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국 재벌 흑역사 - 현대 [문화 전반]

정주영과 박정희 그리고 빨갱이.
글 입력 2018.09.30 03:1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정주영 박정희.jpg
현대 회장 정주영과 대통령 박정희


지난 편 삼성에 이어 이번에는 현대로 넘어왔다. 영화 타짜에서 “이게 이병철이고 정주영이야” 할 때의 그 정주영. 무데뽀 정신으로 많은 이들을 피눈물 흘리게 한 그의 역사를 돌이켜보자. 이 글은 한국 재벌 흑역사라는 이완배 저의 책을 재서술 및 인용함을 밝힌다.

정주영과 무데뽀 신화.
한국 재벌들이 대부분 금수저로 태어나지만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주영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독히 가난했던 시기”로 기억하며 그의 아버지 정봉식에 대해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밡을 일궈 한 뼘 한 뼘 농토를 만들었다라고 회고한다. 가난 때문에 송전소학교만 졸업해 그의 최종학력이 국졸로 기록되는 것도 그의 가난을 입증하는 사례로 알려졌으나 당시 한국 민중들의 평균 삶과 비교해 지독히 가난했는지는 의문이다. 정주영의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훈장 노릇(당시 엄연한 지식 노동자며 글을 아는 엘리트 계층)을 했고 아버지는 6남 1녀 중 장남으로 동생들 결혼시키며 땅 몇 뙈기를 떼어줄 정도는 되었던 상황이다. 당시는 주지하다시피 일제 강점기가 아닌가.

정주영은 여하튼 가난이 싫어 가출을 했고 수 차례의 가출 중 1934년 19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점원으로 취직한다. 그리고 1938년 이 쌀가게를 인수해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경영자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1940년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렸고 해방 직후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워 사업을 시작했다. 정주영의 무데뽀 정신이 그의 경영에 영향을 끼친 것은 1947년이다.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그는 수리 대금(몇 백원)을 받으러 관청에 갔는데 건설업자들은 단 번에 몇 만원씩을 받아가던 것이다. 정주영은 동료를 모아놓고 건설업을 시작하자했고 말리는 동료들을 향해 “해보지도 않고 왜 미리 안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말을 남기며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세운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이다. 한국전쟁은 정주영을 큰 부자로 만드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고 정주영의 동생 정인영이 일본 유학 생활을 통해 드물게 영어를 할 줄 알아 미군 공병대에서 통역을 맡았고 정주영은 미군이 발주한 공사를 싹쓸이 했다. 그의 무데뽀를 보여주는 두 개의 일화가 있는데 하나는 1952년 12월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했으나 그가 묵을 운현궁이 너무 낙후돼 있었다. 정주영은 15일 만에 공사를 해낼 수 있다고 했고, 해낼 시 갑절의 보너스를 못할 시 갑절을 벌금으로 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공사를 따낸 정주영은 일꾼들을 용산으로 보내 피난으로 비어있던 부유층의 집을 닥치는 대로 털었다. 주인 없는 집에 침입해 양변기, 욕조, 세면대, 파이프 등을 싹쓸이 하고 “나중에 물건 값을 받으러 오라는 메모를 붙였다”고 한다. 상식으로 보면 가택 침입과 절도에 해당하는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듯이 성공한 경영자의 절도 역시 뚝심으로 미화되나 보다. 다른 하나는 부산 광안리 UN군 묘지에 아이젠하워가 방문하니 미군이 이곳에 푸른 잔디를 심어달라는 것이었다. 한 겨울에 잔디가 없으니 정주영은 퍼런 보리를 심어놓는다. 정주영의 이런 사고는 부실이건 눈속임이건 간에 결과만을 중시하는 박정희 군사정부와 죽이 맞아 개발 독재라는 토대를 딛고 성장을 달리기 시작한다.

이런 정주영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대 건설 출신으로 한국 증권가에 주가 조작 사건을 주도한 이가 바로 현대증권 회장인 이익치다. 그는 바이 코리아 펀드를 출시하여 3년 안에 100조원을 모으겠다는 허황된 목표를 세우고 ‘투자자 보호’나 ‘리스크 관리’ 같은 것 없이 현대 증권 창구를 통해 현대전자 주가를 조작하다 적발됐다. 또 다른 국민 사기극은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수개월 만에 1552군데에서 도로 파손이 발생했는데 이중 가장 많은 파손이 일어난 것이 서울~몽단 구간이었고 (전체 파손의 79%인 1180곳) 이 구간 공사를 담당한 곳이 현대건설, 건설 현장을 이끌었던 간부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은 2년 뒤 1972년 허가도 받지 않고 매머드 빌딩을 불법으로 짓다가 건축법 위반 혐의로 수배돼 구속된다. 현대의 정신은 신화로 남았을지 모르나 그 과실은 정주영 일가가 차지했고 폐해는 한국 사회가 감당했다.

