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포스트모던 한국 관찰기 ver. 지그문트 바우만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9.2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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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산다는 것은 불안정하다. 내가 굳건히 사려고 해도 밖에서 뒤흔들 거나 스스로 흔들린다. 그래도 과거 사람들은 믿고 따를 만한 것들이 있었다. 굳이 먼 서양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들의 과거에는 마을 공동체, 왕권, 유교의 예, 천지신명 등이 있었고 한국이 독립하고 나서는 ‘잘살아보세’라는 모토가 해방의 혼돈 속에서도 민중들을 이끌었다.

90년대 말, IMF 사태 이후 미래에 대한 희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일자리는 사라지고 경제 전망은 암울해졌던 그 시기를 지나면서 다들 ‘당장 먹고 살 생각’에 바빠졌다. 누구도 내 일자리, 내 경제적 삶에 대해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조금씩 조급해지고 더 불안해졌다.

초등학교 때 국민일보를 들쳐보다 읽었던 기사가 하나 있다. 대학생 88만원 시대, 방세 내고 생활비 내고 나면 술도 못 마시는 돈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캠퍼스 낭만이 없다고 했다. 당시 영화에서는 캠퍼스에서 먹고 노는 대학생들을 볼 수 있었지만, 현실에선 스펙 전쟁 속 악을 쓰는 상이군인들이 양성되고 있었다. 이는 10여년이 흘러 내가 대학생이 되고나서도 여전했다. 3종 스펙이 6종, 8종으로 진화했고 청춘들은 쌓기에 지쳐 포기를 시작했다. 포기는 스펙 마냥, 3종을 거쳐 8종으로 이어지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성찰도 생겨났다.




굶지 않고 전쟁에 거의 노출되지도 않고 생활의 최저선이 거의 지켜지고 있는 오늘날, 그중에서도 선진국 반열에 있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 행운이 맞긴 하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힐링 에세이, 자존감 에세이가 우후죽순 나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공허한 걸까.

굳건한 돌벽에 서로의 이름을 적으며 애정을 확인하는 연인들처럼, 사람들은 안정적인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 한다. 누구도 흔들리는 줄에 서있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은 국가와 산업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더 불안해졌다. 주위에선 안정을 찾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일단 비정규직으로나마 취업하고, 곧 잘린다. 당장 5년 후 산업의 미래를 점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겪고 있고 영향 받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생각했다.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시대에 대해 깊은 통찰을 선보인 지그문트 바우만을 통해 질문의 답을 찾아보려 한다.





01 사냥꾼의 시대

바우만의 저서 『모두스 비벤디』에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먼저 근대 이전에 자연적 균형을 보존하는 사냥터지기는 세계 속의 신의 섭리를 존중하고 따른다. 근대에 나타난 정원사는 스스로 나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호하고자 노력한다. 이상적인 청사진을 그린 뒤 그것에 맞추어 자연을 손질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등장한 사냥꾼은 사물의 균형에 대해 신경을 덜 쓰며 자신의 사냥감에만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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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정원사의 역할을 맡고 싶어 하지만 명확한 청사진조차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청사진도 바뀌니 그 아래 기업들이나 개인들은 그것에 의지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는 교육이 그렇다. 사교육 시장을 억압하려는 정책들은 많았지만 한결같이 실패했던 이유는 단순하게 말해, 공교육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입시 정책도 자주 바뀌어 그 실체를 알기 위해 전문 교육 컨설팅에 돈을 쏟아 붓거나 알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부동산이 계속해서 널뛰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모두를 위해 집값을 잡으려하고 사람들 마음은 당장 나의 재산이 먼저다. 국가는 내 노후를 책임져주지 않지만 아파트 한 채는 안락한 미래를 보장해준다. 이렇게 사냥터가 된 부동산 시장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근본적인 문제는 집이 아니라 불안정한 직장과 노후인 것이다.

