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차가 지나가는 역의 9월이 지난다

글 입력 2018.09.2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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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9월



기차역의 근호와 리아

기차역을 찾은 선희와 혜리

기차역을 떠나려는 영주

그리고 역무원


9월의 기차역에 그들은 왜 머물러 있나



다음은 서울문화재단 공식블로그에 올라온 인터뷰에서 설유진 연출님이 한 말이다.


“관객들이 자신이 감각하는 것에 대한 자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 가지 주제로 이야기해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다 다를 거라서...그냥 던져놓고...근데 되게 정성껏 던질 거예요.”


*


자신이 미처 보고 느끼지 못한 것들로 가득한 다른 사람의 감상평에 의기소침해하지 말라는 연출의 말이 인상적이다. 내가 느낀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게 중요한 거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예술을 받아들이는 기준은 자기 자신이므로 그 해석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연출은 정성껏 던져 놓겠다고 한다. 난 이 말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명확한 주제와 내용을 손에 쥐어주어도 모두 다르게 느낀다면, 그냥 높이 던져 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열심히 잡고 줍게 하는 편이 더 좋다는 것이다. 물론 연출이 정성껏 던진 것들 중엔 내가 잡을 수 있는 것들도, 없는 것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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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잡을 수 없던 것부터 얘기하고 싶다. 난 이 연극을 다 보고 난 직후에도 명쾌한 줄거리가 머리에 남지 않았다. 인물 관계부터 꽤 복잡한데 우선 선희는 서울에 살다가 잃어버린 가방을 찾기 위해 시골에 왔다. 역무원에게 분실된 가방이 없냐고 물어보는 선희는 얼이 약간 빠져있었고 정신없어 보였다. 잠을 잘 곳도 구하지 않고 급하게 내려온 듯 했다. 돈이 필요한 리아는 우연히 선희를 만나 자기 집에서 민박도 한다며 선희를 무작정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 곳에서 만난 리아의 아빠이자 전직 형사인 근호와 선희는 서로 아는 사이였다.


선희의 전 남편은 영주와 바람이 났다. 근데 영주는 근호의 두 번째 아내다. 근호는 첫 번째 아내와 해리를 낳았고, 영주와는 리아를 낳았다. 첫 번째 아내와 해리는 서울에, 근호와 리아는 시골에 따로 살고 있다. 해리는 엄마가 없어졌다며 근호와 리아를 찾아온다. 그리고 영주는 시골을 떠나려고 한다. 이 연극의 내용은 이렇게 내 머릿속에 조각조각 남아있다. 위에 적은 줄거리 중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내용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배우들의 표정이 훨씬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시작과 끝



연극이 끝나고 좋았던 장면들을 생각해보았다. 제일 좋았던 부분은 커튼콜 직전 부분, 두 번째로 좋았던 부분은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선희의 독백이 끝난 후의 부분이다. 편의상 끝 부분과 시작부분으로 표현하겠다. 어둡고 쓰린 사연들이 복잡하게도 얽힌 사람들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이 연극에선 응어리진 감정의 분출이 자주 나온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정이 아닌 쌓인 감정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장면들 말이다. 거의 절규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선희와 답답함에 팔짝팔짝 뛰며 해리를 향해 울화통을 터뜨리는 리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감정을 쏟았음에도 사건은 명확히 해결되지 않았고 그 대신 극은 배우들이 조용필의 ‘오늘, 내일, 그리고’에 맞춰 춤을 추며 막을 내린다. 벽에는 빔프로젝터로 감각적인 폰트의 가사가 한 줄씩 쏴졌다. 배우들은 겉옷을 벗어 던지며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췄다. 그들이 춘 춤은 율동은 절대 아니며 자유로운 현대무용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곡이 끝나갈수록 춤은 더 격해졌는데 커튼이 내려가면서 배우들의 다리만 보일 때도 그들의 흥에 겨운 추임새를 들을 수 있었다. 막이 완전히 다 내려가고 몇 초 후까지 그들이 춤추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의 춤사위는 모든 감정을 춤으로 쏟아 부은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난 배우들이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할 때는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지막 장면을 보며 울컥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숨죽이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이 연극에 대한 내 감정이 예고도 없이 불쑥 올라와버려서 그랬다. 춤으로써 감정을 소화하고 갈등을 해소했다는 느낌이 감동적이었다. 또 이 노래를 듣고 대본을 쓰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 내일, 그리고’의 분위기, 멜로디, 가사까지 연극 9월과 너무 잘 어울렸다.