정주영과 박정희, 8.3 사채 동결 조치.
박정희는 초법적 조치로 다음과 같은 대통령 긴급 명령을 내린다. 1971년의 경우 사채 금리는 월 4.5% 연 이자율 54%에해당하는 고금리였다. 은행권 대출 금리는 연 24%였고 은행 예금 금리도 22%라 당시 시대 상황에 보면 합당한 정도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월리 1.35% 연 16.2%로 바꾸고 이 마저도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이라는 제도로 바꾸어 버린다. 박정희는 왜 경제 원리를 뒤엎는 초법적 조치를 내린 것인가? 그것은 바로 기업들의 민원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 기업은 재벌 형성 초창기에 외형을 확대하느라 시중의 돈을 마구 끌어다 썼다. 정부가 도입한 외자는 물론 은행권 대출에 사채까지 써서 기업들은 사채 고금리 때문에 기업이 힘들다고 말하였고 유신 장기집권을 계획중이던 박정희에게 기업의 보챔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주영과 김용완(당시 경방 회장)이 부회장과 회장으로 있는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의 도박은 성공하여 박정희는 사채를 풀어주었으나 정주영은 경방회장에게 감사해야했다. 박정희가 전경련의 요구를 받아들일 때 김용완의 경방이 사채를 얼마나 사용하는지 파악하라고 했고 김용완이 사채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 사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었으나 당시 김용완은 경성방직의 부지를 다 팔아 사채를 해결한 상황이었다. 이에 비해 정주영은 온갖 곳에서 사채를 끌어다 썼고 1953년 경북 고령교 복구 공사에서 발생한 부채가 상당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이때 정주영은 6,500만 환의 빚더미에 올랐고 이 빚을 다 갚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회고하며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이라 평가하나 그를 살린 것은 불굴의 정신이 아닌 박정희가 풀어준 사채 동결 때문이다. 정주영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가 <시련은 있어도 박정희의 도움이 있다면 실패는 없다>로 수정되어야 하는 대목이다.

현대조선 폭동과 식칼 테러 – 현대만의 격렬한 노사문제 탄생 배경
박정희와 정주영이 군인 정신과 무데뽀 정신으로 잘 뭉쳐 중동에서 휴식 없이 노동자를 3교대 시스템으로 일터에 내몬 것은 차치하더라도 1987년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견장에 호루라기를 찬 경비들이 출근하는 노장들을 검지로 가리키며 복장이 불량하다고 정강이를 워커발로 차고 머리가 길면 바리캉으로 강제 삭발을 시키고 조퇴와 월휴는 불가했으며 물량을 못채우면 퇴근은 없었고 온갖 욕설과 구타를 감내해야 하는 대한민국 최고 기업 현대자동차에 다녔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 현대 자동차와 현대 중공업 공장 경비들은 대부분 해병대 출신이었다. 의문을 가질 수 있을테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고 1987년 7,8.9월 노동자 투쟁의 불씨가 일어난 곳은 울산이었으며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선 이들이 현대그룹 노동자였다. 그리고 당시 노동자들이 현대그룹과 정주영을 향해 가장 먼저 외쳤던 구호는 ‘임금 인상’이 아니라 ‘두발 자유화’였다. 도대체 정주영이 노동자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질문은 왜 현대그룹에서는 매년 격렬한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현대조선은 1972년 3월 조선소의 기공식이 열렸는데 1974년 26만 톤급 유조선을 완성한다. 현대와 정주영은 조선업의 초짜 중 초짜였는데 “조선소를 짓는 동시에 배도 완성한다”라는 황당한 전략을 세운다. 배를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27개월 그리고 이마저도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든 것이다. 현대 조선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에 동원된 인원은 연 백 만명이었다. 노동 3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1970년대 초반, 수장은 무데뽀 정신의 정주영 그리고 조선업을 4대 국책 사업으로 정한 유신 독재자 박정희 이 세 가지가 빚어내는 현실을 무엇이었을까.