기업들이 벌이는 코즈 마케팅은 원래 국가가 내세워야 하는 대의명분을 대리한다. 도덕적인 가치는 제품과 서비스에 결부되고 소비자들은 그 가치를 산다. 사회를 위해 도덕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정부의 역할은 축소되어 소극적으로 법을 통한 단죄에 그칠 뿐이다. 도덕 교과서를 풀며 윤리의식을 고취시킨 사람이 주위에 얼마나 될까. 더 나아가 한국의 법체계에 만족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02 약자에 대한 혐오


잉여인간

근대적인 삶의 방식이 확산되면서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는,
쓸모없이 남아도는 여분의 인구이며

노동시장이 거부하고 시장 중심 경제가 배제한,
재활용 장치의 처리 용량으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과잉인구

모두스 비벤디 中


잉여인간은 신체적 약자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쓸모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으로 재는 오늘날, 쓸모없다는 것은 개인에게 존재의 위기를 불러온다. 한 마디로 사회라는 거대한 무언가가 작은 개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 왜 사니?”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능력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면 심하게 우울해지고 능력 없는(=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을 쉽게 여긴다.

한국에는 수많은 잉여인간이 있다. 돈을 벌지 못하면서 시끄럽고 민폐 끼치는 어린애, 수천만원 등록금을 냈지만 아직도 취직 못한 취준생, 남편 돈으로 생활하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아줌마, 은퇴 후 애물단지가 된 늙은 가장. 사람들은 그들이 되기를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만들어내고 혐오한다.


03 존중을 통한 배척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손가락질 하고 밀어내는 것만이 배척은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밀어낸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뜨끔하게 여길만한 이 말은 외국인 노동자, 여성, 난민, 장애인 등 이방인들에게 해당된다.

예를 들어보자.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나는 당신들을 존중합니다.”라고 의무적으로 말하지만 정말로 존중하고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나만 하더라도 진보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지지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움직인 일은 별로 없다. 띄엄띄엄 기사로 보도되는 실태에 대해서도 순간적으로 공분할 뿐, 그들을 위해 청원하지 않는다. 왜? 나와 먼 타인이니까. 그렇게 존중이라는 말로 그들의 문제를 멀리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이방인이다. 이 문제는 외국인 노동자 사례와는 반대로 내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행동하고 있다. 가만히 듣다보면 이 갈등에 대해 남녀 가리지 않고 여성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 속에는 여성이 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저 막연하게 싸우기 싫고 대화하기 귀찮으니 대충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화된 이미지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여성만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보다 이런 사람들이 더 어렵다. 이들은 충분히 자신이 여성문제에 대해 존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보수성에 막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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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지금 필요한 것

정치-권력이 분리된 오늘날, 현대는 완전한 사회 탐색을 포기했다. 더 이상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기 보단 무엇이 발전 가능성 있는지 찾고 투자한다. 사회라는 마지막 권위에 기대어도 선과 악을 알 수 없다. 도덕이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선호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무엇이 더 우월한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규범의 공백은 개인의 자유도를 높였지만 개인의 정체성 유지는 어려워졌다. “나는 무엇이다”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국가를 위해 일해도 국가와의 일체성을 느끼기 어렵고 아이들을 위해 일해도 선생님이라는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 아무것도 없이 나를 ‘나’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간들은 그렇게 실존적 안정감이 낮아지고 항상 불안에 시달린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포스트 모던 상황 속에서도 ‘인간’ 조건의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 살지’ 같은 회의주의로 빠지지 말고 인간의 보편성, 다양성을 수용하고 모두의 복지 개념을 찾는 ‘과정'을 유지하는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오늘날의 회의주의자인 나에게 유토피아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정말 가능할까?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는데, 그 속에서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자꾸만 유동하는 현대에 나는 무엇을 중심으로 삼아야할까?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방향과 목적이 없는 이 상실의 시대에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아무도 답을 내리지 못했고 무엇도 보증해주지 않기 때문에 모두들 그저 달리고만 있는지도 모른다. 일단 살아남아야 되니까, 자기계발 하고 사람을 만나고 트렌드를 읽고 기술을 연마한다. 각자가 자기 부양해야만 하는 사냥꾼의 나라에서.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이전에도 밝혔듯이 나는 신도, 이데올로기도 믿지 않는다.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항상 의심하며 그것을 섣부르게 말하는 사람들을 멀리 한다. 이런 사람이 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며 조금씩 나만의 답을 찾고 싶다. 책이나 명사들의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나와 만나는 사람들과 흔들림을 나누며 이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답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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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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