륭한 인격과 부를 지닌 사내였지만 하와이에 도착해 마주한 그는 구두 수선공에 도박과 음주를 즐기며 술주정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결혼 후 매일을 눈물로 지내던 박메리는 잠시 하와이에 들린 옛 애인 이수옥을 만나게 되고, 박메리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이웃 남자 장한구와 남편 양길삼은 둘의 만남을 알게 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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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들 지금보다 못될까


<운명>의 주인공은 하와이로 사진 시집을 온 ‘박메리’다.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당대 흔치 않은 여성 엘리트로 진즉에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수옥’)도 있었다. 그런데 사진 결혼 사기를 당해 가난한 구두 수선공 남편 ‘양길삼’을 만나 타지에서 자유를 속박 당하게 되었다. 아마 그 속앓이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정도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 결혼은 박메리의 자의가 아니었다. 서양에 눈이 먼 가부장적 아버지가 강제로 시킨 결혼이었다. 하와이 구두 수선공 집, 그 곳은 서양이면 다 좋을 것이다, 라고 여긴 아버지가 딸에게 내몬 지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박메리의 의지가 아예 없었다곤 볼 수 없다. 메리 역시 본인이 ‘허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수옥에게 자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리의 ‘허영’은 당시 사회를 고민해봤을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당시 중매쟁이들은 결혼 제의 시 조선의 여성혐오 사회에 반해 ‘하와이엔 그런 게 없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아래서 이화학당을 졸업한 박메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유혹이자,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돌아온 것이라고는 이주민 여성으로서의 삶, 가난하고 폭력적인 남성의 아내로서의 삶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박메리로서는 이 운명을 도저히 순응할 수 없었다.
 
박메리 외에도 작품에는 이런 사진결혼 ‘사기’를 겪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당시 얼마나 이런 일이 빈번했는지 알 수 있는 구석이다. 이들의 삶 역시 박메리만큼이나 척박하다. 남편들은 가난하고, 빈번히 도박판을 벌리며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외박을 밥 먹듯 한다. 그러나 인근에 거주하는 ‘갑’과 ‘을’은 박메리와 사뭇 이러한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 그들은 그저 운명이라며 순응하고 꾹 참고 살아가려 한다. 그들이 박메리는 배웠으니 혼자 벌려하면 남편보다 더 벌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것을 보아 본인들은 배움이 전무한 탓에 아무리 척박한 삶이더라도 그 외에 발 딛을 삶의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시 하와이 역시 조선과 다르지 않게 여성에게, 특히 학력이 없는 여성은 자립이 불가능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메리를 제외한 모두가 순응하고 산 것만도 아니었다. 박메리보다도 먼저 사기결혼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 여인이 있었다. 바로 ‘김서방 댁’이다. 김서방 댁은 툭하면 술을 마시고 들어와 난동을 피우는 김서방 몰래 조선행 배를 타다 결국 남편에 의해 죽고 만다.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던 박메리에겐 끔찍한 소식이었던 동시에, 끔찍한 만큼, 자유로의 열망을 더욱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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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올시다!


박메리가 마음을 굳히는 과정에는 수옥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결정적인 계기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메리에게 못 배운 남편을 가르치며 사는 것이 메리의 운명이라고 충고한다. ‘운명이올시다!’ 반복해서 외치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박메리를 오히려 다시 밀어 넣는다. 굳이 박메리에게 본인을 져버린 연유를 묻고자 찾아와놓고 도리어 그녀에게 운명 순응을 조언하는 모습은 매우 이중적이다. 뿐만 아니라 속박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다는 메리의 물음에 순응으로 답하는 수옥의 모습은 매우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다. 실제 배역을 연기한 홍아론 배우 역시 이런 수옥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개인적으로, 수옥이 말한 운명이 메리에겐 굉장히 강압적일 수도 있겠다고 느꼈어요. 당연한 것, “그게 메리 씨가 밟아갈 길이올시다”하는 모습이 폭력적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조언하듯이 말하는 지식인의 모습이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운명이라는 게 폭력적, 강압적일 수 있는 것이죠. 정확히 내용이 매칭되진 않겠지만, 현대인들에게도 깊게 고민해보지 못하고 쏟아지는 강압적인 것들과 운명 간의 접점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생각하며 연기했습니다.”