1973년 한 해 동안 조선소에서는 1894건의 산재 사고가 일어났고 34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4년 7월 까지만 해도 1566건의 산재 사고가 발생했고 25명이 숨졌다. 정주영이 자랑한 26만 톤 유조선과 조선입국은 59명의 노동자들의 목숨 위에 빚어진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정주영이 1974년 조선소 안에서 캐딜락을 몰고 공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주영은 “비가 와서 그런지 라이트를 켰는데도 앞이 잘 안보였다”라고 말했고 그는 차에 탄 채로 바다에 빠진다. 아무리 비가 와도 그렇지 차를 타고 라이트를 켰는데도 보이지 않는 조명시설, 월화수목금금금(정주영이 직접 한 말이다.)을 기치로 일주일 내내 하루 16시간씩 노동하는 상황에 그것도 그룹 회장이 차를 몰다가 바다에 빠지는 판에 노동자들은 플래시도 없이 바다에 안빠지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다른 사례로는 현대 미포조선 회장을 지낸 이정일과 미포조선 사장을 지낸 백충기의 말이다. 이정일은 “그런 여건에서 사고가 안났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라 말하면서 작업 조건도 나빴고 정신들이 해이해져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모든 안전사고는 안전시설이 미비해 발생하기도 하지만 정신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정신 상태가 그만큼 중요했단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백충기는 신입 사원이 도장 일을 하며 역부족을 느끼고 책임감을 통감하여 자살하였다. 그러나 그럴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모두가 전력을 다했기에 오늘날의 현대 중공업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그들은 어째서 이런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는 것인가.

26만 톤 유조선 완성에 성이 안찼는지 정주영은 ‘선진 노동 관리 기법’이라고 불리는 임금 하겠다고 나섰다. 일종의 성과급 제도로 이로 인해 직원들의 월급이 절반이 날아갈 판이었고 원칙 없는 해고로 현대조선 노동자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건조식에 참석해 정주영의 노고를 치하한 지 3개월 뒤인 1974년 9월 19일 현대조선소 기능공 2,500명이 공장 본관으로 몰려들어 1. 능률급제 폐지 2. 부당 해고 금지 3. 사원과 기능공의 차별 대우 철폐 4. 시간당 임금 100% 인상 5. 상여금 지급 6. 노동조합 결성 보장 7. 임시직의 공원 승격 보장 등 모두 13개의 조항으로 농성을 시작했다. 정주영은 이에 대해 “미친놈들의 헛소리”라며 일축했고 분노한 노동자들은 본관 유리창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급히 현장에 내려 온 정주영도 이마에 상처를 입었고 경찰은 600명은 투입해 사태를 진압했다. 격렬한 상황에 경찰과 노동자 양 측의 부상자만 100명이 넘었고 현장 기동경찰 10여 명은 사건 취재를 위해 현장에 내려온 동아일보 기자를 향해 “이 판에 기자 새끼가 무슨 소용이냐”며 곤봉으로 폭행했다. 노동자 663명이 현장에서 연행됐고 21명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현대조선 폭동 사건’으로 기록된 그 사건이다.

유신 독재가 진행되고 언론마저 철저히 통제된 탓에 이 사건의 제대로 된 기록은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여야 의원들의 발언이고 당시 유신정우회 김상봉, 신민당 천명기, 신민당 김윤덕에 의해 현대의 부당함을 논했다. 이에 대해 정주영은 각 신문 1면에 ‘현대조선 분규에 대한 해명서’라는 제목으로 대문짝만한 광고를 실었다. 그는 “이번 사태는 일부 견습공들이 선진 노사관리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며 “몇몇 적당주의로 일하던 조장급 기능공들이 능률급제가 도입되면 월급이 깎일 위험에 처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근로자들을 선동한 것”라고 주장하며 본인들의 잘못이 없다고 강변했다.

현대조선 폭동 사건 이후 전두환,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이어지기까지 정주영의 경영관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사회 분위기상 이제 예전처럼 노동자를 팰 수는 없으니 노동자들의 파업을 모두 외부 불순 세력의 선동 탓이라거나 모두 좌경 용공 분자라고 몰아세웠다. 그는 1087년 12월 회사 안에 ‘자유 수호 구국 직장 평화봉사단’이라는 코미디 단체를 만들었다. 자동차와 배를 만드는 회사에서 무슨 자유를 수호하고 구국까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정주영에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 내에는 “누가 내 동료를 붉게 물들이려 하는가? 우리 함께 앞장서서 붉은 마수 물리치자!”따위의 플랜카드가 걸렸다.

