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간의 퇴적에 대하여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글 입력 2018.09.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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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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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지구의 위성이다.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서 제 움직임을 함께하는 달은 꽤나 수줍다. 수줍음이 많아서일까. 지구에서 보는 달의 모습은 다양하다.

인간은 그런 달의 부끄러움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달의 위상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등등. 많고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달이다. 이름 지어진 달은 모양만큼이나 시간의 속성을 잘 머금고 있다. 이를테면 보름이면 무언가 가득 채워진, 풍부와 풍요를 만끽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달의 위상과 시간의 변화는 비슷한 맥락 속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달리기 하는 꿈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결승선까지 전력질주 한다면 1등으로 들어올 것 같다. 미친 듯이 달려보지만, 꿈은 꿈이다. 꿈속에서 달리기라는 갈망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아무리 달려도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는 공간의 틈이 채워지지 않는 느낌만이 가득하다. 문득 머릿속에 담긴 과거의 시간 또한 꿈속의 달리기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한 순간을 향해 회상의 활시위를 겨누고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은 생각나지 않는 아이러니함이란.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나아가지 못하는 꿈속의 러너와 처지가 같다. 꿈에서는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알고, 현실에서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기억하려는 나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나간 어느 부분과, 허상 속에 부유하고 있는 시간은 결코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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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런 시간을 연극이란 무대 위에서 잡아내려 한다. 기울어진 무대와 그믐과 상반되는 보름달 형상의 무대가 기어이 시간을 잡아보려는 도전의 시작을 알린다. 극 속의 소설, 소설 속의 실화.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영화 ‘인셉션’에서 꿈이 계속 중첩되는 상황과도 같다.

작품은 고교시절 연인이었던 남자가 동급생 살인 혐의로 소년원에 가면서 연락이 두절되었고, 시간이 흘러 출소한 남자가 쓴 소설을 여자가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재회로 인한 과거회상으로부터 계속된다. 살인이란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기억의 씨앗은 저마다 각기 다르게 심어진다. 남자에게는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처럼, 여자에게는 남자의 억울함과 과거에 대한 소회를 풀기 위한 해결책으로, 아주머니에게는 삶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럼에도 계속 풀어나가야만 하는 미제로 사건은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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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기억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들의 오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작품을 보면서 시종일관 든 생각이다.

남자는 광활한 우주를 이야기하면서 그곳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한다.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다. 남자에게 있어 시작과 끝은 단순히 정해진 무언가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는 세상을 일련 된 사건으로 보기보다 그 순간에 일어난 사건의 불연속으로 파악한다. 생각하는 시선은 곧 그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에 있어 세계는 정교하게 짜인 것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은 ‘그믐’의 영역이다. 불현 듯 떠오르는 살인에 대한 기억처럼 말이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가정 하에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이 흐른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나열하고, 때로는 상상한 것을 더하기도 한다. 모든 기억은 여러 관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파편들이다. 그렇다고 처음의 영역에 해당하는 과거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현재를 통해서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해석한다. 과거에 얽매여 있는 아주머니와는 사뭇 다른 방식을 취한다. 어쨌든 기억의 재해석이란 과정을 통해서 남자는 잘못된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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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살인을 행한 사람이자 소설가다. 처음과 끝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살인자에서 소설가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세계에서 그는 소설가로부터 시작한 살인자에 해당한다. 그에 있어 소설은 강력한 힘을 지니는 도구다. 오이디푸스처럼 처음부터 곤경에 빠질 것이란 예언을 받고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처럼 보이는 남자를 인간답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동시에 작품이 왜 시간으로부터 달아난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유일한 정답지이기도 하다.

사건으로부터 꼬인 남자의 삶과 남자가 창작한 <우주 알 이야기>는 같은 궤도 속에 존재한다. 순서대로 진행되지도, 사건 순서대로 진행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직 부유하는 시간의 알갱이 속에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찾아갈 뿐이다.
 
남자에게 주어진 역할은 이 뿐만이 아니다. 동시에 그는 예언자다. 그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다가올 자신의 미래를 본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자와 아주머니, 그에 있어 위성과도 같은 존재들에게 다가올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때 마주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성의 붕괴다. 오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남자는 자연히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다.

과거는 훨씬 이전에 존재하는 지나가버린 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시발점으로 다가온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흘러가는 중간지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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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 흐르는 시간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자연히 시간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때 유일한 단서는 기울어진 보름의 무대다. 온전히 서사의 영역에서 작품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연극 안에 갇힌 소설의 형상만을 볼 수 있다.

기울어진 무대 속에서 어딘가 이상한 인물의 운동과, 되풀이 되는 말들. 기억하는 시간에 따라 유유히 춤추는 조명의 빛깔들을 보라. 장치는 곧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다가온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당신이 연극을 마주하는 방식’의 새로운 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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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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