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우주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시간이다 [공연]

연극 '우리별' 리뷰
글 입력 2018.09.2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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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언제나 문제는 시간이다.


지구는 지구다.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이 연극은 이와 같은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할머니, 엄마, 아빠, 언니, 동생으로 이루어진 한 가족이지만 사실 그들의 이름은 태양계 속 행성들의 것을 하나씩 따 온 것들이다. 지구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 하루가 지나고,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면 일 년이 지난다. 그 시간들은 서로 무척이나 닮아 있지만 조금씩 달라진다. 우리의 하루와 다를 게 없다. 하루와 일 년이란 변할 게 없으면서도 모든 게 변할 수 있는 시간이다.


지구가 더 큰 선물을 받으려 태양을 셀 수 없이 돌았을 때 지구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누군가에게는 ‘드디어’이고 누군가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이 때 중요한 말을 한다. (기억에 의존해서 작성하는 것이므로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네가 도니까 시간도 돌았지”


“하지만 네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단다.

절대 네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안 돼.”



태어나기 전이란 것은 모든 존재가 발생하기 전의, 태초의 시간을 의미한다. 광활한 우주의 관점에서, 그리고 무한한 시간의 관점에서 지구의 부모님을 비롯해 그의 자식인 지구, 심지어는 그 속의 세포 정도로 상정되는 ‘나’의 존재는 모두 자칫하면 지나쳐버릴 수 있는 찰나에 불과할 뿐이다.


예전에 책을 읽다가 이런 주인공을 만난 적이 있다. 11짜리 여자애인 그는 할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선택을 할 때

우주의 관점에서 그걸 바라보곤 해.

내가 우주에서 얼마나

티끌과 같은 존재인 지 안다면

내 선택이 아주 하찮게 느껴지게 되고

결정을 하기 훨씬 수월해 지거든”



그녀가 이를 듣고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사가 내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내가 그 이후로부터 나 자신을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어릴 적부터 ‘무한’이라는 개념에 막연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끝없이 확장하는 우주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마치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영원히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놓친 헬륭 풍선이 어디로 가게 될 지 두려웠고 허공에 쏜 거대한 레이저 쇼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놀이공원 같은 큰 공간이라도 천장만 있다면 괜찮았다. 공포는 언제나 닿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인했다. 그렇기에 나는 책 속 할머니의 말이 조금 웃겼다. 우주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데, 그 속에 있는 것처럼 굳이 상상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우주와 그 속에서 흘러가는 무한의 시간 속에서 나는 마치 언젠가 쥬라기 시대 즈음에 이 땅에 살았던 티라노와 다름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가 하는 모든 걱정과 멍청한 선택들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 일 분 일 초 단위로 한없이 끊어 쓸 수 있는 것이 시간이지만 그것은 반대로 하루, 일 년 단위로 한없이 늘려 쓸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우주 속에서 스러지는 하나의 존재이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가 되어 시간을 재창조한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고, 여러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지구처럼 그 속도를 늦추거나 빠르게 돌릴 수 있다. 이건 타임머신의 개념은 아니지만 상대성 이론 정도엔 가까울 것 같다.



우리별_현장사진2.jpg
 


우리는 3차원 안에 존재한다. 만약 4차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사실 이건 실제로 존재하는데 3차원에 사는 우리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일 뿐이다.) 그 속에서는 이 3차원을 입체적으로 관통하여 바라볼 수 있게 된다. 4차원에게 3차원의 시간이란 하나의 필름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순간들이 어느 시점에 고정되어서 그 중 어느 한 순간을 선택하여 마치 우리가 TV 보듯이 들여다 보고 그 속에 들어갈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연속적으로’ ‘불가피하게’ 살아 가고, 혹은 ‘수행해 가고’ 있을 뿐이라는 운명론적 관점과도 연결된다. 이건 실제 타임머신의 주된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하는데 그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고, 어쨌든 이 논리 속에서 존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3차원의 존재는 4차원에게 있어 단순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서혜민’이고 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말하자면 이 여백을 다 써도 모자랄 테지만, 그리고 그 속에는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과 우리가 지금껏 배워 왔던 철학 모두가 들어가 있으며 그것은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표방할 것이지만, 놀랍게도 4차원에게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를 이미 포괄할 만큼 광활한 시간 속에 사는 4차원의 존재에게 우리란, 마치 3차원의 우리가 바라보는 2차원의 그림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연극 속에서 지구가 달에게 선물이랍시고 ‘아폴로’를 건넸을 때 우리가 그것이 ‘아폴로 11호’를 뜻함을 바로 알 수 있었던 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우리에겐 인류의 위대한 발자국이었던 그가 4차원의 존재에겐 문방구에서 팔던 불량식품 ‘아폴로’와 별반 차이 없게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사는 시간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정답 이기도 하다. 차원은 무한히 존재하고 그 속에서 3차원의 존재란 더더욱 보잘것없어진다. 우주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 지구 속에서 70억 중의 한 명이란 지구의 세포 하나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나폴레옹 정도면 백혈구쯤 되려나.


그렇지만 이 이론의 재미있는 점은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는 가설을 덧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극 속에서도 우리는 지구의 가족뿐 아니라 또 다른 우주의 존재 와도 만나게 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예 다른 차원 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결국 지구와 만나게 된다. 시간을 거스르고 차원을 거슬러서. 간단히 말해서 우주가 여러 개일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의 미래에 무수한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 건지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주체인 나의 몫이다. 이것은 알고 보면 짜여진 미래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 답은 내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4차원의 존재만이 알게 되겠지. 무한한 경우의 수와 우주와 차원과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티끌보다 하찮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이어서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우주이며 동시에 하나의 시간을 품고 있다고 본다. 결국, 존재의 탄생과 소멸은 하나의 시간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이며, 그렇기에 우주다. 시간. 언제나 문제는 시간이지만 나는 시간 속에 살고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알고 보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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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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