1989년 1월 8일 파업 중이던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 등 현대그룹 노조 간부들이 울산 울주군 석남사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직전해인 12월 18일 회사 측과 단체협상이 최종 결렬되자 파업에 돌입한 상태였다. 당시 언론 보도를 종합해 보면 이 파업은 테러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외견상 평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측이 동원한 34명의 보멱 괴한들이 침입해 노조 대의원 19명을 각목과 야구방망이, 곡괭이 자루 등으로 마구 두들겨 팼다. 이들은 노조 대의원의 이름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우리 아버지는 김일성이다”라는 복창하도록 시켰다. 더불어 노조 초대 위원장 권용목을 찾아내어 오른 팔을 부러뜨리는 등 전치 6주의 중상을 입힌다. 현대 중공업과 현대 엔진 노조원 오천여명은 즉각 폭력테러 규탄 대회를 열었고 경찰은 현대엔진 전무 한유동이 범행을 지시했다는 1차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주영은 이에 멈추지 않고 2월 21일 평화 시위중이던 노동자들을 상대로 2000여 명을 도입해 경찰 10개 중대 1500명이 지켜보는 와중에 식칼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조합원 두 명이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중경상을 입은 노동자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현대 중공업 사측은 3월 18일 신문광고로 회사는 법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망언을 하였고 이후 3월 30일 경찰이 1만 4000명의 경찰력을 투입하고 이후 2차로 1만 8000여명의 육해공 작전으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이제는 죽은 고 김종필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에 경제 공로자 정주영, 이병철 두 분의 세워졌으면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우리 후손들이 그 두 동상 앞에 서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모습을 나는 상상한다.” 과연 그럴까. 쿠데타의 주역으로 평생 권력 주변에 있던 그는 노동자의 삶을 알기는 한 것인가?

부동산으로 보수를 지배하라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은 단지 ‘유신정권 시절 특정 고위층이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에만 끝나지 않는다. 이 사건은 보수 정권이 부동산 특혜로 권력층에게 부를 이전하고 그를 통해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낸 ‘부동산 통치’의 출발점이 된다. 박정희는 물론 전두환과 노태우, 이명박과 박근혜 모두 부동산 개발과 아파트 가격 상승에 목을 건 이유는 ‘부동산을 통한 보수층 통제’를 매우 손쉽고 효율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196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며 서울의 인구는 포화 상태가 되었고 토지가 부족하니 지가는 오르게 되었다. 이를 통해 땅을 매점해 되파는 부동산 투기가 판을 쳤고 정부의 토지 계획 발표는 그 지역 땅값 급등과 직결되었다. 그러나 개발지구가 지정되기 전 중요한 정보는 권력의 실세들에게 공유되었고 서울 도심과 강북 일대에서 다 해먹은 정부와 투기꾼이 새로 눈을 돌린 곳은 영동이었다.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말로 현재의 강남인 이곳은 1973년 당시 다양한 세금을 면제했고 건설업체에게는 은행으로부터 주택건설자금을 우선 융자받을 수 있는 특혜도 제공되었다. 현대는 제 3한강교 즉 한남대교가 착공되기 전부터 경부고속도로의 대금으로 (현재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있는 위치) 공유수면을 받았고 1976년 로또의 땅 압구정동에 현대아파트를 완공한다.

문제는 이 아파트의 1512 가구 중 952 가구를 현대의 무주택 사원에게 분양하는 조건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았는데 1977년 11월 청와대로 날아온 한 통의 투서에는 이 952 가구중 상당수가 공직자와 언론인들에게 특혜로 분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78년 4월 이 사건이 처음 언론에 보도되었고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청와대는 사건을 조사한 바 있다고 시인했고 검찰이 발 빠르게 수사에 나섰다. 무주택 사원에게 돌아가야 할 952가구 가운데 실제 사원에게 분양된 분량은 오직 291가구였고 나머지 600여 가구는 전부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기업인, 언론인, 현대그룹 임원들의 친척과 동창들에게 분양됐다. 특수 분양 형식으로 분양을 받은 이들 중 투기성 투자를 한 사람들도 56명이나 되었고 두 가구 이상 분양을 받은 사람은 9명 (공직자 5명), 분양권을 전매해 엄청한 시세차익을 챙긴이들은 44명(공직자 20명)이었다. 검찰에 의해 언급된 이들은 이재상 검사와 강서룡 변호사, 국회의원 중에는 공화당 소속 박삼철, 육인수, 유신정우회 김진복과 이범준, 신민당 한병채와 김명운 등도 분양자 명단에 올랐다.

