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주 알, 시공간연속체를 벗어난 남자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남산예술센터 2018년 시즌 프로그램
글 입력 2018.09.19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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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남산예술센터 2018년 시즌 프로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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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내용에 앞서


연극을 다 보고 나왔을 때, 드는 생각은 '책을 빌려서 읽어보아야겠다'였다. 이 연극은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생각보다 나에게 너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원작에서 표현될 더 치밀하고 섬세한 심리묘사와 뒤섞인 시간의 묘사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을 한 방향으로 단 한 번밖에 체험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라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어쩌면 우리는 그 패턴에서 벗어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연극 속 인물의 몸짓과 대사, 배경 전환이 책 속의 활자가 된다면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보이게끔 하는 그 방대한 묘사를 접해 보고자 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인 무대


이 연극은 일진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 얼결에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 그 남자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여자, 그 남자의 칼에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 연극은 이러한 점에서 놀라웠다. 제한된 공간과 제한된 시간 속에서 동시다발적인 사건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다룬다.

가해자 대 피해자라는 구도를 내세우는 듯하지만, 연극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드러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상처를 가진 인물들은 두 개의 달 위를 돌며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이야기를 편다. 이 몽환적이고도 모호한 공간 설정에 시점은 뒤죽박죽이고, 소설과 주인공이 쓴 소설이 끊임없이 뒤섞이며 독자들을 허구와 진실 사이 어딘가를 끊임없이 헤매게 만드는 이야기다.

자전하는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달과 같이 균형을 잃고 기울어진 무대 위를 비틀거리며 걷는 이들은 마치 길을 잃은 듯 보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맴도며 위로해주는 것 같이 보인다. 이상하게도, 복잡한 듯한 이야기는 등장 인물 한 명 한 명에게 묘하게 감정 이입되는 설득력을 가졌다.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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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남자의 거짓말


우리에게 시간은 모두에게나 공평하다. 우리는 모두 시간을 오로지 한 방향으로 살아간다. 앞쪽에서 뒤쪽으로, 그러니까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말이다. 이때 삶의 의미는 절대적으로 그 끝에 의존한다. 결말이 좋지 않다면, 우리는 삶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인식하게 된다.


A와 B라는 두 가지 노선이 있어.
A는 슬프지만 아름답게 오늘 헤어지는 거야.
B는 내일이나 모레쯤 헤어지는 거야.
대신 아주 비참하게 헤어지게 돼. 어떻게 할래?


위와 같은 대사를 남자는 반복 한다.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결말이 비극적인 관계는 그 관계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를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누구나 결론이 좋지 않게 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계속 추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남자 역시 자신의 마지막, 즉죽음을 예감하고 이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오로지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한 것이다. 

남자가 품게 되었다는 '우주 알'. 이 우주 알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인상 깊다. 우주 알은 시공간연속체를 건너 그 서사를 뛰어넘어 이야기의 앞뒤를 새로 조합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를 반복해서 묻는다. 그러는 사이 개인의 세계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구성된다.

남자는 "우주 알을 품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나열하고 때로는 상상한 것을 더하고, 또 여러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한다. 남자는 현재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해석하고 새롭게 만들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나가려 한다.

이 연극은 110분 동안 예정된 패턴의 연속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선과 악을 나누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패턴이라면, 우주 알을 품은 남자는 진신을 밝히는 것보단 그 패턴을 벗어나 남자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남은 자들을 위한 거짓말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언정, 여전히 남아 있을 사람들을 살아가게 할 거짓말을 말이다.

남자의 가벼운 농담 같던 '우주 알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제야 패턴에서 벗어난 여자가 마주 보게 될 새로운 세계. 여자는 그 세계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리고 결국 남자를 칼로 찌르기까지 행동한 영훈의 어머니가 마주 보게 될 새로운 세계는 무엇일까..

어머니의 집요한 기억과 달리 아들 이영훈은 명백한 가해자였고, 여자의 아버지도 여자의 기억처럼 늘 나쁘지만은 않았다.

*

다음은 본 연극을 무대에 올린 연출가 강량원과 작가 장강명의 인터뷰 중 일부이다.


"소설가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소설을 쓰지만 소설의 몸이 완성되고 나면 그 소설은 작가의 의도를 뛰어넘는 근원적인 질문을 품게 되는 경우가 많죠. 저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제 나름의 질문을 발견했고 그 질문을 재료로 연극을 만들어 또 다른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이 순환을 만들어 내는 힘이 ‘우주알’ 아닐까요."

(강량원)


"우리는 늘 내 입장에서 기억과 진실을 재구성하게 되죠. '우주알'은 개인의 관점을 벗어나 비인간적인 관점으로 내가 속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힘입니다. 소설을 통해 제가 심어 놓은 우주알에는 메시지나, 몸이 빠져있는 느낌이 드는데 이것이 무대라는 실제 공간을 만나면 어떤 힘을 발휘할지 궁금해집니다."

(장강명)




[장혜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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