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족이라는 연 [사람]

추석을 앞두고
글 입력 2018.09.2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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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문자에 잠시 멍해졌다. 거의 1년을 앉지도 못하고 누워만 계셨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냐며 하루빨리 편한 곳으로 가신 게 다행이라고 엄마가 말했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이게 훨씬 낫다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슬프다기보단 실감이 안 났다. 세상에서 할머니의 존재가 지워졌다는 게 너무 낯설었다. 왜냐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는 늘 할머니댁에 계셨기 때문이다. 굳이 찾아뵙지 않아도 할머니는 늘 거기에 계신다는 것이 당연했다.


이렇게 네 식구가 다 같이 차 타고 할머니 댁에 가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동생과 내가 어릴 땐 일 년에 대여섯 번은 꼭 갔었는데 말이다.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자주 못 찾아뵀을까. 운전대를 잡은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그곳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이 다 모여 있었다. 서로 얼굴도 못 알아 볼 정도였다. 서둘러 상복을 입고 난 뒤, 사촌 동생을 만났다. 그 동생과 나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늘 같이 지냈었기에 서로를 보는 순간 울음이 터졌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우리 곁에 더는 할머니가 안 계신다는 것이.


3일 동안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장례를 치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추석을 앞두고 나에게 있어 가족의 의미가 많이 변한 것 같아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아직 말로 정리되진 않았지만 장례식장에 가족끼리 둘러앉아 온몸으로 느낀 어떤 감정, 느낌을 최대한 표현해보려 한다.




 


예전에 나에게 가족은 혈연이라는 수갑으로 묶인 지독한 감옥 같은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에 나는 얼른 돈 벌어서 평생 가족 얼굴 안 보고 살아야지라는 마음뿐이었다. ‘철없던 때였지’ 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럴만했다. 나는 집에 있을 때 가장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가족이라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경제 공동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가족은 사회가 분명한 목적으로 만든 인위적인 관습과 제도로 인해 탄생한 모순덩어리 그 자체다. 지금도 이런 생각이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여러 일을 겪으며 가족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나에게 가장 깊은 여운으로 남은 올해의 영화는 아마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어느 가족’일 것이다. 이 영화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화를 보고 참 많은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것저것 다 제쳐놓고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가족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라지 않는다’였다. 그들은 혈연이 아닌 ‘자발적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진 가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내 부모니까’, ‘내 자식이니까’ 하는 소유욕에 기반한 바람이 전혀 없다. 그리고 아무리 어린아이여도 경제적으로 제 몫을 적절히 기여하며 산다. 어린아이한테 도둑질을 시키는 게 윤리적으로 맞느냐, 안맞느냐라는 질문은 쓸모없는 질문이다. 여기서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이 가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가족이 왜 감옥이 되고, 폭력이 정당화되고, 남보다도 못한 원수지간이 될까? ‘어느 가족’을 보며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릴 땐 이런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가족은 원래 이런 거고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증오만이 가득했다. 근데 성인이 되고 경제적으로 조금씩 독립하면서 기존의 끈적한 관계에서 자유로워졌다. 서로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나무가 아닌 숲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가는 길을 아무 조건 없이 응원해주는 건 가족밖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게 가능하려면 방금 말했듯이 적절한 ‘거리’가 필수적이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생각은 이번에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 든 생각이다.


할머니의 3남 4녀와 손주들까지 상주만 스무 명이 넘었다. 많은 게 변해 있었다. 처음 본 조카, 이혼한 사촌 언니, 재수를 하는 사촌동생 등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기쁜 소식도 슬픈 소식도 있었지만 그들의 인생을 쉽게 판단하지 않았다.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니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 깊이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는 게 느껴졌다. 이때 느낀 감정은 참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 각박하게 살았나 보다. 친한 친구들끼리도 우열을 느끼는 세상에 지쳤었나 보다. 가족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분명히 있나 보다. 그동안 숨이 막혀 가족을 등한시 했던 게 후회가 되면서도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족 때문에 힘들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노력하지 않은 채 바라기만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가족은 그 어떤 관계들보다 노력이 필요한 관계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평생 노력하며 살아야겠다.



[김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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