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재의 미학, "어려운" 현대미술 [시각예술]

글 입력 2018.09.29 22:2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부재’란 무엇인가?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주, “나는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나는 좋은 직장을 갖고 싶어, 나는 멋진 배우자와 함께하고 싶어”등, 수많은 ‘존재’들로 우리를 둘러싸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재라니? 분명 우리는 부재를 원하지 않고, 심지어는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보는 것은 유 의미 할 것이다.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의 한계는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비가시적인 기억과 아이디어는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 그것이 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예술로 삼을 수 있을까? 추상적이고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현대 미술은 바로 이러한 난해한 문제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에 자주 이상하다, 어렵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필자는 이 어렵고 난해하고 추상적인 질문들을 현대미술이 어떻게 해결하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허쉬혼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What Absence is made of(이하 부재의 진가)’ 전시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다양한 작가 군의 70여개의 작품을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누고 있다. 그것은 각각 아트 오브제의 비 물질화, 조각난 신체, ‘무’에 가까운, 그리고 메멘토와 포스트휴먼 신체 섹션이다. 이중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한 몇 개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한스하케.jpg
Figure1, HansHaacke, <Condensation Cube>, 1963


첫 작품은 한스 하케의 <Condensation Cube> 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현대미술’이다. “이게 왜 예술이야?” 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그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작품 안에 숨어있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매력인 예술이다. 이 작가는 텅 빈 박스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Condensation은 차가운 표면에 생기는 물방울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세히 보면 이 큐브는 사실 텅 빈 게 아니라 전시된 갤러리의 온도나 외부 환경에 따라 물이 증발되어 큐브 벽에 물방울이 되고, 이 물방울은 흘러내려서 물이 되고, 물은 다시 증발해서 물방울이 되고, 물, 물방울....이라는 끝없는 변화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작은 박스이지만 이 안에서 시스템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구축되는 것이다. 뭔가 섬뜩하다. 이렇듯 한스 하케는 제도 비판 예술로 유명한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의 매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덤덤하게 작품을 전시해놓고, 사람들이 자세히 들여다보고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야 이 작품에 자신이 속한 세계와 현실이 담겨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약간의 소름이 끼치도록 만드는 그런 매력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예술 고유의 역할인 ‘사실적 재현’이 사라지고, 비가시적인 작가의 생각과 아이디어가 나타나게 된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부재의 진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요셉.jpg
Figure 2, Joseph Kosuth, <One and Three Chairs>, 1965

코수스.png
Figure 3, Joseph Kosuth, <Titled (Art as idea as idea)>, 1966

  

다음 작품은 조셉 코수스의 <Art as idea as idea>이다. 그는 1960년대 중반 개념미술의 시초를 알린 작가 중 한 명이며, 이미지나 예술적인 기교를 예술에서 지워지고, 아이디어의 직접적인 전달만이 남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즉 의미의 전달을 위해서라면, 의미전달을 방해하는 모든 것 (설사 그것이 이미지일지라도)을 모두 지워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곧 ‘개념미술’의 핵심이 되었다. <One and Three Chairs>라는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의자, 의자의 사진, ‘의자’의 사전적 정의를 전시한 그의 유명한 작품이 바로 그의 예술관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Art as Idea as Idea>라는 작품에서도, 그는 오브제와 이미지를 모두 지우고, 언어로써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만 온전하게 집중하고 있다. 여기까지 설명을 해도, “아니 도대체 왜? 왜 언어만이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어려운 얘기를 하기 앞서, 먼저  ‘예술’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려는 시도의 역사를 한번 간략하게 살펴보자.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학에서 예술 정의의 역사는 본질주의적 정의, 반본질주의적 정의와 신본질주의적 정의의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본질주의적 정의란 ‘예술의 본질이란 ~ 이다’라는 명제로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러한 본질주의적 정의에서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예술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상계를 모방한 이중 모방이라는 모방론,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라는 표현론, 그리고 예술은 추상화처럼 그저 아름다운 선 색 면의 조합인 형식이라는 형식론이 전개되었다.

  
뒤샹.png
Figure 4,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하지만 마르셀 뒤샹의 <샘>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예술이 거듭 등장함에 따라 모방, 표현과 형식으로 예술을 모두 설명할 수 없게 되자 본질주의적 입장은 점점 버려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뒤샹의 <샘>은 그가 직접 구매한 기성품이기 때문에 모방도 아니고,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백 번 양보해서 변기의 아름다운 선이 감동적이기 때문에 예술이라는 주장 또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20세기 초에는 열린 개념으로서의 예술을 주장하며, 예술에는 본질(즉 필요 충분조건)이 없고, 그저 닮음만이 있다는 반본질주의적 예술론이 등장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분석철학적 방법론은 논리실증주의에 입각하여 형이상학적 세계가 아닌, 경험 세계 내에서의 과학의 ‘논리’를 탐구하는 분석적, 언어적 철학이다. 논리실증주의는 경험론의 과격한 형태로, 오직 경험세계만을 인정하고,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본래적으로 ‘메타적’성격을 나타내고 ‘우리의 세계 이상의 세계’를 탐구하는 철학은 논리실증주의의 믿음에 따르면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과학자들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이론의 ‘내용’이 아닌, 그들의 사고 ‘형식’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증명에서,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정말 사람인지, 사람은 정말 죽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의 공식 자체에만 집중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추론의 타당성만을 따지고 내용의 진실여부는 상관을 하지 않는 흐름 속에서 발전하게 된 비평철학은 ‘말’, 그것의 ‘주요 개념’, 그리고 그 속의 ‘논리’를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결론이 불가능한 과제에 도전하고 있는 애매모호한 철학을 난센스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논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던지게 된 것이다. 그는 수많은 철학적 난제들이 언어 사용의 불 명확성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관, 즉 화용론은 일상 언어의 분석을 중시하고,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게임’이라는 개념의 일상 언어적 쓰임을 분석해보면, 그것은 문맥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소꿉놀이, 컴퓨터 게임 또는 스포츠라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본질은 없고 가족 유사성만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웨이츠라는 사람은 예술 역시 게임과 유사하게 열려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무언가가 가족유사성을 가진 열린 개념이라는 것은, 주어진 대상이 기존 개념 구성원 일부와 닮기만 하면, 그 개념의 새로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상 언어에서 “예술” 혹은 “예술 작품”이라는 말이 아무 문제없이 쓰이는 경우를 살펴보면, 인공품이 아닌 것에 대한 적용도 포함되므로 모든 예술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인공품임’ 마저도 예술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게 되면서 예술이 유사성을 매개로 항상 새로운 유형에 적용될 수 있는 ‘열린 개념’이라는 논의가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영향을 받아 현대의 우리가 익숙한 다양한 개념미술, 퍼포먼스, 해프닝 미술 등이 마침내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다시 조셉 코수스의 작품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왜 물체와 이미지의 부재, 그 부재를 대신할 ‘언어’라는 미디엄을 통해 작품을 만들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선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