서울시 제 2부시장 곽후섭은 분양 과정에 부정 개입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성동지청 검사 임광준,상공부 차관보 김선길, 국방과학 연구소 서무과장 유혜선 등은 청탁 알선 혐의로 징계를 받았으며 이밖에 순천향 병원 의사, 주일대사관 참사관, 국립 교향악단 단원 등이 투기자 명단에 올랐다. 특이한 점으로 당시 현대건설 사장으로 무주택 사원용 아파트의 분양 대상이 아니었던 이명박도 무려 네 채를 분양 받았다. 이명박은 처남과 형(이상득), 장인 등의 이름으로 네 채를 분양 받았는데 국회의원 1993년 9월 처음 실시된 국회의원 재산공개를 앞두고 뒤가 켕겼는지 모두 팔아 버렸다. 이 현대 아파트 사건은 언론인도 37명이나 연루되어 있었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정권이나 재벌 차원의 비리에서 언론인이 관련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을 미루어보아 사건의 심각성을 더했다. 분양 특혜 비리를 감시해야할 기자 중에는 동아일보 조용철, 서울경제 엄병윤이 두 채 이상 분양을 받았고 더불어 동아일보 회장이었던 김상만, 조선일보 정치부장이자 국회로 진출한 최병렬, KBS 경제부장이었으며 역시 국회에 진출한 박성범,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으며 이후 한국 디지털위성방송 사장을 지낸 서동구 등 내로라하는 언론인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부동산의 보수화는 새로운 부의 분배 방식이었기에 박정희의 영동 개발, 전두환의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 노태우의 신도시, 이명박의 종부세 축소, 박근혜의 부동산 규제 해제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주영의 시류론
정주영은 5공화국 청문회에서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국회의원들도 정주영을 향하여 증인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질의자 중 유일하게 정주영을 향해 당당한 태도를 보인 인물은 고 노무현뿐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조차도 의회 권력이 돈 앞에서 얼마나 볼품없는 것이었는지를 인정하며 대한민국 정치사에 지울 수 없는 굴종의 순간으로 남는다. 5공 비리 특별 위원회가 열렸을 때 주요 안건은 일해재단, 전두환 일가 해외 재산 도피, 삼청교육대, 국제그룹 해체 등 44개의 항목이었으나 그 중에서 일해재단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일해는 전두환의 호로 이 재단이 자금으로 주가 조작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87년 정주영은 자발적으로 기금을 낸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88년 정주영은 그 돈은 전두환이 강제로 걷어 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자정까지 이어진 길고 긴 청문회에서 정주영의 입에서 ‘죄송’이라는 말은 노무현의 추궁에서 나왔고 그의 입에서 사과가 나온 것은 유일했다. 당시 현대 그룹에서는 정, 관계에 로비를 했다는 정황이 돌았고 정주영은 힘있는 자가 달라고 하면 시류에 따라 주고 그가 힘을 잃으면 헌신짝 버리듯 버려버리는, 그가 1공화국부터 6공화국까지 정립한 시류론을 보여주었다. 당시 노무현은 긴 시간을 할애해 정주영에게 현대그룹 노동자 탄압에 대해 물었고 노무현은 현대그룹 노동조합 설립 때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였다. 그러나 정주영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나는 그때 2선으로 물러나 있어서 모릅니다”로 국회의원이자 바지저고리의 추궁을 일축해버렸다.

그 외
싼타페 개소리 사건, 현대 그룹 왕자의 승계 싸움, 정주영과 통일국민당의 실패, 김대중과 정주영의 밀월. 그리고 정몽준과 정몽주니어와 같은 수많은 사건들이 있다. 본 글에서는 현대가 만들어낸 국가적 책임에 대한 것만 개괄적으로 서술한 것이니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직접 한국 재벌 흑역사를 찾아읽기를 권장한다.


[김혁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2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