박메리에게 순응을 강요하는 남성은 수옥뿐만이 아니다. 장한구는 박메리에게 수옥과의 관계를 빌미로 추행을 시도하고, 남편인 양길삼은 그래봤자 박메리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충고 아닌 협박을 남긴다. 사실 이 모든 장면은 약 100년이 지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각박하고 처절한 여성의 삶과 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순응을 강요하는 독단적 가부장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 남성들의 폭력성은 마치 충고처럼, 혹은 ‘본능’처럼, 그리고 메리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치장하지만, 그 알맹이는 관객에게 간파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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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공동묘지


하지만 박메리는 죽음을 담보로 둔 발버둥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이수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은 여인이 수선을 위해, 혹은 박메리의 도망을 위해 맡겨둔 신발로 갈아 신는다. 이는 결코 가벼운 변화가 아니다. 박메리가 운명에 대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연출 김낙형은 인터뷰에서 신발에 대해 ‘김서방 댁의 신발은 메리를 격발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든다. 그 여자의 신발을 신고 그렇게 당하지는 않겠다며 메리의 행동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 김씨의 부인의 죽음과 수옥과의 만남이 겹치며 이 운명대로 살진 않겠다는 마음으로 메리가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메리가 믿는 신은 메리의 기도를 야속한 방식으로 들어주었다. 어쩌면 존재가 불분명한 신마저도 운명을 강요하는 남성들과 같은 줄기를 타고난 모양이다. 메리는 결국 수옥과 공동묘지 대합실에서 재회하고, 그 순간을 남편 양길삼과 그의 친구 장한구에게 발각된다. 순식간에 벌어난 칼부림과 싸움의 끝은 양길삼의 죽음이었다. 양길삼의 칼을 메리가 집어 들자 양길삼이 도리어 겁을 주며 달려들다 찔리고 만 것이다. 다소 갑작스러운 결말에  더 당황스러운 점은 그제야 수옥이 박메리의 운명이 어찌되었든 본인이 지켜내겠다고 하늘에 맹세한다는 점이다.

이런 결말은 ‘공동묘지 대합실’이라는 배경과 맞물려 메리가 운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마치 불행의 운명을 매장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연출은 이를 놓치지 않고 미리 관객의 희망을 깨부순다. 공연의 암전동안 무대에는 당시의 영상과 사진 등의 비춰지는데, 그 중에는 한 재판 사례 기록도 존재한다. 이는 현실 고증이자 일종의 복선인데, 당시 얼마나 허술하고 빠르게 재판이 이루어졌는지 입증하며 살인범으로 판결될 박메리가 어떤 삶의 결말을 맞이할지 예상하게 해준다.

더불어 ‘도리어 겁을 주며 달려들다 찔린’ 양길삼의 죽음은 박메리를 끝까지 수동적 인물로 남긴다. 박메리라는 인물은 순응하라는 충고를 날리는 수옥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두 번이나 간청하는 점, 조선이 아니더라도 하와이를 벗어나 수발을 들며 살더라도 자유를 찾을 생각을 하는 점 등 당 시대의 주체적 여성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은 박메리를 끝내 원치 않게 남편을 죽이고 수옥의 ‘보호 및 지킴’을 받는 신파극 여성주인공으로 끌고 간다.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

이런 저런 아쉬움과 갑작스러운 결말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분명 의미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존재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의 모습(하와이 이주 결혼, 척박한 노동 환경, 사진결혼 사기로 인한 불행과 갈등 등)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는 점, 여러 부분에서 신파극에서 신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뜻 깊다. 또,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거의 100년만의 공연인 만큼 작품 ‘발굴’ 혹은 ‘재발견’의 의의 역시 존재한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운명>이 더 좋은 모습으로 각색되어 무대 위로 돌아오길 기대해본다.


발췌 및 인용 인터뷰
국립극단 블로그
<운명> '예술가와의 대화' 현장을 가다!(1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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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작_윤백남
연출_김낙형

공연일시
2018년 9월 7일(금) - 2018년 9월 29일(토)
평일 7:30PM(화 쉼), 주말 및 공휴일 3PM
※ 단, 9.19.(수) 3PM 공연
9.15.(토), 9.22.(토) 3PM, 7:30PM 2회 공연
9.23.(일), 9.24.(월) 공연 없음

공연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관람등급
14세 이상 관람가

소요시간
80분

입장권
전석 3만원

예매 문의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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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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