바람소리처럼 멀리 사라져 간 인생길

우린 무슨 사랑 어떤 사랑했나

텅 빈 가슴 속에 가득 채울 것을 찾아서

우린 정처 없이 떠나가고 있네

여기 길 떠나는 저기 방황하는 사람아

우린 모두같이 떠나가고 있구나

끝없이 시작된 방랑 속에서

어제도 오늘도 나는 울었네


어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



시작 부분엔 정말 예상치도 못한 것들이 많이 나와서 입이 떡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선희는 무대 뒤가 아닌 관객들이 입장하는 문 쪽에서 걸어 나와 잃어버린 가방에 대한 독백을 한다. 이 독백이 끝나자마자 무대의 대부분의 공간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젖혀진다. 무대가 진짜 넓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직사각형, 반원형, 원형의 무대는 봤어도 세로길이가 가로만큼 길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무대는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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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난 후의 무대.
배우들이 던진 옷가지가 흐트러져 있다.


커튼이 젖혀지며 강렬한 음향과 조명이 들어왔다. 무대 중앙에 붙여진, 마치 활주로 같은 긴 테이프들을 따라 선희는 스피드스케이팅을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듯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옆쪽에선 킥보드를 탄 리아가 등장한다. 리아의 킥보드는 관객석을 지나 빠르게 원을 그리며 무대 한 바퀴를 돌고 또 돈다. 한 10바퀴에서 15바퀴 쯤 돌자 음악이 꺼졌다. 이 모든 것이 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기에 정말 신기했고, 놀랐고, 즐거웠다. 무대와 연출에 압도당했다. 이런 오프닝을 다른 연극에서도 볼 수 있을까. 시작과 끝 부분 때문이라도 연극을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다.



환절기




열기에 바람이 지나듯,

올해도 9월이 지난다.

풍경도 계절도 거짓말처럼 모두 다.



제목도 꽤 특이하다. ‘연극 9월’이라고 검색해보면 9월 달에 진행 중인 공연을 소개하는 내용이 먼저 나온다. 왜 9월일까. 9월 달에 공연되는 걸 노리고 그런 걸까. 10월 달에 공연했으면 ‘10월’이라고 지었으려나. 9월은 환절기다. 초반까지는 여름의 분위기가 가시지 않아 햇볕이 쨍쨍했는데, 요즘엔 겉옷 없이 밖에 나가면 감기에 걸릴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확확 바뀌는 중이다.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라는 노래 가사와 사랑과 상실을 다루는 연극의 내용은 인생무상, 인생은 덧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달이 되어버린 9월과 이 연극은 딱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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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과 역무원



가버린 후엔 허무할 만큼 기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리는 역도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무대엔 대합실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초록색 의자가 2개씩 3쌍 놓여있다. 이 의자들은 극 중 ‘역’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 ‘집’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된다. 기차를 인생이라 생각하면 기찻길은 인생길, 역무원은 인생의 길라잡이가 된다. 극 중에서 역무원은 가만히 있다가 어떤 순간에 질문 몇 마디를 던질 뿐이다. 특이한 점은 몇몇은 등장하지 않는 씬임에도 배우들은 모두 거의 한 순간도 퇴장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있다. 심지어 일어나는 사건에 조금씩 반응하기도 한다. 이것의 의도는 연출님께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다.


5일 뒤면 2018년의 9월이 지나가버린다. 9월이 지나 10월이 되면 2019년까지 딱 세 달밖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운 가운데 우리 모두는 항상 그렇듯 고뇌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건 어딘가로 떠나는 기차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9월”은 나에게 굉장히 새로웠던 요소들로 가득한 연극이다. 내용적인 부분은 전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지만 연출님이 말한 것처럼 내 나름대로 얻어가는 게 있으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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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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