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공연]

글 입력 2018.09.20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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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연극을 보고 난 후의 감상은 충격이었다. 완전히 뒤섞인 시간 시점에서 배우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아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극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관객의 자의적인 이해로 내용을 따라가는 것 또한 어려웠다. 거기다 배우들 모두가 대사를 하는 와중에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며 연기하기 때문에 주의가 많이 분산되기도 했다.

처음 접하는 신체행동 연극,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사라진 새로운 외형으로 연출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었지만, 흥미롭고 신선한 요소들로 가득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극을 본 뒤에도 내용과 의미에 대해 시원하게 답변하기는 어려웠지만 기억을 되짚어 말하자면, 꼼꼼히 뜯어보고 나름의 재해석을 해보는 동안 과연 흥미로운 연극이었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시간연속체의 존재성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시간연속체는 극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동급생을 살해하는 첫 장면 이후, 교도소에서 나와 소설을 쓰고 있는 남자는 극의 초반에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그 이후로 내 패턴을 지워버렸어.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로 들어왔지. ... 나는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볼 수 있게 된 거지.“

   
시간 연속체는 남자가 쓴 소설 <우주알 이야기>에 나오는 ‘우주알’처럼 남자에게로 들어가 모든 시간을 볼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시간의 관점이 이리저리 뒤섞이기 때문에 무엇이 <우주알 이야기>의 내용이고 무엇이 소설 밖 이야기인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그런 구분 없이도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진 것은 <우주알 이야기> 또한 남자의 삶을 다룬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의 안과 밖이라는 두 공간에서 시간연속체와 함께하며 자신에게 있었던 과거, 현재, 다가올 미래를 여러 각도로 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시간은 늘 이쪽에서 저쪽으로,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흐르지만 이같은 보통의 패턴을 시간연속체가 지워버렸다는 것을 남자의 대사를 통해 암시한 것이다. 남자가 보는 시간의 관점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어서 방금했던 이야기를 다른 시간에 다녀와 다시 이어가기도 하고, 갑자기 끊겨버리기도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시간연속체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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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곳, 그 사람’


극에서 말하는 지시어도 시간이 뒤섞임에 따라 불분명해진다. 앞서 보인 장면이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는 여러 장면을 떠올려본 뒤 재구성을 통해 지시어가 의미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다. 대사 속에서 내용을 곧바로 짐작하고 해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물론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나간 장면과 현재의 장면이 맞물리며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관객에게 시간을 여러 관점으로 바라보는 능동적인 감상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은 극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좋은 요인이 되었다.
 
 

반전에 의한 시간 차, 시간 차에 의한 반전

남자는 동급생 영훈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생활을 한다. 교도소에서 출감한 뒤, 그는 한 신문사에 소설을 기재하며 자신의 행동이 정당방위였다고 말한다.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영훈에게 화가 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긴다는 영훈의 어머니는 갑자기 남자에게 살인마라고 말하며 달려들다가도 친절하게 대해준다. 남자의 애인도 그가 정당방위였다고 생각하지만, 남자가 죽은 뒤 자신의 범죄가 정당방위가 아니었다고 번복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훈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적이 없고 따라서 화를 참지 못해 저지른 살인 행위가 아니었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똑같은 행동을 범할 것이라고 말한다. 고백이 담긴 영상은 신문사에 보내기 위해 스스로 찍은 것이었고, 마지막 장면에서 시간연속체는 영훈의 어머니에게로 들어가며 극은 막을 내린다.
 
남자의 살인이 이야기의 주요 맥락이었기 때문에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그가 결국은 가해자였음이 시간 차를 통해 밝혀지고, 시간연속체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살인자라고 부르짖었다면 그는 엄청난 반전을 보여준 셈이었다. 시간을 보는 관점이 섞이지 않았다면 이런 반전이 가능하지 않았을 테지만 의도적으로 뒤섞인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어 충격이 더해진 반전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반전보다도 신선하고 새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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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행동, '극단 동'만의 특별함


극단 동의 특별함일라 할 수 있는 신체 행동 연극은 대사와 신체 행동이 더해진 연기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초반부에는 극에 몰입하는 데에 오히려 어려움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좀더 생각해보면 대사와 배우의 표정, 목소리에만 집중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신체의 움직임은 배제에 가까운 절제의 대상이 되어왔는데도, 배우들의 반복된 움직임이 대사와 어우러져 극의 한 부분으로 느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기존의 연기 방식에 익숙해져 또다른 연기의 영역으로 고려되었을 법한 신체 행동을 대사만큼이나 주목하고 집중할 수 있었던 극이 많지 않았음에 놀라고, 생각보다 빠르게 익숙해졌다는 데에도 놀랐다. 이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신체 행동 연극이 뻗어갈 자리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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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외형과 세계관이 담긴 내용으로 궁금해했던 만큼 신선하고 새로운 연극이었다. 결과론적인 현재를 살아가지 않고 다각적으로 사건과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극을 통해서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적절하게 필요한 때에 한번쯤은 겪어보고 싶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을 조각조각 떼어 내어 알맞고 조립하고 싶을 그럴 때.

  
[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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